주님과 함께 걷는길/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10) - 막8장5-13 (김세윤 교수)

꿈심는농부 2017. 3. 3. 03:12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성전 (2)

 

성경 말씀 마8:5-13절 까지 입니다. 제가 사무실에 여기 주보에 나온 대로 막14:17-25절 까지로 불러 드렸는데 한 주 앞서 가버렸지요. 이 다음 주에 그렇게 되겠고 오늘은 마 8:5-13절입니다.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마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지난 두 주에 걸쳐 우리들은 예수께서 이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성전으로 생각을 하셨다는 것을 살펴보고 또 그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그리시면서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파괴될 것과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으로 인해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처형이 되었다는 것을 살펴 보았어요.

 

그런데 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파괴될 것을 예언하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전통을 따라서 충분히 이해가 되나 자신이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 했고 그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이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과업이다고 했는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마가복음11장 12장 14장에 있는 예수의 산헤드린에서의 재판기록을 보면서 예수께서는 은근히 그러나 당시의 산헤드린의 신학자들에게는 의심의 여지없이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적 대망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삼하 7장12-14절 까지의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러니까 메시야로서 자신이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전을 짓는 메시야라고 나타내 주었다는 것을 보았어요.

 

그러니까 이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성전으로 예수께서는 그렸다 또 자신의 메시야적 과업을 새로운 성전을 짓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지난 번 두 시간에 걸쳐서 생각을 해 보았어요. 그래서 조금 더 탐구를 해야겠는데 왜 예수는 자신의 메시야적 과업을 성전건축으로 보았는가?

 

이 질문은 왜 예수께서는 당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자신의 메시야적인 과업을 다윗왕조를 재건해서 이스라엘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주는 군사적 정복자 정치적 왕으로서의 과업으로 보지 않고 성전건축으로 보았는가? 그것이 우리가 오늘 이시간과 오는 시간에 걸쳐서 생각해 볼 문제여요. 지금까지 제가 지난 시간에 우리 두 시간에 걸쳐 공부한 바와 오늘 과 이 다음에 걸쳐서 공부할 바를 간단히 소개하는 동안에 여러분들 마음 속에 아마 질문이 하나 자꾸 솟을 거여요. 도대체 예수께서 의미한 성전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자신의 메시야적 과업을 성전건축으로 보았는데 무슨 성전을 건축한다고 그러는가? 우리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성전건축했다는 말이 있어요? 또 사도들의 선포에 예수께서 무슨 성전건축 했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 말이 일체 없는데 예수는 엄연히 성전을 새로 건축하는 메시야라고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것을 지난 시간에 우리가 보았어요. 무슨 성전을 건축했다고요? 당장에 이 성전의 뜻이 무엇인가가 여러분들에게 제기되는 질문일 것입니다.

 

잠깐 지난 번에 보았던 그 본문들을 보겠습니다. 막 14장 58절 산헤드린에서의 주님의 재판장면을 다시 보면 그 증인들이 일어나서 뭐라고 했느냐면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예루살렘이 지금 있는 서 있는 이 엄청난 성전을 내가 부수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지으리라고 했습니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앞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은 분명히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죠. 분명히 사람들이 손으로 지었지요. 사람들이 손으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지요. 예수는 그 막13장 2절에서 본 바와 같이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괴될 것을 예언했죠. 그러나 이 증인들이 예수의 죄를 더 크게 할려고 예수께서 파괴한다고 스스로 위협했다고 말을 돌려가지고 거짓증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하여간 그 다음 그러면 예수께서 자기가 짓겠다고 하는 성전은 어떤 성전이냐?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 여기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이라는 말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이것은 하나의 숙어여요. 우선 사람이 짓지 아니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또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편에서의 하나님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 편에 속한 분에 의해서 지어지는 성전이다는 말이어요. 둘째는 이 속에 아마 2차적인 의미로 건물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의 성전을 말한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어요. 그 다음 또 예수께서 성전을 어떤 성전으로 의미했는가에 힌트를 주는 말이 “사흘만에”라는 문구여요. 이 문구는 호세아서 6장 2절에서 왔는데 여러분들 호세아서 6장 2절을 보시겠습니까? 1절 부터 읽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쫓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면 제 3일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 서리라”

 

이것이 무슨 예언입니까?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찢김 당할 것임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하실 것.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백성이 살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이어요.

 

바로 예수께서 이 말을 염두에 두고 사흘 만에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거여요. 그러니까 이 지금 막 14장58절에서 예수께서 의미하는 자기가 세운다는 자기가 건축한다는 성전이 돌과 나무로 짓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앞에 다시 회복되는 하나님의 백성 그래서 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해서 영생을 누리는 그런 백성을 성전이라고 부르고 그런 성전을 짓겠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그런 종말의 새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세우시겠다. 창조하겠다. 일으키겠다. 모으겠다. 그런 뜻으로 예수께서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주장하시지 않았겠는가? 일단 그런 짐작을 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과연 그런가를 우리가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면 첫째로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복음서들 우리 사도들의 선포를 담고 있는 사도행전 이후의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께서 무슨 성전 건물을 지었다는 말이 없어요. 예수께서 종말에 그가 다시 오실 때 성전 건물을 지으리라는 미래적인 예언도 어느 곳에 없죠. 사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그 종말에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성전이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부러 써 놓았어요. 그러니까 건물성전으로서는 전혀 예수께서 당시 짓겠다든지 미래에 짓겠다든지 그런 예고를 전혀 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어요.

 

또 하나의 이유가 우리가 이 관계에서 생각해 볼 것은 이 다음시간에 우리가 생각을 집중적으로 하겠습니다만 마침 또 교회력으로 고난절 수난절에 임하게 되니 시기 적절함도 있습니다만 예수께서 이 자기의 죽음을 제사로 해석을 해요. 그런데 크게 두 카테로리로 해석을 애요. 이 대속 죄인들의 죄를 덮고 씻어서 죄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내는 그런 제사로 그리고 또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해석을 해요. 그래서 자꾸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예고하는데 자기 죽음이 하나의 제사라. 죄인들이 죄의 용서함을 확보하고 그 죄인들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는 새 언약의 제사라 그런다고요. 그런데 이 제사라는 것이 사실은 어디에서 이루어 져요. 구약에 의하면 제사가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제사라는 것이 성전의 고유기능이죠.

 

성전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언약을 상징하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을 자기 백성 삼아서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언약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의 거처지로 삼은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 그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심을 상징하는 것이 성전이라. 그래서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어요. 집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그런데 예수께서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고 하니 그 속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부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자기 죽음이 속죄의 제사라는 말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무슨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지냄이 의미가 없음. 더 이상 제사가 속죄를 이루는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로 예고하기 시작했다는 말은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을 부인하는 부정하는 함축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것을 예수께서는 그 성전의 제사를 방해하는 행위로 시위하는 거여요. 그것이 이른바 성전청결 사건의 의미 중의 일부여요. 둘째로 뭘 부인합니까? 지금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제사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뭘 부인하고 있어요? 이 속에 함축되는 의미가? 또 다시 건물이 지어 졌어요. 그러면 헤롯이 세운 건물을 다 헐어 버리고 쿰란 같은 곳에 은거했던 에센파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새로운 건물을 더 거룩하고 더 아름답게 지어서 거기서 또 짐승들로 제사 바칠 것. 그런 일도 있을 수 없을 것임. 그것을 부인하는 거죠.

 

전에도 제가 말씀드리지만 B.C.153-4년 그러니까 어림 잡아서 B.C.150년에서부터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유대민족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민족공동체가 완전히 망하는 주후 70년 이 사이에 이 쿰란 같은 곳에 유대 땅 사해 언저리에 있는 동네 쿰란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런 곳에 은거해 살았던 일단의 열성 율법수행자들을 에센파 사람들이라고 그래요. 또는 에센파라고도 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에 살았던 바리새파 사람들하고 신학적으로 많은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율법에 대한 헌신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문자 그대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세히 지키려는 하는 경건운동인 바리새파와 신학적으로 많이 같은데 몇 가지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그 가장 큰 차이가 뭐냐면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했어요. 그 예루살렘 성전이 사두개파 제사장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가지고 부패하고 타락하고 좀 마땅치 않은 바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져버리지 않았어요. 그 곳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고 그 곳에 가서 제사하고 이렇게 살았어요. 그러나 에센파 사람들은 이 무렵에 예루살렘 성전이 엉터리 정통성이 없는 대제사장과 그의 패거리들에 의해서 장악이 되고 타락해서 하나님이 거기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 그 제사는 일체 무효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일체 부정하고 자기들의 공동체에 철수해서 자기들 끼리 금욕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여 살았어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과는 완전히 절교하고 제사도 않고 완전히 절교하고 이 사람들은 종말에 자기들인 빛의 자녀들과(자기들을 빛의 자녀라고 보았어요) 이 어둠의 자녀들(어둠의 자녀들이란 물론 로마 이방 통치자들도 거이 속하겠지만 그들과 타협한 예루살렘 거짓 제사장들과 그의 패거리들 심지어 바리새파 까지) 과 거룩한 전쟁을 벌여 가지고 종말에 천사들의 도움을 받는 빛의 자녀들이 결국 승리를 해서 성지를 회복하고 온 세상을 점령하고 그 때에 예루살렘에 거룩한 성전을 문자 그대로 건물 성전을 지어서 타락하지 않은 거룩한 깨끗한 이 제사를 구약의 율법이 원래 의도한대로 순수하게 드리리라고 보았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남긴 문서들이 아주 중요한데 그 문서들 중에 조금 늦게 발견된 문서 하나가 쿰란의 11번째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해서 11Q라고 하는데 그 문서이름이 긴 문서여요. 성전이라는 문서. 종말에 자기들이 성전(거룩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지고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새로 지을 성전 성전이란 말이 의미가 다르게 두 번 나와서 온동이 됩니다만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이겨서 예루살렘을 탈환 뒤에 지을 건물 성전 그리고 그 안에서 이를 타락하지 않은 깨끗한 제사에 대해서 그러한 새 성전과 그 곳에서의 제사에 대한 것이 수록되어 있는 문서여요. 상당히 긴 문서인데 그래서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부인하면서 종말에 새로운 건물 성전을 지을 것과 그 곳에서 아주 깨끗한 제사를 드릴 기대를 가지고 살았어요.

 

그러나 우리 복음서에 보면 예수께서는 어떤 점에서는 쿰란 공동체 사람들과 아주 비슷해요. 예루살렘 성전을 부인하는 점에서는 비슷해요. 그것이 곧 파괴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데에서는 비슷해요. 또 어떤 점에서 같아요? 정확하게 말 합시다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것에서도 같아요.

 

어디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요? 쿰란 공동체는 건물 성전을 짓고 짐승제사를 깨끗이 드린다고 그랬는데 예수의 가르침에는 건물 성전을 짓고 짐승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어요. 제사는 이미 예수가 자기 죽음으로 드리는 거여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무슨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예수는 건물 성전과 그 속에서 짐승제사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성전을 짓는다고 할 때 그 성전은 건물일 수 없다. 그렇잖아요? 좀 더 확실히 정의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성전을 무엇을 두고 성전을 짓는다고 했는가? 조금 더 정의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무엇을 하시려 했나를 한 번 문제를 그런 식으로 접근해 봐요. 무엇을 의도하셨나?

 

아까 지금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그렸다.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성전을 새로 짓는 행위로 보았다. 성전건축 행위로 보았다 하는 것인데 지금 여기까지는 부정적인 결론을 하나 내렸어요. 예수는 성전을 건물로 보지 않았다.

 

그러면 무엇으로 보았느냐? 긍정적으로는 무엇으로 보았느냐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무엇을 의도했는가? 그것을 좀 보면 좋지 않겠어요? 그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 성경을 여러 곳을 읽을 수 있겠습니다만 막 2장 17절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거기서 한 마디로 예수께서 오신 목적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한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을 했죠? 막 2장 13절 부터 읽읍시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 가시다가 알페오의 아들 ········”

 

“막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전에도 우리가 다 보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되 주로 잔치로 그리면서 선포했다고 그랬죠? 그 선포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무엇을 베풀었어요? 잔치를 베풀었다고 그랬죠. 그래서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베풀어질 하나님의 부요함의 잔치를 벌써 맛보게 함으로 그들이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에 확실히 참여해줄 것을 보증하는 일을 하셨다고 그랬죠.

 

지금 막2장을 읽은 장면이 그런 장면이어요.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서 예수께서 먹고 마심.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한 죄인들과 세리들과 먹고 마심. 그것에 대해서 이 신학적으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신학적으로 시비를 할 때에 대답하시기를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도가 뭐라고요? 죄인들을 부르기 위한 초대하기 위함.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 이 말이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누구입니까? 사단의 나라에 있는 사람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잖아요? 사단의 나라에 사단의 주권에 사단이 강요하는 힘에 죄짓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으로 불러내는 일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의도여요.

 

다시 말하면 사단의 통치영역 아래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하나님의 통치 영역 하나님 나라로 믿음으로 들어오라고 부름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이고 그렇게 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했느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려는 것 사단의 백성노릇 그만두고 사단의 종노릇 그만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여 하늘과 땅의 지으심의 그 부요함을 상속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죠.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 나라 구원의 축복을 이런 그림을 써서 잔치의 그림을 써서 또는 상속의 그림을 써서 설명을 해 주고 너희들이 사단의 나라에서의 삶이 어떤 것이고 결과가 어떤 것이고 결론이 어떤 것이니까 열심히 예수께서 선포를 해요.

 

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잔치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잔치와 상속의 그림으로 설명할 때에 그것이 빈말이 아니고 지금 벌써 구원의 힘을 나타냄을 예수는 무엇으로 시위했다고 그러죠. 치유로 시위했어요. 거의 모든 치유행위로. 문둥병자를 고치기도 하고 혈루병자를 고치기도 하고 손마른 자를 고치기도 하고 중풍병자를 고치기도 하고 우리 각색 병든 자 옛날에 명색이 대학생으로서 성경을 읽을 때 그 각색 병이 무슨 말인지 몰라 가지고 가지가지 병이란 말이죠. 난 각색병이란 병이 있는 줄 알았어요. 하여간 가지가지 병 꼭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고 심리적인 병 사회적인 병 까지 다 포함해서 굉장히 강조했습니다. 여러분들 삭개오 같은 병든 사람 세리같이 병든 사람 예수께서 다 치유하심으로 그 구원의 힘을 시위하면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고 부른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게 했죠.

 

그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그 메세지에 응하면 그들에게 완성될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 구원의 잔치에 확실히 참여할 것임을 보증해 주는 의미로 그들에게 너희들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로만 선언하는 것이 아니고 아주 극적으로 아주 물질적으로 시위를 주셨어요. 그것이 예수께서 그들과 먹고 마심의 잔치를 베풂이어요.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 주었어요. 그들이 이미 하나님의 천국잔치의 참 맛을 볼 수 있음. 곧 종말에 완성될 잔치에 확실하게 참여하게 될 것임을 가르쳐 주었어요.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까 여러분들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 된 하나님의 종말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고 잔치를 베풀어서 그 잔치를 시위하고 할 뿐만 아니고 여러분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하나님을 이제 아빠! 라고 불러봐라.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누구라고 가르쳤어요? 아빠! 라고 부르라고 가르쳤어요. 예수 자신만 하나님을 아주 독특하게 불렀다고 그랬죠. 어느 유대인도 그렇게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른 예가 없어요. 문서적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께서만 아주 독특하게 불렀는데 그의 하나님 나라에 초대에 응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그렇게 불러봐라. 아빠! 부를 때 뭐하라는 거여요.

 

하나님이 아빠 노릇해주실 것임을 확실히 믿고 그 아빠에게 청원할 것을 하라 말이어요. 여러분들이 아빠! 부르면 뭐하는 거여요. 청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주께서 어떻게 기도하라고 가르쳐요? 첫째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르며 이른 바 주기도문의 첫 마디가 아빠!라고 했죠. 부르고 뭐하라는 거여요. 우리 모두 필요한 것을 인해서 청원하라는 거여요. 우리 죄를 용서 우리 일용할 양식 필요하죠. 아무리 영적인 사람도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죠. 우리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청원하죠. 죄 용서를 위해서 청원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인도해 주시도록 청원하고 벌써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청원하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을 치유로 시위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선포에 응한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기도라는 것을 수단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 구원의 힘을 체험하게 하도록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그의 부요함을 상속받으라는 거여요. 기도하라는 것이 뭐여요.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끌어 쓰고자 하는 행위 아니어요. 그러니까 종말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되는데 지금 벌써 왔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인간만사를 지배하신 하나님 그 무한한 하나님의 부요함을 그에게 아빠! 응석 부리면서 나아가서 어린아이가 마치 사탕을 달라고 좋은 구두를 사 달라고 졸라대듯이 그렇게 하라 이 말이어요. 그렇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어요.

 

하나님의 백성 그렇게 해서 궁극적인 의도가 뭐라고요?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같은 말이어요. 자 그런데 거기에 누가 응합니까? 여기 지금 막 2장에서 본 바와 같이 죄인들 세리들은 많이 응해요. 그런데 꼭 그들만 응한 것이 아니고 우리 복음서에 보면 상당히 그 당시 위세 당당한 바리새인도 응하고 고관들도 응하고 그래요. 우리 그런 사람 여럿 알죠. 예수의 장례를 치를 때 도운 아리마대 요셉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고 요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도 상층부에 속한 사람이고 예수께서 이런 또 전에도 제가 한 번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잔치 이야기 할 때 강조해서 다시 되풀이 하지 않겠는데 예수께서 부요한 추종자들에게 사실은 많이 의존했어요.

 

그래서 여러 곳에서 예수의 떠돌이 선교여행에 동참했던 제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팔레스티나 여러 곳에 붙박이 제자들 또는 붙박이 동조자들이 있었는데 예수 스스로 예수께서 나중에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보낼 때에 제자들이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어떤 파벌적인 것이 아니어요. 부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중산층만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민중신학자나 해방신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플로레타리아 가난한 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여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남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서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하되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뭐 믿을 만한 것이 있는 사람들은 응함이 적어요.

 

다시 말하면 돈이 있다든지 권세가 있다든지 또는 자기가 바리새인으로서 서기관으로서 신학적인 지식도 많고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경건생활 한다고 자기 의를 믿는다든가 하여간 이 세상에서 뭘 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응하지 않아요. 그 응함이 적어요. 아까 이야기한 예들도 있었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뭐라고 한탄하는 거여요? 맘몬이라는 우상이 어쨌다는 거여요? 그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그 이른바 예수가 말한 것처럼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부자들이죠. 그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말이어요. 왜? 이 세상에서 믿을 만한 그것을 믿고 그것이 부든지 권세든지 자기지식이든지 무슨 종교적 경건성이든지 그런 것에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 하고 자신의 구원자체를 확보하려하면 그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로 초월적인 영원한 구원을 줄 수가 없죠. 줄 수가 있는 것으로 환상을 하고 돈에서 권세에서 지식에서 종교적 경건성에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자기의 이런 것에서 자기 부를 확보하려 하니 이것은 사실은 속이는 일인데 이런 것은 이 사람이 요구하는 것만큼 되는 거여요.

 

요구하는 것만큼이 뭐여요? 이 세상 내에서 시간 내에서의 안전과 행복만큼만 줘요. 시간 저편의 영원한 이 세상 저편의 무한한 삶은 주지는 못한다. 이 말이어요. 그런데 바로 이 세상의 내재적인 제한적인 것이 마치 구원인 냥 착각을 하니까 그러니까 우상숭배가 멸망으로 이끄는 거여요. 그러니까 첫 계명이 우상숭배를 금하는 거여요.

 

그런데 그러니까 그런 것을 미리 아는 사람들 어떤 사람들? 이 세상에 믿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 스스로 죄인들이라고 자각하는 사람들 세리들 병자들 자기의 아픈 자기의 문제들을 절실히 아는 사람들 또 세상에서 겉보기에는 무엇을 좀 가지고 있지만 돈이 있든지 권세가 있든지 하지만 그것으로서 자기의 안전과 행복과 구원을 궁극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고 깨닫게 된 사람들 아까 아리마대 요셉이라든지 니고데모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예수에게 응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응함 가운데 어떤 사람들도 있어요? 아까 읽은 본문 마8장에 가끔 누구도 있어요? 이방인들도 있어요.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선포하지 않고 자기의 선포를 유대인들에게만 국한 시켰는데도 이방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 들이고 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덧 입을려고 믿음으로 예수에게 나와 오는 거여요. 마 8장에 있는 백부장 같이 그것을 예수께서 누구와 대조합니까? 제일 유대인들의 유대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열성 바리새인들 자기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 함으로 자기들은 됐다고 생각해서 예수의 말씀에 귀를 귀울이지 않은 사람들 그의 초청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 대조해서 여기 보세요. 마 8장 11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과 서로 부터 그러니까 세상 사방으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르러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모든 민족들을 말해요 숙어여요)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 둘러 앉아 잔치를 나누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지금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의 비젼이고 예수께서 의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젼이어요.

 

종말에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믿음으로 응해서 이 백부장 같이 믿음으로 나아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식탁에 둘러 앉아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임. 그때에 어쩐다고요? 12절 그 때에 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먼저 불림 받은 특원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 가지고 자기 의를 주장하느라고 이 세상에서 자기가 뭐 기댈 것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예수의 초청에 믿음으로 응하지 않은 이 사람들은 쫓겨 나기지고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러잖아요. 그래서 예수께서 의도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는 거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잔치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는 자녀들이 되게 하려는 것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의도였어요.

 

이렇게 말합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한 구원이 뭐냐? 그 구원이 뭐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함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음. 그것이 예수께서 약속하는 구원이어요. 전에도 제가 설명을 했어요. 그것이 왜 구원이냐? 오로지 그것만이 우리 피조물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창조주의 초월에 참여하는 길 아니겠습니까? 그것만이 구원아니겠어요? 여러분들! 우리의 피조물의 제한성 결핍성 가난함 우리의 시간적으로 제한된 장소적으로 제한된 지혜의 부족함 능력의 부족함 사랑의 부족함. 이런 것에서 모든 고난이 온다고 그랬죠. 이 고난들이 뭐냐면 우리가 죽음아래 있음의 증상이죠. 이런 상태로 있는 한 우리 제한된 자원을 아무리 개발해 보았자 그 제한성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시켜줌. 그의 통치아래 들어가서 그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의 왕노릇해 주심. 그의 아빠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살도록 그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여기서는 뭘로 그렸다고요? 잔치라는 비유로 그렸어요. 그의 풍요로움 그의 아빠 노릇해 주심을 무슨 그림으로? 상속 그래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다. 그것이 예수께서 약속한 구원이어요. 그 구원을 한 마디로 말하면 뭐라고요? 영생이라 이 말이어요. 시간이 다가서 한 구절만 읽고 마칩시다.

 

눅 12장 32절 거기서 예수께서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것을 주님은 뭐라고 설명하는가? 눅 12:29절 부터 읽읍시다.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그 다음 가장 중요한 말 왜 그러느냐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여기서 무리라는 말은 양떼라는 말이어요. 양떼는 구약에서 무엇의 그림이라고요? 하나님의 백성의 그림.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의 양떼라고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목자 노릇해 주신다는 그림과 너희들에게 아빠 노릇해 주신다는 그림이 겹쳐 있어요. 아빠노릇헤 주심이 뭐냐? 우리에게 베푸심. 우리에게 상속주심.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늘 걱정하는 결핍상태에 있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어요. 이것으로 부터의 해방 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하는 구워니어요. 그 구원을 어떻게 이른다고요? 우리가 그의 부름 그의 초대에 응해서 회개함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벗어나서 믿음으로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때에 그 때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의도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창조 하나님의 백성모음이었단 말이어요. 자 그러면 여기 지금 예수께서 아까 여기까지는 성전을 예수께서 건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께서 성전을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로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성전을 건축한다고 그랬어요. 자기의 메시야적 과업이 성전건축한다고 그랬다고요.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살펴 보니까 하나는 백성의 공동체로 짓는다고 그랬다고요. 그래서 여기서 금장 우리가 아 예수께서는 성전을 하나님의 나라의 성전으로 그리고 이 성전은 곧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지칭했나 보구나 짐작할 수 있어요. 아 다 마쳐야 되는데 여기서 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