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하나님 나라 (1)
마가복음 2:13-17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네 번째 공부로서 지난시간에 우리가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선포하시면서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미래에 종말에 완전히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지만 지금 벌써 예수를 통해서 여기서 실현되고 있음을 선포하시면서 그 구원의 힘을 치유로 시위했다고 그랬어요. 치유로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의 힘을 시위하시면서 바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룬 구원을 가져다준다. 지금 벌써 이런 구원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종말에 그런 구원이 완전히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셨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항상 치유로 뒷받침하고 치유로 시위했다고 그랬지요. 치유가 항상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같이 가야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러 보내면서도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라고 하나님 니라를 선포하고 치유하라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치유는 항상 같이 가요. 하나님 나라 선포는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 구원을 약속하는 것인데 그것을 치유로 시위하고 현실이 되게 하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이 치유활동을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석이라. 그렇게 신학자들이 말한다고 그랬지요. 또는 실제화라. 그렇게 말씀한다고 그랬지요. 또는 손에 쥐어주는 그림이어요. 삽화(illustration).
오늘은 그런데 주로 예수께서는 치유를 안식일에 하셨다. 4복음서들이 똑같이 한꺼번에 증거를 해요. 그런데 경건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은 또 유대신학자들은 서기관들은 안식일 날 병 고치는 것이 아주 못마땅해 가지고 예수를 그 이유로 죽이려 달려들지요.
먼저 예수와 유대 신학자들과 맨 먼저 갈등을 일으키는 issue가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어요. 유대 신학자들의 열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일을 고집하시는지를 오늘 좀 공부하기로 계획을 세웠어요.
우선 예수의 안식일 날 치유활동과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왜 예수는 그 치유가 그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시위라고 그러는데 하나님 나라의 현실화 실제화라고 그랬는데 왜 그것을 특별히 안식일 날 해야 의미가 있다고 보았는지 그것을 오늘 살펴보고 그것을 살펴보다 보면 안식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장 이해하게 되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더 지켜야 되는가 그런 것도 알게 되어서 오늘 그 공부를 할려고 작정을 했는데 자꾸 2시 까지 성경공부가 마쳐야 성가대를 한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안식일 문제를 다룰려면 1시간을 꼬박해야 할 것 같아서 그 중에 짜이면 아주 고약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다음 주로 그 문제를 미루고 오늘은 하나님 나라와 치유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일반적인 서론을 하고 여러분들이 혹 질문할 일이 있으면 질문하면 좋겠어요.
먼저 막 2:17절을 한 번 펴 봅시다. 거기 막 2:13절 부터 17절 까지 한 번 읽어보십시다.
‘막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 지금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 이 경건하고 스스로 율법을 잘 지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그 회개하여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잘 응하지 않아요. 그런데 도리어 죄인들과 세리들은 많이 응한다 이 말이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이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음을 선언하고 그 선언을 하나의 증거로 주기 위해서 그들과 늘 먹고 마시는 잔치를 행했어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늘 잔치의 비유로 많이 설명했다고 그랬지요. 종말에 완성될 그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부요한 잔치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의 그림이라고 그랬지요. 우리 인간의 한계성 결핍성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적인 생명 영생을 얻게 된다. 그것을 주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이 비유를 설명을 했는데 바로 종말에 지금 여기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한 죄인들은 바로 종말에 그 하나님의 부요한 잔치 그 영생의 잔치에 참여할 것을 보증해 주고 그 잔치를 미리 맛보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항상 죄인들과 잔치를 베풀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항상 잔치를 베풀었다고요.
이것이 아주 예수적인 행위이지요. 이것이 아주 예수적인 행위로 되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대적자들이 예수에게 뭐라고 별명을 붙였습니까? 마11장을 제가 읽겠습니다. 11장 18절 부터 읽어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세례요한은 아주 금욕주의자였지요. 먹고 마시는 것을 금하고 사막에서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양식으로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니까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늘 이렇게 잔치를 베풀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창기의 친구로다. 예수의 별명이 3가지여요. 탐식하는 자요. 술 좋아하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께서는 뭐라고 정당화해요? 우리가 아까 읽은 막2:18절 이하에 쭉 정당화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볼 것이 아니고 17절에 예수께서 자기가 온 것은 자기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라.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렇게 표현하지요.
그런데 죄인을 부른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병든 자를 불러 그들을 치유함. 막2:17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이 병과 죄가 동일시 되어 있고 병든 자와 죄인이 동일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어요. 그래서 우리가 2장1-11절 그 이야기를 잘 알지요. 시간이 없으니까 읽지는 않겠습니다. 중풍병자를 그 친구 넷이 들 것에 들어다가 아주 예수 앞에 사람들이 운집해 있음으로 길을 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뚫고 들것을 내리니까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선언합니까? 9절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5절에 저희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선언하는 것이어요. 이 사람은 중풍병자여요. 중풍병자.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께서 네 죄를 용서해 준다. 너는 이제 온전케 되었다.
그러니까 거기 앉아 있는 신학자들이 시비를 걸어요. 하나님만이 창조주로서 최후의 심판관이기 때문에 하나님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데 아! 이 사람이 죄를 용서해 준다고 선언하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대권을 침범하는 자로구나. 이것을 참람죄라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자기가 죄를 용서해줄 권세가 있음을 설명하는데 여기서도 중풍병과 죄가 동일시되어 있고 중풍병 든 자와 죄인이 동일시 될 수 있고 그래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느냐면 시편 103편을 보십시다. 시편103편을 예수께서 즐겨 부르는 18번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 그러느냐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가르침을 공부해 보면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마찬가지 이지만 시편 103편의 사상이 곳곳에 드러나요. 그래서 예수께서 특별히 이 시를 사랑하시고 많이 부른 것을 우리가 확인하게 되요. 시 103편을 보시면 3절 4절 보십시다. ‘저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여러분들 시의 병행 구조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바로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읽고 있는 막 2장의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어요. 중풍병자에게 죄용서를 선언하고 그것에 대해서 여기 시비가 붙자 예수께서 2장 17절에 자기의 오신 목적 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목적은 죄인을 불러 그들의 죄가 용서되는 것으로 할 수 있고 병자들을 불러 그들의 병을 치유한다고 할 수 있고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어요.
가령 이렇게 선포할 때에 죄인들과 세리들이 특별히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세리 하나 있지요. 이 삭개오 이야기. 눅 19장의 삭개오 이야기 알지요. 이 사람에게 삭개오가 예수의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가 그를 알아 보시고 이 삭개오는 사람들 틈에 가지도 못하지요. 세리로서 하도 사람들을 압제하고 못된 짓 하고 아주 죄인으로 유대 공동체 안에서 낙인 찍힌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하지요. 그래서 예수를 좀 보고 도움을 얻을려고 하지만 사람들 틈에 끼지 못해서 혼자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예수께서 은혜로 구원의 손을 내밀지요. 그래서 그를 받아들이고 내가 네 집에 가겠다 하니까 이 사람이 예수의 은혜에 감동이 되어서 여기 뭐라고 말합니까?
완전히 회개하지요. 그래서 구약의 정하는 방식보다 더 많이 보상한다고 보상하겠다고 자기 회개의 열매를 실제로 보여주고 여기 눅 19장 8절을 보십시다. ‘삭개오가 서서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것이 있사오면 4배나 갚겠나이다’ 완전히 회개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가 뭐라고 말합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오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온전케 하는 힘이 이 집에 실현이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의 지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말하지요. 그래서 이 세리들을 죄를 용서해줌은 병을 고침이나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몇 구절들은 여러분들에게 계획에 없었던 공부로서 몇 구절들을 방금 소개한 이유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냐면 치유란 개념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치유란 개념을 많은 사람들은 꼭 육신의 병만을 고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병고를 치유하는 것으로만 보지를 않았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포괄적인 의미로 우리의 실존의 모든 면에서 전체적으로 치유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죄의 용서와 마찬가지여요.
죄라는 것이 우리 모든 문제를 낳잖아요. 죄가 낳는 문제들은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고 갈등관계로도 나타나고 삭개오가 토색하고 억눌러서 남의 재산을 빼앗고 그래서 원수지고 거기에 고난이 있지요. 죄가 그렇게도 나타나고 방탕 아예 자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술 담배 향락으로 소진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죄가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고난들을 주어요. 그 고난들이 전부 죄로 부터 나온 곳이어요. 죄가 모든 고난들의 원천이지요.
그러나 죄와 고난들이 1:1로 성립하지는 않아요. 가령 지금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는다. 그러면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중풍병을 앓는가? 꼭 그런 것은 아니어요. 전에도 제가 예를 들었는데 예수도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 대해서 이 사람이 죄를 지어서 소경이 된 것입니까? 아니면 이 사람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입니까? 그것이 죄와 고난이 1:1로 성립한다는 아주 원시적인 신학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지요. 우리들도 많이 그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아요.
1:1로 성립될 수도 있어요. 전에도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만 제가 술을 많이 마시고 운전하다가 전신주 가로수를 받아가지고 다리가 부러지면 그것이야말로 죄와 고난이 1:1로 성립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20살 먹은 녀석이 술이 취해가지고 내 차를 받아 제 다리가 부러지면 제가 죄를 지어 가지고 다리가 부러진 것이 아니지요. 이웃의 죄로 다만 우리들이 인간들의 공동체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남의 죄가 나에게 고난을 주고 남의 선한 행위가 나에게 유익을 주고 그래요. 그래서 항상 죄라는 것이 1:1로 성립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누구의 죄든 우리가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고난이 있지요. 그런데 그 고난이라는 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나요.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고 심리적인 병으로도 나타나고 관계에서의 고난으로도 나타나고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지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치유하는 것인데 그 치유는 그러기 때문에 죄가 나타나는 다양한 고난들을 다 없애는 것이어요. 꼭 육신의 병고만이 아니고--.
그러니까 치유는 무엇입니까? 죄의 용서로 말미암아 얻는 치유는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를 온전케함이어요. 모든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함. 그것이 치유여요. 그러니까 이 치유가 어떤 때는 육신의 병고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서 그 면에서 우리를 온전케 함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빈곤도 엄연한 고난 아닙니까? 빈곤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심리적인 질병으로 부터 해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부간에 늘 싸우던 갈등관계에서 오는 고난으로 부터 해방되기도 하고 정치적인 자유의 확대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오늘 같으면 환경의 공해의 제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치유는 우리의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면에서의 온존케함으로 나타난다는 말이어요. 그 치유를 이렇게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요. 구원을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 되어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해야 되어요. 하나님 나라의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성령의 역사로 지금 우리 안에 실현이 되었는데 그것은 꼭 육신적인 병고의 제거만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항상 두개의 극단의 오류가 나와요. 하나는 완전히 카리스마틱한 오순절 신학의 오류가 나오는 것이죠. 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치유가 육신적 병고의 제거로만 나타난다고 말하지 않겠지요. 하나님 나라의 치유가 육신적 병고의 치유로 나타난다. 그렇게 하겠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들의 사고는 그것만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 그런 신학을 가진 사람들은 꼭 육신적 병고의 제거라는 것으로만 표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을 체험하려고 거기에 몰두를 해요. 그래서 다른 방면으로의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나타남을 경시해요. 상대적으로 아니면 무시해 버리든지.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문제가 발생해요. 아 믿음이 좋고 하나님께 헌신해야 될 육신적 병고가 안 나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은 그것을 기법을 개발해요. 왜?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육신적 병고의 제거 그쪽만으로 나타난다고 생각을 함으로 어떻게든지 그것을 체험하려고 온갖 기법을 개발하기 시작해요.
그러면 점차 신앙이 미신화 되어 가지요. 우선 여기에 과장된 주장이 많이 발생해요. 그래서 신앙이 점점 미신화 되어가요. 이 하나님 나라의 자유의 힘이 우리 실존의 모든 면에 나타나야 된다는 모든 영역에서 체험할 수 있다는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자적 결정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심리적 갈등의 해소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빈곤의 퇴치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자유의 확대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사회적 평화의 확대 이런 것으로도 나타나기도 하고 이렇게 모든 참된 것 모든 선한 것 모든 아름다운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하나님의 통치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니까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어 우리 삶을 온전케 하는 것은 다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다. 구원의 힘이다. 이렇게 볼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안수하고 기도하고 뭐해서 뭣 나은 것에만 치유의 의미를 부여하니까 이 사람들의 신앙이 많이 균형을 잃고 그것에 몰두하다 보면 과장된 주장을 많이 하게 되고 환상을 많이 일으키게 되고 그래서 신앙이 굉장히 미신화 되어가요. 그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 뭐라고 그랬어요? 이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아까 말한 대로 모든 참된 것 모든 선함 모든 아름다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 하나님의 통치의 열매여요. 구체적인 열매 그러기 때문에 첫째로 치유를 포괄적으로 생각을 해야지. 둘째로 그 치유의 힘이 인간들을 통해서 나타날 수도 있음 보통 그렇게 나타나요. 인간들을 통해 나타나는데 꼭 안수니 기도니 이렇게 만이 아니고 의사를 통해서도 훌륭한 약을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약전문가를 통해서도 훌륭한 영양사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나타나요. 어떤 의사가 암 환자를 잘 수술해서 나았다. 하나님의 나음이지요.
지금 수능 시험이 어려워 가지고 낙담한 친구들이 있어요. 혹시 자살한다고 덤벼드는 친구들도 있을 거여요. 또 요즘 금융실명제로 파산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래요. 일생동안 양심적으로 사업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부도가 나서 감옥에 가고 실망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욱 하는 상황속에서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어요. 죽음 직전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게 아 여기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잘 설교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삶의 용기를 새롭게 하고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을 하게 했으면 그것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치유가 아니어요? 네? 아이 어떤 권사님이 아주 못된 젊은이 하나 못된 길로 빠지는 젊은이 하나를 계속 몇 년 동안 기도하고 사랑을 베풀고 counselling해서 돌이켜 가지고 그 사람이 자기 가족에게 이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게 하면 그것이 치유가 아닙니까? 죽음 가운데 생명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까?
여기 삭개오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많이 끼친 삶이어요. 압제하고 뺏고 강탈하고 도둑질하고 그래서 이 삶이 예수에게 치유함을 받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므로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그를 통해서 남에게 전달되었어요. 이것이 치유하는 것이어요. 온전케 함. 한국의 목사님들은 대대로 독재자들에게 아부를 했는데 아부하지 말고 그 독재자들 앞에 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제대로 선포해 가지고 그 독재자들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통치하도록 했으면 이 나라에 사람 죽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애매한 사람 감옥에 집어넣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회정의가 사회자유가 인권이 평화가 확대되어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구체적인 실현이어요. 그것이 죽은자 가운데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까? 이 기도해서 암환자 나은 것보다 더 큰 생명의 역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첫째로 이 치유를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되고 둘째로 이 치유는 꼭 기도하고 안수해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복음선포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counselling을 통해서 과학을 통해서 예술을 통해서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음악에서 한 사람이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새롭게 치유가 일어나요.
이렇게 이런 전제에서 둘째 오류는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전통 보수 장로교회에서 많이 범하는 오류인데 바로 치유는 육신적인 병고의 제거로만 의미한다는 그런 전제하에서 이 사람들 균형을 잃고 추구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그 사람들 신앙이 자꾸 미신화 되고 과장된 주장을 하고 그래서 신앙이 아주 한 마디로 볼품없다 그 말이어요. 걸레 같아요. 균형을 잃고 미신화 됨.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전통보수 개혁신학하는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느냐면 이런 의미로의 치유는 예수와 사도시대에만 그랬고 이제는 더 이상 없다고 그러는 것이어요. 그것이 유명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아주 유명한 B. B. Warfield가 처음에 제창한 이론인데 그것이 우리 한국의 보수장로교의 일반적인 이론이 된 것이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성령의 역사로 실현이 되는데 더 이상 육신의 치유나 이런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여요. 그것이 틀렸어요. 왜 틀렸느냐면 이 전제가 틀린 것이어요. 치유라는 것은 꼭 육신적 병고의 제거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치유라는 것이 아까 말한 대로 심리적 문제의 해소 관계의 해소문제 빈곤 등 모든 고난으로 부터의 해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육신의 병고도 엄연한 고난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육신의 병고로도 나타나지요. 그런데 이 육신의 병고의 제거가 하나님 나라의 치유의 힘이 아까 이야기한 대로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정신과 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한 편의 아름다운 그림을 통해서도 음악 시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특히 설교를 통해서도 복음선포를 통해서도 나타나지만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도 나타나지요. 그런데 이런 카리스마틱한 사람들의 과장된 주장 헛된 주장에 너무 반발을 해가지고 그런 것은 이제 없다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아요.
B. B. Warfield가 그렇게 이런 것이 없다고 한 이유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오순절 운동이 굉장히 발생하면서 이 분이 조사를 해 보니까 자기가 조사한 모든 case가 거짓 말이었어요. 이 분이 이 이론을 제시한 책 이름이 “거짓말 기적” 이라는 책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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