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걷는길/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7) - 마13장 31-33 (김세윤 교수)

꿈심는농부 2017. 3. 3. 03:07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1)

 

마13장31-33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오늘 같이 묵상할 말씀은 마 13:31-33절 까지 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마 13:31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두 비유를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분들 하도 오랫만에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어서 이전에 같이 생각했던 것을 다 잊어버렸을까봐 걱정이 되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없고 그래서 한 달 전에 했던 것만 간단히 간추리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던 중이었어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곧 온다. 또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 이렇게 가르쳐 주셨는데 어떻게 오는가를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그 중에 하나 그리스도께서 특히 강조했던 한 한 말을 지난 번에 살펴보았어요.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편에서 초월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온다. 어떻게 오는가? 인간들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바벨탑이라 그러지요.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초월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굉장히 강조했어요. 그 강조한 것이 어떻게 나타난다고 그랬어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같이 쓴 동사들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받고 이렇게 온다. 주신다. 들어간다. 받는다. 주로 이런 동사들을 쓰셨지 인간들이 인간의 힘으로 지혜로 이룬다는 동사는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서 제일 먼저 우리가 강조해야할 것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 그렇게 그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의 힘을 갖기 위해서 초월성과 은혜성이 두 개의 조건부다는 이야기를 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에게 도대체 구원이 있기 위해서는 인간들 밖의 인간들보다 더 큰 신에서 그러니까 완전한 자에게서 무한자에게서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초월에서 와야 하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속에 내재해 있는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는 것 그것은 항상 제한된 것이어서 구원의 힘을 가질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초월에서 은혜로 밖에 올 수 없는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되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온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다시 말하면 여러분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인간들의 모든 인본주의적인 사고 인본주의적인 문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요. 인간들이 항상 자기들의 현재 문제를 깊이 인식하는 가운데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구원을 얻고자 동반하는 두 개의 방편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지혜 지식과 선행이라고 그랬지요. 이것들이 얼핏 보기에는 우리에게 상당히 그럴듯한 면을 가지고 있어요. 지식을 개발해서 우리의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선행을 잘 개발해서 또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인간들이 지식을 개발하고 선행을 개발하면 구원의 상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들은 결국 바벨탑 같은 것이어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번에 했어요. 그래서 구원은 초월에서 은혜로 올 수 밖에 없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점을 굉장히 강조하셨다.

 

오늘 두 번째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두 번째 요점은 방금 요약한 지난 시간에 묵상한 것과 얼핏 보기에는 상반되는 것 같은 그런 것이어요. 그것은 우리의 역사속에서 우리 가운데서 점진적으로 자라고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그런 가르침을 여기서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유대 묵시문학가들은 하나님 나라가 일시에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서 천지개벽과 같은 변혁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으로 그리기도 하고 예수 당시에 열혈당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를 재건하여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온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열혈당은 큰 정치적 사회적 혁명을 동방하고 하나님 나라가 올 것으로 보았어요.

 

우선 로마와 같은 외세의 압제에서 해방이 되고 다윗왕조가 재건이 되고 그래서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정복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법대로의 통치가 펼쳐져서 자유와 정의가 평화가 일어나다. 이렇게 보았어요.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이 문제에 있어서 그런 식으로 별로 가르침이 없어요. 예수의 재림 때에 예수께서 인자로서 하나님의 천사들과 임할 때에 세상에 큰 갱신이 있을 것을 말하기도 하나 예수의 강조점은 지금 여기서 예수를 통해서 오고 구원의 힘을 발휘하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있었는데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큰 천지개벽 같은 변혁을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고 또는 어떤 정치적 사회적 혁명을 이야기한 것도 아니에요. 한쪽에서 지금 A. D. 66년에 드디어 터지는 해방운동 해방전쟁 하나님의 통치의 이름아래 로마에 선전포고할 기세로 열혈당 운동이 지금 가고 있는데 예수의 활동을 한 30년쯤 본다면 여기에 하나님 나라 선포운동과 라이벌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운동이 열혈당 운동이라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통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로마에 대항해 항전해야 할 것을 부르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는 거기에 등을 돌리고 그런 쪽으로 우리에게 해석하게 하는 어떤 사회정치적 경제적 운동의 프로그램도 그런 것은 조금도 제시하지 않았어요. 우리 복음서에 사화경제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서 별로 볼 수 없어요.

 

반면에 우리가 방금 읽은 이런 비유들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냐?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 땅에 심겨져서 점차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많은 새들에게 깃들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또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이냐? 큰 반죽덩이에 가미되는 누룩 같은 것이다. 가루 서말로 만든 반죽에 조금 가미되는 누룩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밀 세 말의 반죽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이다. 두 비유에 하나의 비유를 덧붙이면 스스로 은밀하게 자라는 씨의 비유가 있지요. 스스로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자라는 씨의 비유 막 4: 26-29절 그것도 하나님 나라에서 지금 우리가 본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와 같은 성격의 것이어요. 여기서 세 비유가 같이 가지고 있는 공통성이 무엇입니까? 은밀성이지요. 씨 겨자씨 보일랑 말랑한 씨 은밀성 그 다음에 점진성 점진적으로 자라는 거여요. 또 누룩이 점진적으로 발효해서 누룩덩이 전체를 변화시키죠. 그 다음에 강조되는 것이 무엇이죠? 필연성 . 그러나 겨자씨는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누룩도 필연적으로 온 반죽덩이를 부풀리게 되어 있어요.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도 마찬가지여요. 그 씨가 땅에 심기우면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왜 씨가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땅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아무리 작아서 보일랑 말랑한 미미한 것일망정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라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나라도 그런 것이어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갈릴리 아주 피폐했던 이북의 착취가 심했던 곳에 몇 안 되는 제자들과 여자들을 예수께서 모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운동을 시작했지요. 그러니까 유대 땅 전체의 맥락에서 보나 더 크게는 당시 로마 제국의 맥락에서 보나 더 크게는 세계제국의 맥락에서 보나 진짜 갈릴리의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사람의 하나님 나라운동이라는 것은 진짜 겨자씨만한 것이었지요. 서말의 반죽덩이에 비해서 조그마한 누룩 같은 것이지요.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점차 자라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많은 새들이 깃든다. 많은 새들은 많은 민족들을 표현하는 랍비들의 상징이라고 그러지요. 많은 민족들이 구원의 안식처를 얻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은 복음선포를 통한 선교를 통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선교를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지요. 누룩의 비유는 인간과 사회적인 변화 문화적인 변화를 많이 생각하게 하지요.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렇게 예수와 갈릴리 출신의 몇 사람들에 의해 시작이 되었지만 온 세상의 사상과 인간관계와 가치관과 윤리와 제도와 이런 것들을 완전히 변화시켜요. 그래서 그곳에 구원이 있는 더 많은 자유가 더 많은 정의가 더 많은 평화가 더 많은 풍요로움이 있게 변화시킨다.

 

그러니까 열혈당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인간들이 하나님의 전사들로 스스로 생각하고 무리를 지어서 무기를 들고 로마제국에 대항해서 그리고 로마제국과 결탁한 자들에 대항해서 싸워서 거룩한 전쟁(성전)을 벌여서 다윗왕조를 건설해서 일단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고 노예문서 부채문서를 다 불질러 가지고 사회정의를 확보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법대로 통치함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본 거여요. 이렇게 본 거여요. 그러니까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히 정치적 사회적 혁명적 프로그램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반대로 그런 것은 별로 없고 틀리게 가르쳐요. 첫째로 지난 번에 이야기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초월성을 강조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는 은혜성을 강조했는데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은혜를 강조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그러면 지금 역사 속에서 어떻게 와서 어떻게 실현이 되느냐? 이런 것을 몇 개의 비유들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가 겨자씨 비유나 누룩의 비유나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같이 되기 위해서 요구하는 전제 조건들이 여기 있어요. 이렇게 말해요.

 

일단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과는 전혀 다르게 가르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은 당시 절실한 대안으로 제기 되었던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요. 그렇게 보아야 되어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본 거여요. 예수께서는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지 말라. 그런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 그 대신 하나님나라를 이렇게 생각하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은 첫째로 부정적으로 말하면 당시의 열혈당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 부정적인 비판을 담고 있어요. 긍정적으로 말하면 그러면 예수께서 무엇을 전제로 하고 말하느냐. 그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라.

 

이런 부름을 받아들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뭐라고 그래요?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그래요. 예수의 제자들은 순종을 전제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통치에서 순종하고 사는 것을 전제하고 지금 예수께서 이렇게 말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 죄를 회개하고 사단의 죄악과 죽음으로 다스리는 나라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예수의 부름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말로는 받아들였다고 하고 실제로는 사단의 사주를 받아 사단의 뜻대로 살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면 지금 이야기한 대로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저절로 자란 씨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속에 오고 역사속에서 이루어져 가고 실현되어 가고 그래서 그 속에 이미 들어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을 더 맛보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깃들 곳 안식처를 제공하는 구원을 얻도록 하는 그런 힘을 발휘한다 이 말이어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두 가지다. 막 12:28-34절을 보시겠습니까?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와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묻되 모든 계명들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첫째가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라’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두 마디여요.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둘째는 이웃에 대한 사랑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이어요. 구약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복잡하고 율법이 괜히 복잡해요. 우리 신약성경을 보면 가령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편지에서 이렇게 하라고 권면하는 것도 이러지 말라하고 금하는 것도 굉장히 복잡한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은 자세히 보면 예수가 말씀하신 것처럼 두 마디여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두 마디여요. 두 마디가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적용되도록 다양하게 나타날 따름이지 복잡하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 윤리를 생각한다든지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때에 원리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내가 이것을 해야 되나 안 해야 되나 할 때 원리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꾸 율법적으로 생각을 하니까 복잡해지고 판단을 못하고 그래요. 우리는 구체적인 삶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는 뜻이 무엇이냐? 내가 하나님께 올바로 드려야할 순종이 무엇이냐? 성경에 그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어떤 것은 성경에 명백하게 가르침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삶의 정황에 대해서 성경에서 이때는 이렇게 해야 되고 저 때는 저렇게 해야 되고 가르쳐 주지 않아요.

 

옛날의 랍비들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그랬어요. 예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요. 구체적인 상황속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할 것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인가? 아닌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예수에 대한 사랑인가? 아닌가? 두가 지만 생각하면 되어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우상숭배여요. 예수께서 특히 우상숭배는 뭐여요? 맘몬 우상 돈에 대한 사랑 특히 경계한 우상숭배 맘몬 숭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가장 크게 훼방하는 것이 돈을 사랑함이어요. 우리가 왜 돈을 사랑해요? 돈으로 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는 그것을 갖기 때문이죠. 돈이 우리에게 안전을 주고 행복을 준다는 생각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한 맘몬 우상 돈을 우상으로 섬길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해요. 돈을 더 많이 벌면 할 수 없이 어떻게 되요. 이웃과 착취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어요. 갈등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자유가 없어지고 정의가 없어지고 평화가 없어지죠.

 

그러니까 아까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는데 사실 두 마디가 아니고 한마디여요. 한마디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어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은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그 속게 포함하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 없으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없어요. 나의 행복과 안전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고 내가 전적으로 시인하지 않는 한 내가 내 지혜를 동원하고 내 힘을 동원해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고수할 수단을 얻어야 되요. 어떻게? 이웃에 대해 대항해서 나를 주장하고 착취하고 그것은 무엇의 반대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과 반대말. 그러나 내가 나의 모든 안전과 행복이 나의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초월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준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헌신한다. 하나님이 내가 이웃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해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한다. 이런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면 이웃에 대해서 자연환경에 대해서 너그러울 수 있고 섬길 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두 계명들은 두개가 아니고 하나여요.

 

그런데 그 중에서 우선된 것이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어요. 십계명의 제 2계명.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시대부터 우상숭배를 가장 큰 죄악으로 삼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요. 이 두 가지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두 가지 길을. 열혈당의 길 예수의 길 이 열혈당은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악한자들을 징벌하는 복수전쟁을 통해서 억눌리고 짓밟힌 자들의 한을 푸는 복수전쟁을 통해서 그래서 거기에 좀 더 많은 사회정의를 확보하는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경제적 분배 기구를 만들어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풍요가 확보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렇게 가르쳤죠.

 

오늘날 그런 가르침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가장 체계적으로 가르쳤고 실험했던 것이 공산주의이지요.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세속화된 형태지만 사실 공산주의가 열혈당의 이데올로기를 세속화한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무슨 사회주의적인 정의 사회주의적인 평등을 말했지만 거기에 무슨 정의가 있었고 평등이 있었고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었고 풍요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적으로 힘 있는 놈은 힘없는 놈 억누르고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서 착취의 원칙으로 삶을 꾸려나가면 사회가 더 발달하고 부가 확대 재생산되어서 결국 가난한 자에게도 조금이라도 더 돌아간다. 이런 체제로 산다고 해서 거기에 무슨 구원의 길이 있어요?

 

지금 자본주의 세계에도 내부적 병이 우리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나타나 있어요. 그런 것을 길게 논의할 필요도 없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자본주의적 무슨 정치 사회적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고.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조금 피상적인 기독교인들이 손봉호 장로님이 들었던 예 같은 것을 들면서 아니 손장로님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아 복음을 받아들인 곳에 가보면 적어도 3대 부터는 잘 산다. 또 기독교인들이 많은 곳이 더 경제적으로도 낫다. 그러니까 통계적으로 나타나는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상황인데 그것을 금방 그러니까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을 자본주의를 더 옹호하고 지지하는 그런거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여야 된다. 이런 식으로 논리적 비약을 통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께서는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라든지 사회제도라든지 무슨 정치적인 프로그램. 반면에 사회주의적 시계추가 한동안은 반대로 돌아 가지고 정말 기독교인이면 사회주의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어떻게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착취하는 꼴을 보고 어떻게 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자기 종으로 인권을 무시하고 부리는 일을 할 수 있느냐. 기독교인은 사회주의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이것이 한동안 유행했어요. 지금도 상당히 유행해요.

 

가령 제가 독일에 있을 때 여러분들 독일에 큰 두개의 정당이 무엇입니까? 기민당 이들의 경제정책은 자본주의에 강조점을 두지요. 사민당이 있지요. 이들은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경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요. 두 정당이 서로 다투지요. 그 속에서 이제 많이 토론해요. 누가 더 기독교적이냐? 기독교 민주당 기독교의 이름을 붙인 기민당이 더 기독교적이냐? 기민당은 원래 카톨릭 사회운동에서 시작했어요. 그래서 거기 카톨릭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고 또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요.

 

반면에 이 사민당 속에는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사회주의적인 정열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은 양심이 민감한 기독교인들도 많이 들어가 있어요. 그런데 개신교 기독교인들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이 사민당은. 어느 것이 더 기독교적이냐 하고 다투고 그러는데 그래서 정말 기독교인을 위해서는 정말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려면 사회주의적으로 설명을 해야 하고 사회주의적이어야 한다. 이런 것이 한 때는 구호로 내세워졌는데 사회주의적 정치 경제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않았어요.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실현된다고 보지 않은 거여요.

 

지금 다시 강조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초월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 그런데 지금 또 어떻게 둘째로 오느냐?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은밀하게 점진적으로 필연적으로 역사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어떻게 할 때 그렇게 되느냐?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예수의 부름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으면 그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에 일어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때에 일어난다. 그런데 그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이냐? 두 마디여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모든 우상숭배를 극복하고 하나님에게서만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구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의 뜻에 완전히 합당하게 살려고 하는 태도 그러니까 내가 인간이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 내 인간의 재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 우리 선행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 이런 맘몬인 우상숭배도 아니고 물론 무슨 다른 종교의 숭배대상이라든지 어떤 인간 무슨 카리스마 큰 힘을 가진 무슨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무슨 저기 주체 왕궁의 위대한 수령 김일성이나 무슨 심지어 우리 김영삼 장로 인간에게서 무슨 저기 구원을 얻으려는 이런 태도는 다 버리고 하나님께로서만 우리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 그러기 때문에 그의 뜻에 완전히 순종해서 살려고 하는 헌신 이것 하나. 그런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으로 표현되는데 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 이것을 우리가 확대되면 그 두 가지를 갖고 살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에게 하나님에게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요구하는데 그것에 순종해 살면 우리 주위에 우리가 아무리 미미한 존재일망정 점차 필연적으로 자유가 확보되고 더 많은 정의가 확보되고 더 많은 평화가 확보되고 도 많은 풍요로움이 확보되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역사속에 실현이 된다 이 말이어요. 그 이야기여요.

 

그러면 아까 처음에 지난번에 하나님 나라가 초월에서 은혜로 올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스스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하는데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에 순종하면 은밀하게 무슨 큰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난리 피우지 않고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은밀하게 한꺼번에 하루아침에 온 세상이 뒤바뀌는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그러나 필연적으로 더 많이 자유가 확대되고 더 많이 정의로와 지고 더 많이 평화로와 지고 더 많이 풍요로와 지고 이런 하나님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이 순종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하는 것 .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면 앞에 강조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올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본 우리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과는 모순된 것 같죠? 완전히.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왜? 아까 손장로님도 강조했는데 그래서 오늘 여러가지로 묵상하는 기도들이 잘 통하는데 도대체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이 땅에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와서 할 수 있어요?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하는 것, 아까 린턴은 원수 김일성이도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그래야만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랬는데 진짜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김일성이를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요? 한국전쟁을 일으켜 가지고 수십만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갔고 이 조국을 초토화시켜서 엄청난 고난을 끼친 이 자를 내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어요. 김일성이는 고사하고 나에게 따귀한대 때린 내 옆의 친구 어떻게든지 따귀 한대 때려줘서 따귀 한대 아니고 두 대쯤 때려 가지고 그래야 지금 속이 좀 시원히 한이 좀 풀리겠는데 그 놈의 한이 지금 여기 맺혀 있는데 어떻게 내가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힘 자체가 우리 안에서 나올 수 없는 거여요. 이것을 신학적으로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고 하죠.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한마디로 하면 그 말이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웃을 더 사랑하고 같은 인간에 대한 애틋한 사랑 휴머니즘 인간성을 도야하고 개발하고 이렇게 해서 부를 더 공정하게 배분하고 상대방의 인권을 존중해서 상대방에게도 더 많은 자유의 영역을 확보해 주고 이렇게 해야한다는 말과 지금 예수의 가르침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이 비슷한 것 같지만 완전히 반대여요. 인간의 내재의 선함 선행을 개발하고 재능을 개발해서 이것에 자유롭고 정의롭고 평화롭고 풍요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인본주의적인 사고와 그것은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이 공산주의의 형태로든 자본주의의 형태로든 그렇게 나타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것과 내게 선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고 아무 선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의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조금이라도 의존할려고 하고 내 힘으로 무엇을 할려고 하고 내게 선함을 자랑삼을려고 하고 바울의 말로 말하면 자기 육신을 자랑함. 인간의 우리속에 내재해 있는 힘으로 무엇을 할려고 함. 이것은 완전히 우상숭배여요.

   

이것을 철저히 부수고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어요?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대로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기도하는 것 밖에 없어요. 어떻게? 구체적으로 내가 자꾸 우상숭배에 빠지려고 하는 거여요. 내 재능을 자꾸 믿으려고 하고 나의 선행을 믿으려고 하고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요. 교만해지고 독선해지고 도움을 자꾸 믿으려고 하고 권력을 자꾸 믿으려고 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려고 하고 하나님 나를 이런 우상숭배에서 건져주시고 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하게 내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초월에서 그의 은혜로 내게 믿음이 주어지도록 기도하고 나는 이웃을 사랑할 힘이 전혀 없어요. 그것을 철저히 의식하고 의식한 만큼 하나님 제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기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초월에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곧 헌신의 힘을 믿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서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하나님의 그 구원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이렇게 이루어지는 거여요. 겨자씨같이 누룩같이 그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그 구원의 힘이 나타나고 사회가 변화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오는 거여요.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구원이 나타난다 이 말이어요.

 

이것을 우리는 개인윤리의 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고 사회윤리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고 우리가 우리의 개임적인 삶에서도 그러함 자세로 살아야 되겠지만 이러한 원칙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가 나의 삶의 영역에서 가치관으로 법으로 행동양식으로 문화적인 표현으로 표현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되겠죠. 그래서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각계각층 모든 분야에 들어가서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그러니까 우상숭배에 반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 복수 앙갚음을 해서 정의를 확보하려는 내가 당한 만큼 되갚음으로 해서 발란스를 다시 이루려는 것에 반해서 그런 법칙이 아닌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또는 원수의 사랑의 정신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그렇게 나타나니까 그 가치들과 그 원칙들이 입법하고 정치하고 사법하는 사람들에게는 법제도로 더 많이 나타나게 하고 아직도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은 상황속에서 그것이 완벽히 나타날 수 없지만 최대한도로 많이 나타나도록 노력을 해야할 것이며 아까 린턴이 영화 이야기했습니다만 영화 만드는 사람 소설 만드는 사람 글 쓰는 사람 시 쓰는 사람들은 또 인본주의 우상숭배를 앙양하고 퇴폐 맘몬이즘 우상숭배를 앙양하고 이웃에 대한 복수를 앙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의 정신을 담고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실현시킨가 하는 것을 자꾸 표현하는 것을 해야할 것이고 그림 그리는 사람들 음악 하는 사람들 상거래 하는 사람들의 사업의 장에서도 각자의 장에서 물론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교육하는 사람들은 책임이 크지요. 설교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서 우리가 우상숭배에 반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이웃에 대한 자기주장 또는 원수에 대한 앙갚음에 반한 이웃에 대한 사랑 또는 원수에 대한 사랑의 정신을 실천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그 다스림 하나님의 그 요구에 우리가 순종함으로서 개인윤리측면에서 아까 예를 든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오도록 은밀하지만 점진적으로 필연적으로 확대되어 가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거여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온다고 했어요? 초월에서 은혜로 오는데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하게 하고 우리에게 우리로서는 도저히 갖지 목하는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힘을 주셔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이말이어요. 또 나중에 이 문제를 토론하기로 하고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에 대한 토론을 일단은 이만큼으로 마칠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