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걷는길/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1) - 마가복음 1:14-15 (김세윤 교수)

꿈심는농부 2017. 3. 3. 03:00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4-15) 

 

마가는 이 한 마디로 주님의 선포를 요약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여러분과 함께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보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이 가르침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하나의 문제로 부터 시작하면 지금 마가는 예수의 복음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 이렇게 말하죠. 그런데 우리는 잘 아는 바와 같이 요한복음에만 가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가면 그 초대교회의 설교들을 요약한 것이 참 많은데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거의 안 나와요. 바울서신서들을 위시한 신약의 나머지 책들에도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잘 안 나와요.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런데 사도행전에 요약된 설교들을 본다든가 서신서들을 통해서 사도들이 하는 설교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되어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그래요.

 

대표적으로 전에도 우리가 보았습니다만 고전 15:3절 기억나십니까? 거기 좀 자세히 공부한 바 있는데 고전 15장 1절 부터 읽어 보시죠.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쓴 것을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복음은 사도인 내가 바울이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로 부터 받아서 너희들에게 제일로 먼저 우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전달했다. 그 내용은 4개의 절로 되어 있다고 그랬죠. 지난 번에 첫째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 둘째 장사 그러니까 묻혔다는 것. 장사되었다는 것. 세째 성경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다시 살아 나사 뜻은 비슷할지 몰라도 번역이 좀 좋지 않아요. 사흘 만에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켜졌다는 것 또는 부활되어졌다는 것. 네째 게바에게 보였다는 것 나타났다는 것. 이 4문장들로 복음을 설명하는데 지난 번에 본 바와 같이 두 번째 문장 ‘장사되었다는 것’은 그 앞에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요 네 번째 절 ‘게바에게 보였다는 것’은 또 바로 그 앞에 가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켰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복음을 정확히 말하면 이 3절과 이 4절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우리 죄를 위한 죽음과 부활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고 이제는 이 11절에 봅시다. 11절에 그러므로 나나 저희들이나 ‘저희들’은 예루살렘 사도들‘ 다른 사도들이나 다 함께 이와 같이 복음을 선포하매 너희들도 이와 같이 믿었느니라. 여기 지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게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선포하는 복음이고 이것이 모든 교회가 공통적으로 믿는 복음이고 이 복음을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 지금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금방 의문이 하나 생겨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어요.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선포했어요. 자! 어떻게 사도들이 주로 예수의 제자들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해서 다 예수와 똑같은 복음을 선포하지 않고 하여간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복음을 선포하게 되었는가 그런 문제가 금방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이렇게 질문을 해 보아야겠어요. 이게 서로 다른 복음인가? 아마 다른 복음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왜 언어를 달리하죠? 아 좀 다르니까 언어를 달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 두 복음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이것이 사도들의 복음이 어떻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서 나오게 되었는가? 기원하게 되었는가? 이런 것을 우리가 살펴 보아야죠. 이런 것은 순전히 역사적인 호기심이 아니고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어요. 우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몇 시간 공부할려고 하는 것은 이 문제를 이 문제를 해결할려고도 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이 기독교 복음을 좀 정확히 깊이 깨닫고자 하는 것이어요. 이것을 정확히 깨달음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신안생활의 의미도 정확히 알 뿐아니라 우리의 그 믿은 바 신앙과 우리의 삶을 제대로 연결시킬 수가 있어요. 우리는 올바른 기독교적 세계관과 가치관, 역사관, 인생관을 갖게 되고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삶 우리의 일 우리의 활동 우리의 직업과도 올바로 연결시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가치관 그리고 올바른 윤리 올바른 태도 이런 것들을 확정하게 되어요. 그래서 앞으로 몇 시간 우리 신약성경에서 우리 기독교 복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하려고 해요. 단편적으로는 여러분들과 같이 제가 공부하면서 여러 번 많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듣다보면 아! 전에 조금 들었던 이야기이다 하는 감을 느끼는 것도 가끔 있을거여요.

 

전에 제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치’라는 젝목으로 한 동안 강의하던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일부 중복되는 부분도 있을텐데 이번에 두 가지 단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전달했었던 것을 한꺼번에 종합적으로 체계적으로 같이 생각함으로서 여러분들의 기독교 복음을 좀 깊이 그리고 포괄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해요. 그렇게 해서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삶의 일치 이런 것을 도모하고자 해요. 신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불행히 신학을 꽤 오래 한 사람도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이해가 없어지고 아주 혼동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복음이라는 말을 수 없이 쓰지만 복음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말을 잘 못한다든가 예수의 중심 가르침이 하나님 나라인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설명해 보세요 하면 잘 모릅니다. 잘 모른다든가 이런 현상이 참 많이 발생해요. 그래가지고 신앙과 사고 그리고 삶, 기독교적 삶의 일관성과 성숙을 도모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음을 보는데 조금 그런 문제에 있어 도음이 되고자 앞으로 몇 시간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서 부터 출발하여 가지고 이 복음이 어떻게 거기서 발생하였으며 이 복음이 무슨 의미인가 그런 것을 생각해 보고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가 신관 신론에 이 복음이 내포하는 신관만이 정말 우리에게 구원하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고 다른 종교들의 신관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들과 기독교의 관계들도 설명을 할 것이며 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도 연결시켜서 좀 설명을 할려고 그래요.

 

우선 여기 마가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해요. 마가복음을 위시해서 마태 누가는 예수께서 그럼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어떻게 선포했는가를 쭉 기술을 해요. 그래서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행적을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할 수 있죠. 그래서 앞으로 몇 시간 예수께서 과연 하나님 나라를 무엇이라고 선포하고 예수의 여러가지 행적 대표적으로 선포하시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 그리고 죄인들과 먹고 마신 이것들이 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런 것을 우리가 공부하겠어요.

 

우선 이 배경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배경을 좀 생각해 보겠어요. 이 하나님 나라 또는 마가 누가에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하늘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칭하기를 꺼려했지요. 그래서 하나님 이름 대신에 대신이름 대칭을 많이 발전시켰지요. 그래서 ‘전능하신 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이스라엘과 함께 임재하시는 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이’ ‘영원히 복 받으실 이’ 뭐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이름이 많아요. 그 중에 하나가 하늘이지요. 하나님 이름 대신에 하늘이죠. 그래서 마태복음이 그 유대적인 성격 역시 유대인들을 위해서 그들을 주로 대상으로 쓰여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선포될 이 복음임을 우리로 하여금 금방 알게 해줘요. 그러나 하여간 같은 뜻이라는 것.

 

그런데 구약성경과 우리 신약이전의 유대문서에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의 하나‘ 이런 문구가 잘 안 나와요. 거의 없어요. 구약성경에도 거의 없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중심사상이 ‘하나님이 왕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그러므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시리신다. ’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런 말은 참 많이 나올 뿐아니라 구약성경의 중심사상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왕이시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려야 의가 있고 이 평화가 있음. 평화 샬롬! 화평 구원이 있다. 그런데 이 왕이란 말과 다스린다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같은 단어로 써요. כלמ 은 어떻게 모음을 붙이냐에 따라 왕이라는 명사가 되기도 하고 다스린다는 동사가 되기도 해요. 그런데 이 말이 참 많이 나타나요. 그런데도 막상 하나님의 나라 또는 여호와의 나라 하늘의 나라 이런 우리 복음서에 나오는 이런 고정된 문형은 안 나온다. 여기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고정된 문형으로 쓰게 된 데는 상당히 새로운 시각적 시도를 했다. 그렇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는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을 계속 이어받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구약과 유대교의 어떤 배경을 내용적으로 이어받았나? 첫째로 창조사상 둘째로 타락사상 세째로 언약사상 네째로 종말론 종말사상. 이 구약과 유대교의 여기서 구약과 유대교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구약이후 신약이전에 그리고 신약시대의. 구약과 신약시대의 중간기를 중간사라고 그래요. 중간기라고 하고 그 기간에 유대문서들에 나타난 유대교의 이 신앙을 보통 우리가 유대교라고 그래요. 이들은 구약을 이어받았죠. 이것은 신약으로 이어져요. 그러니까 사도들이나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이 가르침이 구약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어가면서 동시에 새로움을 새로움 해석을 또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것인가. 이렇게 늘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이 점에 있어서도 이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도 우선 내용적으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는 구약과 유대교에 이와 같이 근본 사상을 이어 가는 거여요.

 

그러니까 이 창조사상은 우리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그 말도 하늘과 땅이란 말도 히브리 사람들은 우주전체를 말했어요. 우주란 말이 없었어요. 히브리어로 원래 세상이라는 말이 없었어요. 원래 나중에 올람 이라는 말은 원래 ‘세대’ 시간적인 개념으로 세대라는 말이었는데 나중에 장소적인 뉘앙스를 가진 ‘세상’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는 했으나 이것은 나중에 생긴 것이고 원래는 이 우주라는 말 헬라어 코스모스에 해당되는 우주전체를 통칭하는 히브리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우주를 하늘과 땅 이렇게 말했어요. 우주를 하늘과 땅 이렇게 말하면서 어떤 사상을 넣었느냐 하면 우주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늘과 땅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하늘은 하나님께서 거처하는 곳이고 땅은 인간들이 거처하는 곳이어요. 여기서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시고 마땅히 하늘과 땅의 왕이 되시죠.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니까 하늘과 땅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요. 하나님이 왕이시고 하나님이 주이시지요.

 

그런데 보통 하나님이 하늘에 계셔요. 그래서 땅위에 자기 대리자를 하나 세웠어요. 그것이 인간이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을 대신해서 땅을 통치하는 대리자로 세운 것이어요. 그게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었다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뜻이어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굉장히 함축의미가 많은데 가장 기본적인 뜻이 하나님의 대리자라 그 말이어요. 하나님 대신 땅위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자라 그 뜻이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말이! 이 놀라운 선언 창세기 1:26-28절의 놀라운 선언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기형상으로 지었다는 놀라운 선언은 우리 창세기 내에서 부터 벌써 하나의 인권선언으로 받아들여져요. 그래서 가인과 그 후예들이 인간을 죽였을 때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죄로 간주된다고요.

 

그래서 유대교에서 기독교에서 그러니까 유대 기독교 문명에서는 살인이라는 것이 단순한 인간 끼리 저지르는 죄가 아니고 하나님께 저지르는 죄다. 왜?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하는 것이니까!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형상으로 지었다는 선언이 이 유대 기독교 문명에 인권사상에 가장 근본이어요. 또 이 놀라운 선언은 물론 인간성의 높음 고양된 위치를 천명한 것 같으니까 옛 유대학자들로 부터 랍비들로 부터 우리 고대 기독교 신학자들로 부터 해서 지금까지 엄청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어요. 인간의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이냐? 그래서 온갖 이론들이 있죠. 한동안은 인간을 여러 분석적인 방법으로 인간을 생각할 때는 인간은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이해하는 힘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관계론적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과 관계될 수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말과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말하는 능력과 관계있다. 뭐 이런 식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인간내의 어떤 일부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실존의 모습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어요. 무엇까지 포함해서? 외모까지들도 포함해서요.

 

왜 그런 깨달음을 우리가 갖게 되는냐면 여러분 구약을 자세히 읽어 보세요.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술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대표적으로 이사야 6장 에스겔서 6장 같은 데에는 하나님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나죠? 다니엘 7장도 마찬가지여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지요. 그래서 하나님과 스스로를 계시하는 하나님과 이 사람과 이 외모 형상에서도 유사한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는 외모는 등한시하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엇만은 아니고 외모까지를 포함한 인간의 실존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가장 기본 뜻은 하나님의 대리자라 그 말이어요.

 

하나님께서 땅위를 통치하시는데 보통 하늘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땅에 자기의 형상을 세워가지고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지어서 그 형상을 세워 가지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권을 행사하게 했다. 그 말이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도록 세워진 자니까 그가 어떻게 해야 되어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하나님의 대리자 노릇을 하지요. 그러는 한 아담은 땅위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자로서 땅위에서 제일로 높은 자죠.

 

옛날에 영국의 총독을 부왕이라고 불렀지요. 빅토리아 여왕의 대행자라 대표라 해서 부왕이라고 그랬지요. 그가 총독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때나 자기에게 부왕노릇 하도록 권세를 위임한 빅토리아 여왕의 뜻을 충실히 받드는 한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왕권을 무시해 버리고 자기가 스스로 왕이라 하면 그 순간에 자기는 부왕의 위치를 잃지요.

 

바로 타락이 그런 것이어요. 아담이 땅위에 하나님의 부왕으로 세움을 받았는데 아담이 어떻게 되었어요? 이 사단의 속임수에 빠졌지요. 사단은 우리를 속이는 자여요. 뭐라고 속였지요? 네가 하나님 밑에서 부왕 노릇하는 것 그런 것을 하지 말고 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이 과일을 먹으면 네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나님에 의존하고 순종함이 없이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하는 자가 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말을 아담이 들어서 그러니까 아담이 어떻게 되는 셈이어요?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해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라는 사단의 말에 순종하는 셈이 되지요. 이렇게 해서 아담이 사단의 권세아래 떨어져 버렸어요. 아담이 땅위에서 제일 높은 자였는데 어떻게 해서 제일로 높은 자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있는 한 제일로 높은 자였어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도리어 사단의 말을 들음으로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사단의 말을 듣는 사단에 순종하는 사단의 권세 아래로 스스로를 넘겨 버린 것이죠. 팔아버린 것이지요. 그것을 타락이라고 그럽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이냐? 그 결과는 그러니까 아담이 더 이상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 하나님이 되고자 함 그러니까 과거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존해서 사는 자였는데 이젠 그 창조주 하나님 무한한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 필요 없음.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하나님임 자기 자신이 하나님 노릇해 주심.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하나님 노릇하는 상태에 떨어진 것이지요. 제가 여러 번 설명을 했습니다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내재의 자원속에 움추러든 셈이다 이 말이어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제한된 자원 속에 움추러 든 셈이어요. 그것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공부하겠지만 주로 무엇으로 선포했어요? 비유들로 선포했지요. 그 중에 아름다운 비유 하나가 무엇인가요? 탕자의 비유. 이 아담의 타락을 그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설명을 해요?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내 분깃을 주세요. 그 분깃을 가지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멀리 간다. 그것으로 예수는 무엇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아담의 타락을 설명하는 것이어요.

 

아담의 타락이란 아담 후에 우리 모두 운명이 그때 결정이 된 것이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의 현재 상태를 그렇게 설명하는 거여요. 아담의 타락이라고 우리의 제한된 분깃 재산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의미와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착각을 해요. 자기의 자원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 자기에게 스스로 하나님 노릇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 노릇 그래서 그 아들이 아버지로 부터 분깃을 받아 가지고 자기 것을 받아 가지고 멀리--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조그마한 자원을 금방 무엇을 느껴요? 우리가 결핍성을 느낀다고 그랬지요. 이 부분을 내가 여러 번 설명을 했어요.

 

여러분들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하겠어서 다시 합니다만 ‘결핍성’의 우리의 지혜가 부족함,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름, 지혜가 부족함, 힘이 부족함, 무슨 문제가 발생해도 속수 무책, 우리가 시간적으로 제한된 존재여요. 그래서 우리 교회 연로하신 장로님들 권사님들 120세 까지 살기를 제가 간절히 바랍니다만 120년이라는 것이 뭡니까? 그까짓 것 지금 60세 사신 분들 깜빡할 사이에 60년 되어 버렸잖아요. 엊그제 저기 제기차기 하고 뛰놀던 때가 엊그제인데 벌써 60세되어 버렸어요. 앞으로 더 짧게 살면 120세일텐데 잠깐 사는데 그 잠깐 사는 동안에 늙고 병들고 쇠약해지고 시간 속에 살기 때문에 영원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장소적인 제약 우리에게 얼마나 압박하는 힘으로 우리에게 와요. 그런 결핍성 우리의 결핍성 여기서 뭐가 옵니까? 모든 고난들이 오죠. 아까 제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함.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무엇을 표현했다구요? 아담이 타락함으로 6가지를 잃어 버렸다. 6가지 잃어버린 것 뭐라고 그랬죠? 처음에 얼굴의 광채를 잃어버렸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반영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어서 그의 얼굴의 광채가 전부 다 빛났는데 아담이 범죄한 후에 그냥 시커먼 추남이 되어 버렸다 이거예요. 그 다음 두 번째 아담이 잃어버린 것이 뭐라고요? 아담이 키가 줄어들었다는 거예요. 랍비들의 신학에 의하면 아담의 키가 원래 장대한 자였는데 범죄하고 타락한 뒤에 키가 165센치로 줄어 드러 버렸어요. 무슨 말이라고 그랬죠? 무능한 자가 되어 버렸다는 말이어요. 그 다음 세번째는 하늘의 광채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캄캄한 암흑과 혼돈 속에 살게 되었다. 네째 다섯째 땅의 열매와 나무의 열매를 잃어 버렸다. 그래서 나무의 열매 가령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포도 한 송이가 장정이 여나므명이 들어도 못 들정도로 컸는데 범죄한 후에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포도가 이주 작아졌어요. 아담이 농사를 하고 땅을 파고 땀을 흘리고 열심히 죽어라고 일해도 항상 기아선상에서 허덕이죠. 먹고 사뚱 말뚱 삶과 죽음의 선에서 허덕이는 존재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영생을 잃어 버렸다는 것죠.

 

그렇게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그게 한 마디로 말하면 이 말이죠. 아담이 아까 예수의 멋진 비유 탕자 비유 자기 분깃 속에서 무한한 하나님으로 부터 삶과 자기 안전과 행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받는 조그마한 분 깃 재산 자기 속에 내재해 있는 재산으로 어떻게 해보면 자기 삶과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과대 망상증에 빠진 것이지요. 자기의 인간성 자기의 피조물성 이런 것들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망각하고 부인하고 자기 자신 자기를 믿음 만용 자만에 빠짐 내 속게 있는 재산으로 충분히 내 삶의 의미와 안전과 행복을 도모할 수 있다. 탕자같이 내가 가진 내 속에 내게 속한 상속 50억 이것으로 내가 충분히 멋지게 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독립하는 거죠. 그래서 이 타락이 어떻게 일어났다고 그래요. 신학에서는 자만 교만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바울은 이를 뭐라 합니까?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3번이나 되풀이 해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당연히 알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자기 생명을 지탱하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은혜로 옵니다 하고 인정하는게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이죠. 그런데 인간이 어쨌다고요?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자기에게 속한 것이 당연히 자기 것이고 그것으로 자기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대항함으로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뭐라고 세 번씩이나 되풀이 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 둔다고 인간을 그렇게 살려는 태도에 방치해 버렸다. 예수의 탕자의 비유에 다시 전환해서 말하면 이 탕자가 내 분깃을 주세요. 나 멀리 가서 내 멋대로 아주 잘 살겠습니다. 할 때 아버지가 할 수 없이 놔 두었다. 요새 우리 아이들 쓰는 말로는 아! 그래 잘해 봐라 하고 그냥 보냈다 그 말이어요. 그래서 인간들의 결핍성 속에 제한성이 빠졌는데 그 제한성에서 모든 고난들이 온다.

 

이 고난들은 제가 여러 번 말씀했죠?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그랬죠. 우리가 우리의 삶의 근원인 창조주로 부터 분리되었으니까 그림으로 말합시다. 생명줄이 끊어져 버렸으니 죽음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아담의 타락으로 죽음에 떨어졌어요. 그래서 인간이 죽은 것이다. 그 죽음이 이렇게 고난들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표현된다. 이것을 환절기라 감기 많이 걸리죠? 검기 걸리면 증상들이 나타나죠? 감기 걸리면 콧물이 나고 머리가 아프고 삭신이 쑤시고 감기 걸렸다고 그러죠? 우리 모든 고난들이 이것이 고난이 어떤 종류이든 육신의 질병이든 경제적 빈곤이든 부부간의 갈등이든 사회적 정치적 압박이든 심리적 어려움이든 외로움이든 상상할 수 없는 모든 고난 이것이 모두 이 죽음의 구체적인 증상들이어요. 이제 우리가 죽음병에 걸린 거여요. 그 죽음병이 뭐 어떻게 증상을 나타내요? 외롭고 이렇게 가을에 외롭고 허무하고 인생무상을 느끼고 앞의 소망 없이 그러다가 몸까지 아파 사업은 잘 안 돼. 이 아들놈이 대학입시에 합격할지 못할지 통 이런 게 다 뭐여요? 죽음의 증상들이어요. 이런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이 말이어요. 이것도 바울의 언어로 말하면 사단이 어쩐다고 그랬어요? 우리의 육신을 신봉한다고 그랬지요. 육신을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함으로서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망각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려는 존재로서 인간을 육신이라고 그랬지요. 사단이 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 네 뜻대로 살아라. 네가 행복하고 안전하다. 자꾸 충동질 해요. 네가 네 하나님이다. 자꾸 충동하는 거요. 그래서 육신이 사단의 충동을 받아서 무엇을 해요? 죄를 짓죠. 죄를 지으면 사단이 우리에게 무엇으로 품삯을 준다고 했죠? 죽음으로.

 

이것이 로마서 6:23절 ‘죄의 품삯은 사망이라. 죽음이라’ 사단이 우리 육신을 자꾸 충동해서 자기 말을 듣게 만들어요. 사단이 아담을 총동해서 네가 스스로 하나님과 같다. 그래서 아담이 사단의 말을 들었을때 어떻게 되죠? 어느 상태에 빠진 거죠? 죽음의 상태에 떨어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죽음의 상태에 떨어졌다. 창조주로 부터 분리되어 죽음의 상태로 떨어졌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인간이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진짜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찬탈자 거짓왕 속임수로 우리에게 우리의 왕이 되어버린 사단의 통치 아래로 떨어져 버린 거죠. 사단의 나라에 떨어져 버린 거죠.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을 시작하시는 거죠. 그 구원하는 일을 언약의 역사라 그래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해서 그 후손 그러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 삼아가지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언약이죠. 언약이란 말이 애매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죠. 아담과 그 후손들은 전부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내 스스로의 자원으로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하면서 내가 내 스스로 문제 해결해 가면서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하면서 살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러면 죽음이다. 그러면 우리가 역설적으로 사단의 나라에 떨어진 것이고 이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관계를 뒤집어야 되는데 그 방법이 이스라엘을 택해 가지고 아담같이 사는 게 아니고 사단의 통치 아래서 그 속임수에 빠져 가지고 네 스스로 하나님 노릇해 준다. 그렇게 살지 말고 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대해서 살라. 내가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 하나님 노릇해준다는 말은 그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무한한 자가 이스라엘을 복주시고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이렇게 하나님 노릇해 주는 것이죠. 그것을 하겠다고 약속함이어요. 그 약속은 언약은 무엇을 위해서 창 12장부터 계속 나오지만 무엇을 위해서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온 인류를 사단이 통치에서 회복해서 신학적인 언어로 말하면 구속해서 구출하고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가지고 하나님이 다시 한번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 그들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해서 살 수 있도록 죽음에서 건져 주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런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는 거죠. 그것이 언약이죠.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왕권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두 개의 동심원으로 그릴 수 있는 거죠. 이 세상 땅 세상 땅 전체가 하나님이 지으셨으니까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죠. 야훼의 창조주가 온 세상을 통치하죠.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하죠. 이 세상이 스스로를 사단에게 팔아버림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는 사단의 통치여요.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죠.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이니까 하나님이 합법적인 통치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법적으로 세상의 통치자요 그러나 세상이 세상이라 함은 인간에 의해서 주도되는 세상이요 아담에 의해 주도되는 세상이 스스로를 사단에게 팔아넘겨 가지고 하나님의 통치 안 받고 사단의 통치 받겠다고 함으로 실제적으로는 사단의 통치임.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음. 요한복음 3:16절 복음 기쁜 소식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가령 예수의 탕자의 비유를 다시 말합시다. 아담은 인류는 하나님의 아버지 노릇해주심을 거부하고 자기 멋대로 살겠다고 자기 분깃을 도둑질하다시피 해 가지고 멀리 가 버렸으나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포가하지 않았어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래서 계속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구원의 역사를 해요. 그 방법은 어떻게 하느냐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아서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려하심. 이스라엘의 그런데 이스라엘은 특별히 하나님의 통치 그런데 문제는 이 이스라엘도 자꾸 사단의 사주를 받아요. 그래서 하나님께 거역하고 그래서 세상도 하나님과 사단의 주권의 각축장이 되듯이 이스라엘도 그래요. 이스라엘도 하나님과 사단의 각축장이어요. 다만 세상과 이스라엘이 다른 것은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사단에 빠져 있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아요. 하나님과 관계가 더 돈독하다고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여요. 한 마디로 자꾸 하나님 대신 사단을 쫓는 그래서 아담의 죄를 자꾸 되풀이 하는 그런 역사죠. 그러나 하여간 이스라엘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치하며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려고 한다.

 

이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들이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들이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시다. 하나님이 아비가 되시고 이스라엘이 그 아들이다. 출 4:22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또는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이스라엘이 그 돌보는 양떼라. 하나님이 신랑이시고 이스라엘은 신부다.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 또는 농부이시고 이스라엘은 포도원이라. 하나님 포도원 주인 또는 농부가 잘 가꾸는 포도원이라. 하나님이 전쟁의 사령관이고 이스라엘이 그 징집된 병사들이다. 그 사단의 주권에 대한 성전을 하는 병사들이다. 이런 관계론적인 그림들이 전부 무엇을 나타내느냐 하면 하나님이 왕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시다. 하나님이 아비이시고 이스라엘이 그의 아들이시다. 아들이다고 할 때는 가장 기본의미가 뭐라고 그랬어요. 상속자라고 한다고 그랬어요. 아들이라는 그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상속자라고 했죠.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주심.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해주심에 의존해서 살 수 있는 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든 무한한 창조주의 그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도록 되어 있는 자라. 그 말은 좀 목자 양의 그림 여기 지금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린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무엇이 있어요. 구원이 있어요. 하나님의 왕 노릇 해주심에 의존할 때 자! 히브리 말로 구원을 뭐라고 그러죠. 구원을 나타내는 가장 좋은 말이 מ?�שׁ ! 우리 삶 전체를 온전케 함 그러니까 평화라고 할 때는 헬라어로도 그렇고 우리 말로도 그렇고 전쟁이 없는 상태 이런 소극적인 개념으로가 아니고 우리 삶 전체가 온전해 짐 그러니까 죽음의 그림자가 전혀 없는 죽음의 증상들이 전혀 없는 어느 면에서나 고난이 전혀 없는 상태 그게 샬롬이어요. 샬롬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그러니까 시편에 보면 야훼가 높이 등극하여서 세상을 다시리는 곳에 뭐가 있다고요? 의가 있고 샬롬이 있어요. 그런데도 불행히도 사단이 다스려서 불의가 있고 죽음이 있어요. 그러니까 사단은 죄와 죽음으로 통치해요. 우리로 죄짓게 하고 죄지으면 죽음으로 품삯을 해요.

 

하나님은 의와 생명으로 다스린다. 이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고 하나님께서 다스린다. 이 사상이 구약의 언약사상에 가장 중요한 표현 방법 중의 하나로서 구약의 중심사상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 야훼의 나라라는 말은 드물게 나와요. 이런 말은 드물게 나와요. 예수께서 구약과 유대교의 이 사상들은 내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것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장 잘 쓰이지 않는 고정된 개념으로 함축시켜 가지고 표현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전승사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한층 더 높게 표현했다 그것이죠. 자 이 종말론 금방 끝납니다. 여러분들 종말론 마지막으로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떤 역사라고요? 한마디로 실패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왕 노릇하시기 위해서 왕 노릇하시는데 하나님께서 또 대리자로 세웠어요. 그게 다윗왕조에요. 다윗자손의 왕 그래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게 했는데 그게 나단의 신탁이라고 제가 소개했죠.

 

삼하 7:12-14절 나단의 신탁에 하나님께서 다윗왕조를 세우면서 다윗과 그 후손을 자기 아들로 세운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통치를 대행하게 한다. 그렇게 했죠.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을 종점으로 해서 다윗왕조가 기울죠. 어떻게 기울어요. 열왕기 역대기는 계속 무엇이 나오죠. 다윗의 후손들이 계속 하나님의 아들 노릇하는데 실패한단 말이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바알을 숭배하고 무슨 몰록을 숭배하고 그런 짓을 해가지고 하나님의 대행자 노릇에 실패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실현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샬롬이 안 일어나지 그 대신 뭐가 일어나요. 고난이 일어나죠.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가 계속 고난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다윗왕조 세우는 약속 이것을 뭐라고 했죠. 나단의 신탁이라고 했죠.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나단에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라. 이것이 점점 종말론적으로 해석이 되어요. 종말에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이 패역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심판하고 사단의 권세를 꺽고 그의 의의 통치를 확립하고 그래서 온 세상이 샬롬이 일어난다는 종말에 대한 소망이 발달하고 그 소망이 일부 어떻게 변동이 됐냐면 나단의 신탁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진짜 자기 아들 진짜 다윗 같은 메시야를 보내서 그의 의의 통치를 정말 대행하게 했어요.

 

이스라엘의 유대 왕 다윗의 그 자손들은 다 실패했는데 종말에는 진짜 하나님께서 다윗이 어떤 사람이어요.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썩 든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다윗보다 하나님 마음에 썩들 다윗의 아들을 세워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일어나게 하고 그래서 샬롬이 일어나게 한다. 이것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이어요. 구약에서 부터 나오는 메시야 사상이어요. 그래서 구약의 유대교의 종말론이 크게 말하면 두 종류여요. 정말로 복잡했어요. 아주 단순화해서 크게 말하면 두 종류 종말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세상과 이스라엘 내에 있는 사단의 통치를 꺽고 이 세상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 사단에 대한 순종을 심판하고 의의 통치를 이루어서 온 세상이 샬롬을 이룬다. 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그의 메시야를 보내서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를 보내서 그를 통해서 사단의 통치 사단의 나라를 꺽고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게 한다. 이것이 종말론이다.

 

그것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이 있었어요. 유대교에 그래서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이 드렸던 기도 기도문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 이 카도쉬라는 기도가 있었어요. 이 기도에 무슨 말이 나오느냐 하면 야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당대에 빨리 그의 통치를 세우시길 빨리 사단의 통치를 종결지우고 여호와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길 이런 context에서 여호와 그의 통치 그의 나라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쓰이기 시작했어요. 이런 종말론적인 소망과 관계해서 아까 하나님 나라라는 말이 구약에는 안 나오고 유대교에도 드물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최근에 발견된 쿰란 문서 일부에 종말에 대한 소망과 관계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길 바라는 그의 통치 그의 나라 통치라는 말과 나라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תכלמ 라는 말이어요. 이 말이 몇 문서들에서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기도가 얼마나 간절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모든 가문들의 당대에 그러니까 지금 당장 그 말이죠. 그의 통치를 세우신다. 그래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빨리 몰아내고 하나님께서 의의 통치를 세우시길 이런 간절한 소망이 있어서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께서 여기 뭐라고 했어요.

 

막 1:14-15 때가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로 작정한 예정한 그의 때가 찼다. 그의 때가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다. 이게 뭐여요. 기쁜소식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사단의 통치와 죄와 죽음의 통치 아래 허덕이면서 하루 빨리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를 세우시옵소서 죄와 죽음의 사단의 통치를 몰아내고 의와 샬롬이 통치 생명의 통치를 세우시길 간절히 기도하는 유대인들에게 이 카도쉬 기도에서 하는 바와 같이 기도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지금 뭐라고 선포하는 거여요. 너희들이 바라고 바라던 그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가 당도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 아주 기쁜소식 아닙니까? 이게 복음이란 말이어요. 복음

 

자 이 다음 시간에 부터 이 내용을 예수께서 어떻게 설명을 했는가. 이 복음내용을 어떻게 설명했는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모 저모를 조금 시간을 두고 살펴 보겠습니다. 제가 금방 끝낸다고 약속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