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하나님의 나라 (2) : 안식일
오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두 번째로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치유활동의 관계를 계속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 구원의 복음을 치유하심으로 구원의 실제가 되게 했다. 그때 우리는 치유라는 것을 아주 폭 넓게 생각을 해서 모든 면에서 우리 삶을 온전케 함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인데 그것이 먼 훗날 우리 영혼이 천국에 간다는 그런 것만이 아니고 지금 여기서 벌써 우리에게 구원의 힘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구원의 힘이 어떻게 나타나냐면 치유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 치유라는 것이 육신의 병고의 치유로도 나타나고 절망 가운데서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새로운 용기를 얻도록 하는데도 나타나고 늘 갈등 속에 있는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올발라짐으로 해서 이웃과 더 평화가 있고 자유가 있게 하는 면으로도 나타나고 정치적 압박, 경제적 빈곤 이런 것의 제거로도 나타나고 하여간 모든 점에서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그런 말씀을 지난 번에 드렸죠. 그 점을 예수께서 특별히 효과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주로 안식일 날 병자들을 많이 고쳤어요.
그래서 오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의미를 주로 생각해 보려고 그래요. 우리가 4복음서 들을 다 읽어보면 공통되게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많이 고치시죠 바로 그런 이유로 아주 초기부터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사역의 초기부터 유대 신학자들의 시비를 받아요. 큰 적대감을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안식일 날 병자들을 치유해요. 왜 그러느냐?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식일이 무엇인가 부터 생각을 하게해요.
안식일은 원래 창2장에 무슨 날입니까?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이 심히 좋은 상태였죠. 그러니까 창조를 완성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창조가 완전케 되었을 때 다시 말하면 심히 좋은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할일 하셨으니까 안식하셨다는 거죠. 원래 안식일은 완성된 완전한 창조를 즐김이에요. 그게 안식일의 뜻이어요 원래.
그래서 가령 십계명을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우리가 한 번 출애굽기 20장 볼까요? 십계명을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쉬라고 하는 제4계명을 주신 이유가 거기 있죠. 출20장 11절 한 번 보시겠읍니까? 8절부터 읽읍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을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7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7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함이니라. 11절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그 마치고 완전한 창조를 즐김의 의미가 있었어요.
또 한 번 보시겠읍니까? 신5:15절 너는 기억하라. 애굽 땅에서 14절부터 읽읍시다. 제7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는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찌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여기서 신5장15절에서는 안식일을 지킨 의미가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신 5: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이게 출20장에 보면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신5장15절에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도 얼핏 보면 2가지 다른 안식일의 기원에 대해 설명 같지만 그렇지 않고 그것이 바로 안식일의 기원에 대한 아주 참 좋은 설명이어요. 이 2가지가 이렇게 나타난 것이----. 전에도 제가 여러 번 설명했지만 구약과 유대교의 신학에서는 항상 구원은 태초의 회복이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에서의 구원은 출애굽이어요. 출애굽의 구원은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보았어요. 그래서 제가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요. 가령 이것을 유대신학에서는 그림으로 많이 표현했다고.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라든지 광야에서 공급받은 므리바의 물 이런 것이 아담이 타락 전에 낙원에서 누렸던 축복의 회복 재현으로 보았어요. 시내에서 모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 그 얼굴에 빛났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의 회복으로 보았어요. 이런 식으로 출애굽이 바로 태초의 낙원의 회복으로 보았기 때문에 원래 안식일은 완성된 완전한 심히 좋은 상태의 창조를 기념하는 것인데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사단의 꾀임에 빠져 가지고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더 이상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고 죄와 죽음아래 놓이게 되었지요. 그런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 구원은 무었이냐 하면 태초의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함이어요. 태초의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이 되면 안식이 있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출애굽이 첫 구원의 사건으로서 태초의 완전한 상태의 회복으로 보았기 때문에 출애굽 이후의 안식일은 원래의 창조에 대한 기념이기도 하고 출애굽의 구원 즉 재창조에 대한 기념이기도 하고 그렇게 설명이 되는 것이어요.
하여간 이렇게 출애굽은 그것이 첫 창조에 완성된 완전한 창조에 대한 기념이든 아니든 그것의 회복으로서 구원의 기념하는 것이든 항상 안식일은 무슨 뜻을 가지냐면 하나님의 완성 되고 완전한 창조를 기념함 이것이 안식일의 기본의미여요. 그러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아담이 사단의 속임수에 빠지죠. 사단은 속이는 자여요. 이렇게 아담에게 사단이 속임수를 썼어요. 네가 이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창3:5절에. 그래서 아담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사단의 사주를 받아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지요. 그래서 아담이 결단한 거여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됨. 스스로 자기에게 하나님이 됨. 하나님 같이 됨. 그러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더 이상 인정하지 않고 그 창조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함 없이 자기가 자기에게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이어요. 자기가 자기 하나님이 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아담이 다시 말하면 자기 속에 내재하는 힘, 지혜, 자원으로 자기의 생명 자기의 안전 자기의 행복을 확보하겠다고 선언하는 행위여요. 그것이 죄라는 것이어요. 그것이 죄의 본질이어요. 그것을 신학에서는 교만이라고 해요. 왜 교만이라고 해요.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자기의 피조물성을 무시하고 부인한다는 말이어요. 자기가 기껏해야 피조물인데 하나님으로 부터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안전, 행복 모든 것을 인해서 하나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존재인데 그것을 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인양 환상하는 것이어요.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최종적으로 책임질 수 있고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양 환상하는 것이어요. 환상에 빠지는 것이죠. 교만한 것이죠.
그것을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 이하에서 세 번이나 되풀이 해서 뭐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하나님이 내버렸다고요. 인간이 그렇게 하겠다고 부득불 등을 돌리니까 하나님이 내버렸다고요. 포기해 버렸다고 그렇게 말하지요. 요새 속된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했단 말이어요. 그러면 한 번 잘해보라 ---란 말이지요.
예수의 탕자의 비유로 말한다면 무슨 이야기여요. 탕자가 아버지로 부터 내 분깃을 주세요.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고 멋대로 살 수 있다고 아버지께 등을 돌리고 멀리 가버린 거지요. 그러면 그렇게 되면 아담이 진짜 하나님과 같이 됩니까? 하나님같이 되지 않죠? 그때부터 자기가 하나님이니까 자기의 자원으로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야 되니까 아담은 무엇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어요. 일을 하는 거여요. 농사를 시작해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첫 시작이 무엇이냐면 농사여요. 땅을 파고 씨를 심고 거기에서 나오는 소출 자기일의 댓가로 자기가 먹고 사는 것이어요. 더 이상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생명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축복을 공급받지 않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려니까 스스로 자기가 일해서 이제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수단이죠. 그래서 일하게 된 것이어요. 그런데 일하면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확보가 됩니까? 되는 것 같죠. 되는 것 같아요 일해 먹고 살잖아요. 일 안하면 누가 먹고 살 수 있어요?
그러나 지난시간에도 제가 작년 이맘 때 예수는 어떤 메시야인가? 우리 권사님 한 분이 질문해 가지고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지 않은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는데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을 하지 않은가? 참 좋은 질문을 하셔서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해서 한 번 특강한 일이 있죠. 그래서 예수는 무슨 메시야인가 그때 제가 상세히 설명을 했는데 그 녹음된 것을 글로 옮겨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책자 뒷면에 나왔어요. 한 번 읽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 작년에 들었던 강의가 새롭게 이해가 되고 더 자세히 이해가 될 것이어요. 하여간 작년에 무엇을 강조했느냐면 인간이 일을 해서 얻는 열매는 항상 생명과 죽음의 양면을 가진 동전과 같은 것. 이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죽음의 이면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항상 기껏해야 생명과 죽음의 양면을 가진 실제를 얻는다고요. 일한다는 말에서 인간이 일함. 일해서 얻음. 이것이 문화라는 말이어요. 문화란 말이 일한다는 말이어요. 농사한다는 말이어요. 농사해서 얻은 것 그것이 문화여요. 그래서 인간의 문화 문명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 준 것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열심히 일을 해요.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확대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죽음을 그만큼 또 확대해요. 어려운 말로 말하면 생명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실제 그것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를 들자면 자주 드는 예지만 일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인간의 지혜와 선행을 개발해서 이런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자는 것이어요. 지혜 그래서 우리가 지금 가령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관찰 자연과학적인 관찰 이런 것이 과학기술 문명을 이루어 가지고 산업생산수단의 개발로 연결되어서 이른바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났지요. 산업혁명이라는 생산수단의 발달로 우리가 얼마나 풍요롭게 되었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소비에서 엄청나게 풍요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 삶이 얼마나 확대되었어요. 엊그제 보리고개를 앓았던 한 30년 40년 전까지만해도 보리고개가 심각한 위험이었는데 이 땅에 농업혁명으로 쌀이 남아돌고 배고품이 없어지고 생명이 확대되었지요. 이 공업화로 우리의 옷 입는 것 쓰는 것 누리는 것이 얼마나 풍요로와졌어요. 삶이 그만큼 확대되었지요.
아 그런데 삶만 확대되었습니까? 삶만 확대된 줄 알고 열심히 산업화의 길을 갔어요. 가봤더니 지금 어떻게 된 거여요. 서울에 지금 숨도 못 쉴만큼 공해가 있고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고 공해 자원고갈 이런 형태로 죽음이 그만큼 --- 그것만 입니까? 또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우리의 존재 의미 삶의 의미가 소유에 있고 소비에 있다라는 인생관 가치관으로 우리가 세뇌되어 가지고 우리 인간성이 황폐화되어 버렸지요. 인간미가 없어지고 정의가 없어지고 다시 말하면 그만큼 죽음이 확대된 것이죠. 그래서 소유가 소비가 팽배한 구미의 소비사회 한 번 가보세요. 거기 인간성의 황폐화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 땅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항상 인간이 일을 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일을 하면 생명만 얻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그만큼 온다. 이 말이어요. 이것은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지요.
지난번에도 예를 들었지만 교통통신수단의 발달로 우리에게 장소적 제약과 시간적 제약으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어요. 우리의 자유를 그만큼 확대함으로 우리의 생명을 확대한 거죠. 그러나 바로 우리의 자유를 확대해서 생명을 확대한 그 교통통신수단이 우리를 얼마나 속박해요. 그 첨단 통신 장비로 정부가 우리를 감시하고 또 범죄인들이 그 수단으로 우리를 도청하고 그래서 안방에서도 자유롭게 말 못하게 만들어요. 얼마나 속박인가? 그만큼 죽음이 확대되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일을 해서 자기의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명 낙관론이지요. 그래서 그런 줄 알고 한참 가다보니까 죽음의 힘이 더 크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어요.
그러면 문명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무슨 운동이 벌어지느냐 하면 문명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삶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죽음을 가져다 준다. 그러니까 문명을 때려 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적인 운동이 벌어져요. 낭만주의가 주기적으로 일어나요. 전 세계적으로. 마지막 낭만운동은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히피운동으로 일어났지요. 문명 다 때려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50-60년대 문명 낙관론에 따라 많은 것을 생산해 내서 소비재가 풍부하면 삶이 확대된 줄 알고 열심히 해 보았는데 그것이 전쟁의 수단으로 월남전쟁에서 수없이 죽어가는 죽음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자연공해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자원고갈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젊은이들이 이런 문명 다 때려치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거기 구원이 있습니까?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에게 하나님 노릇하려고 할 때 이것을 뭐라고 그래요. 인본주의. 일을 해도 삶과 죽음에 변증법적인 실제의 쇠사슬에 묶어 있어요. 일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확대되지 않고 그냥 죽음만 있겠죠. 자연으로 돌아가면 다 굶어 죽음만 있겠죠. 그러니까 일을 해야죠. 일을 해도 항상 죽음의 인연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생명 죽음병에 든 생명을 얻는 거여요. 그것이 왜 그래요? 사단의 나라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어요. 사단의 말을 듣고 사단에게 충성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림으로 그런 일이 벌어진 거여요.
그러니까 사단의 통치아래 아담과 세상이 떨어짐으로 이 사단의 통치아래 죄악과 죽음의 통치아래 떨어짐으로 이 세상 속에 뭐가 있어요. 죽음이 있어요. 인간이 아무리 일을 해 보았자 죽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이 타락한 질서 속에서 아까 말한 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할 수 없이 일을 해야되요. 뭐하기 위해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그런데 일을 하면 죽음이 없는 생명이 아니고 항상 죽음을 동반한 생명. 이런 상황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안전하고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인 양 생각을 해서 어떻게 해요? 우리 한국말로? 죽어라고 일을 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죽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죽지요. 그래서 한국의 40대가 가장 많이 죽는다지 않아요. 전 세계적으로. 왜 그래요? 죽어라고 일을 하니 죽지요.
그런데 왜 죽어라고 일을 해요? 그만큼 생명이 확대할 줄 알고 더 나은 안전 더 나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양 환상이 우리 앞에 있는 거여요. 더 많이 일을 해서 더 많이 벌면 더 많이 안전하고 더 많은 자유와 쾌락을 누릴 수 있고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죽어라고 일을 해요. 죽어라고 일을 하면 죽어요. 그런 삶과 죽음의 변증법적인 상황에 놓인 거여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시작하신 거여요. 하나님의 구원사가 시작이 되는 거여요. 이 세상이 다시 말하면 죄악과 죽음 아래 놓여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심히 아름답지 않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안식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거여요. 무슨 일을 ? 구원의 역사 구원의 일을 하신 거여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으려다가 깜빡 잊고 안 읽었는데 요한복음 5장 이야기 알죠. 예수께서 안식일 날 베데스다 못가에 누어 있는 38년 된 중풍병자를 고쳐주심으로 그것에 대해 유대인들이 시비를 하고 왜 안식일 날 일을 하느냐?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해서 일을 하게 하느냐? 이렇게 시비를 하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답을 해요. 17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쉬지 않아요? 안식일에 일하신다 이 말이어요.
유대 랍비들 간에 토론하는 신학적인 주제 하나가 창세기 2장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 했으니 진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시니 안식하느냐? 이것이 토론의 주제였어요. 그런데 안식일 날도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안식일 날도 아이가 태어나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안식일 날도 일하신다. 생명을 주시고 생명을 거두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안식일 날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구나. 그래서 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을 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일은 다 쉬고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의 대권 생명을 주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 이 일만을 하신다. 이런 식으로 타협하는 그런 대답을 했어요.
그러나 예수는 훨씬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요. 무슨 일을 ? 생명을 주시는 일 구원의 일을 계속하셔요. 왜? 이 세상이 더 이상 심히 좋은 상태가 아니어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의 일을 하시느냐? 죄악과 죽음의 사단의 통치를 꺽고 그의 나라 그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를 폄으로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되어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불러들임으로 그들에게 하나님 창조주께서 하나님 노릇 해주심으로 더 이상 자기 스스로가 자기 하나님이라고 환상하고 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해 살도록 하심으로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계속했어요. 그래서 이 고장 난 창조를 고쳐서 다시 한 번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는 일을 계속하신다. 이말이어요. 그것이 언제 완성이 되냐면 종말에 완성이 되어요. 이 종말은 그러니까 구원의 시대죠. 이때에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가 완전히 종결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서 다시 한 번 온 창조가 심히 좋은 상태가 되는 거여요. 이것을 재창조라고 해요. 그 때 진정으로 안식이 있죠. 그 때는 온 피조물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생명으로 가득 차죠. 더 이상 죄와 죽음이 없는 거여요. 거기에 하나님과 그의 피조세계가 전체 안식이 있는 거죠.
그래서 안식일은 종말론 태초적 개념이면서 종말론적인 개념이어요.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었을 때 다시 말해 온 세계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통치아래 놓이게 될 때 거기에 안식이 있는 거여요. 온 피조세계가 다시 한 번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덧입어서 살게 되는 때 창조주 하나님으로 부터 생명과 그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상태가 될 때 거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는 거여요. 하나님께서 그 종말에 안식을 위해서 계속 일하라는 거여요. 계속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 사단의 통치를 꺽고 자기의 통치를 세워 가신 거여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세요.
자 그러면 여기 4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의미는 무엇이겠어요? 이것이 한 편 태초의 안식일을 기념하고 종말에 안식일을 소망하라 그런 말이어요.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그리고 우리가 그의 피조물 됨 그래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그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임을 고백하라 그런 말이어요. 우리가 일하는 행위를 뭐라고 해요.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행위죠.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죽음의 이면이 있는 생명 밖에 가져다 주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말이어요. 그것은 다른 말로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때 까지는 우리는 사단의 통치아래 타락한 질서속에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엿새 동안은 우리가 일을 해야죠. 이것이 타락한 창조의 질서여요.
그러니까 우리가 엿새 동안 일을 해요. 일을 해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밖에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해야지요. 그러나 일을 한다고 해서 항상 생명만 오느냐? 그렇지 않고 항상 죽음이 같이 옴으로 우리가 안식일을 망각하고 안식일이 없이 살면 바로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내가 내 스스로 일을 해서 나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는 양 그런 환상에 빠질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데 하죠? 그 환상에 젖어 있으면 죽어라고 일을 하죠. 일을 해서 내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을 하면 죽어라고 일을 하죠. 그러나 아까 이야기한대로 죽는다고요 죽어.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라는 제 4계명은 우리가 타락한 질서속에 살기 때문에 일을 해서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얻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로 해서 항상 죽음이 없는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이죠. 엿새 동안은 그렇게 살더라도 하루는 그렇게 사는 삶의 태도를 쉬고 지양하고 일을 중단하고 생업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으로 부터 옵니다고 신앙고백을 하라는 말이어요. 그전에는 또 무슨 소리냐면 그 엿새 동안만의 하루 그렇게 신앙고백하면 그 다음 엿새 동안을 그 신앙고백아래 살라 그 말이어요. 다음 엿새 동안도 안식일을 지킨자로서 살라 그 말이어요. 아까 내가 이야기했죠. 안식일을 모르는 자의 삶은 어떤 삶이어요. 죽어라고 일을 하는 삶이어요. 왜? 일을 해서 자기가 자기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것으로 생각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한 어떻게 하겠어요.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려고 할 것 아니어요. 즉 더 많이 일해서 더 많이 벌면 그만큼 생명이 더 확대될 것 같은데 그만큼 확대될 만큼 죽음이 더 확대 되요. 그래서 계속 죽음 속이어요. 더 큰 죽음 아래 빠지는 것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엿새 만에 하루씩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뭐라고 그럽니까? 나의 안존과 생명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는 신앙고백을 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 의미여요.
그런 신앙고백을 엿새 동안에 한 번씩 하는 사람들은 그 다음 엿새 동안을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을 하면서도 어떤 태도로 일을 해요. 안식일을 지키는 태도로 일을 해요. 다시 말하면 나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를 사랑하심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달렸다. 그런 자세로 엿새를 일을 하면서 사는 거여요.
그런데 일을 하면서 안식일을 모르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 안전과 생명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달려 있다는 그런 자세 없이 사는 사람은 어떻게 산다고요. 죽어라고 일을 해요. 왜? 그 사람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어요? 소비와 소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내게 더 안전한 것이고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내게 행복한 것이라는 그런 가치관으로 살아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이어요. 인간성은 더 황폐되고 이웃과의 관계는 더 파괴되고 건강은 더 나빠지고 그래서 스스로 죽고 그 사람은 죽음을 더 퍼뜨려요. 공해의 상태로 이웃을 속이고 착취하고 이런 상태로 죽음을 더 퍼뜨려요.
반면에 안식일을 지키는 자로서 엿새를 산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세로 엿새를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이어요? 내가 이 타락한 질서속에서 일하며 나의 안전과 생명을 얻어야 하기는 하나 궁극적으로 나의 안전과 행복이 내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내 일의 열매가 아니고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우선 자신의 일 자신의 힘을 절대화하지 않아요. 그것을 상대화해요. 그러기 때문에 우상숭배로 절대적으로 매달리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일을 선택할 수 있죠. 이것이 더 생명을 북돋우는 일인가 아니면 죽음을 북돋우는 일인가? 일의 종류에 대해서 선택할 수 있죠. 일의 정도에 대해서도 선택할 수 있죠. 그냥 산업화만 한다고 해서 생명이 더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다 죽게 되었어요. 도대체 인간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얼마만큼 소비하는 것이 타락한 질서속에서의 안전과 행복을 최대로 확보하는 것일까?
벌써 60년대 70년대부터 여러분들 로마클럽의 이름으로 모인 지혜로운 자들이 뭐라고?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이 보다 더 성장하면 우리에게 생명을 더 갖다 주고 안전과 행복을 더 많이 갖다 주는 게 아니고 도리어 죽음을 많이 가져 오니까 이제 어떻게 하자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구호아래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삶의 스타일을 변화하고 무조건 많이 갖는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고 안전한 것이 아니고 무조건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뭐하자고요? 좀 단순한 삶을 개발하고 여러분들 나 지금 회의가 많아요. 스스로도 뭣 때문에 서울에 사는 거여요. 이 엄청난 독가스를 마시면서 뭣 때문에 서울에 사는 거여요. 여러분들 회의 안 납니까? 차라리 저기 어디 시골에 사는 것이 서울에 살아서 돈 많이 버는 직장 애들 교육하기 좋고 뭐 어쩐다고 해서 다 서울에 살지요. 서울에 살면 삶이 확대되는 것 같지요. 그런데 우리 독가스 마셔서 내일 모래 죽는다면 무슨 확대여요. 차라리 시골에 살아서 맑은 정신으로 연구를 하면 내가 학교 대학이라는 직장 안 갖는다고 해도 그래서 소유하고 소비하는 데는 적어지더라도 나도 건강하고 인간성이 더 풍부해지고 더 좋은 책을 쓸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도 생명 확대 아닙니까?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키는 자는 엿새 동안 살면서도 일의 종류에 대해서도 선택할 여유가 있고 일의 정도에 대해서도 선택할 비판적으로 생각할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해서 이 타락의 질서 속에서도 그래도 죽음 보다는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삶의 방식인가? 일인가?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거여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사에 동역하는 자가 되요.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하려는 그런 운동에 동참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안식일을 지킴은 우리가 타락한 질서속에서 그냥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내가 일을 해서 내 힘으로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런 삶을 사는데 그런 삶은 결국 생명이 확대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죽음에 의해서 압도되는 거여요. 그것이 올바른 삶의 방법이 아니라는 거여요. 그래서 적어도 하루는 그런 삶의 방식을 지양하고 그러니까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라고 그랬어요? 첫째로 생업을 쉬라고 그랬어요. 자기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는 그 행위를 멈추고 나의 안전과 생명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고 신앙고백하는 것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거여요. 그러니까 안식일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들로 부터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하나님의 역사의 주되심 하나님의 구원자 되심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것에 대해서 신앙고백하고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그러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거여요.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요새 우리가 쓰는 재충전이라는 말로도 괜찮겠죠. 일생을 그러니까 일하는 다음 엿새 동안도 그런 신앙고백으로 살라는 말이어요. 안식일을 지키는 자 곧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오로지 하나님께 달렸다는 그 신앙고백으로 그 자세로 살라는 말이어요. 그 자세로 살면 어쩐다고요? 거꾸로 그 자세가 없으면 어쩐다고요? 한마디로 죽어라고 일해서 죽음. 그런 자세로 살면 이 타락의 질서속에서도 우리가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죽음 보다 더 생명을 북 돋우는 일을 하면서 그런 자세로 일을 하면서 살게 되는거여요.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의미여요.
그러니까 구약에 뭐라고 그랬어요? 안식일을 안 지키면 어쩐다고요? 죽지요 죽어. 그래서 안식일을 안 지키면 죽는 거여요.
자 그런데 예수는 뭐하러 오신 거여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시기 위해 오신 분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분이어요.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었을 때에 우리 구원이 완성이 되어요. 그래서 심히 좋은 상태가 되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안식을 갖게 되는 데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대목이 무슨 대목입니까? 예수는 자기와 함께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시기 의와 함께 하나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 벌써 실현되고 있다고 주장하는거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뭐라고 그랬죠? 지난번에 말한 것처럼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하나님의 통치의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 동댕이쳐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롬1:18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내 버렸다고 아담이 하나님께 등을 돌림으로 하나님께서 내 버렸다고 그러지요. 그런데 바울이 말한 것은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내버린 것이 아니고 어쨌다는 거여요? 내버리지 않았어요. 기쁜 소식이 하나님께서 피조세계를 전체 내버렸으면 거기에는 더 이상 구원과 생명이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쨌다고요?
바울의 복음이 뭣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해 주셨다. 그것이 기쁜소식 아닙니까. 그것이 바울의 신학언어로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바울은 롬1:16절에 뭐라고 그럽니까?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왜? 그 복음은 뭐라는거여요? 무엇이 복음이라는 거여요.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여러 번 강조했지만 기본적으로 관계론적인 개념이어요. 관계의 신실함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신실하게 지키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세상을 창조하실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한 거여요. 하나님께서 우리 피조물들을 지어 가지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설정할 때에 이 피조물들에게 약속한 거여요. 무슨 약속을?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슨 의무를 증거해요? 그 창조주에 의지하고 순종해 살도록 그런데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 의지하지 않겠다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하는데 하나님께서 나도 몰라 해버리면 하나님도 불의한 거여요.
의란 말은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 관계에 신실함.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창조 중에 의존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함으로 인간은 불의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말이어요. 하나님은 끝까지 인간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는 거여요.
그런데 지금 바울은 뭐라고 선언하는 거여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십자가의 죽음은 바로 그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다 그것을 신학언어로 말하면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어요. 그것이 기쁜소식이어요. 기쁜소식이 창조주 그러기 때문에 초월자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바울의 언어로 롬 1:18절의 언어로 나 몰라라고 내동댕이 쳐버리는 것이 아니고 어쨌다는 거여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심으로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이 창조 때의 약속을 신실히 지키셨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복음이라는 것이 뭐여요?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신실하심 우리 피조물 전체에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 기쁜 소식이어요. 거기에 구원의 가능성이 열린 거지요. 이제 우리에게 창조주 초월자의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노릇해주심. 바로 그것을 예수께서는 지금 시행하는 거여요. 그것을 예수께서 선포하고 복음이라고 하나님이 통치하심 그래서 우리를 사단의 통치에서 건져내심.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주심. 우리를 내동댕이 친게 아니고 내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꾀에 인간의 뜻에 내버려두면 죽음 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가운데 오셔서 그의 구원의 통치를 폄으로 우리에게 끝까지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라는 말이어요. 그것이 기쁜소식이어요.
이 복음을 선포하고 그 하나님이 통치의 구원의 힘을 치유하심으로 시위했는데 실제가 되게 했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어요? 안식일의 범주로 말하면 태초의 안식일을 회복하는 일이지요. 병든 세상을 고침으로 말미암아 다시 한 번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태초의 안식을 회복하는 일이지요. 자 이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의 형태로 시위하시되 특히 안식일에 하셨는가를 우리가 알게 되었어요.
자 이제 여기 지금 안식일 날 일단의 사람들이 모였어요. 뭐 하러 모였어요. 태초의 안식일을 기념하고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더불어 있을 그 안식을 고대하는 의미로 그것을 간절히 바래서 기도하는 의미로 여기 모였어요. 그런데 지금 손마른 자가 앉아 있어요. 또는 중풍병자가 앉아 있어요. 이것은 지금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의 극적인 표현이어요? 안식일이 더 이상 없음 다시 말하면 빨리 하나님의 통치가 사단의 통치를 꺽고 완성이 되어 종말에 안식이 있어야 될 것임을 절규하는 거여요. 그 상황에서 예수가 그 사람을 고쳐준다고 그랬어요.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어요.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을 치유하는 자로서 곧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분으로서 바로 이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병든 세상을 고쳐서 죽음아래 놓여있는 피조세계에서 죽음을 몰아냄으로서 이 죽음의 힘이 손마름으로 나타났는데 38년 중풍병으로 나타났는데 또는 삭개오 같이 도덕적인 병듦으로 나타났는데 이 죽음의 힘을 몰아냄으로서 종말에 안식을 가져오는 자임을 거기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는 거여요. dramatic하게 표현하는 거여요.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거여요.
자기가 안식을 가져오는 분 진정한 안식일이 안식이 되게 하는 분 어떻게 해서? 이 세상을 사단의 통치로부터 건져내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데려옴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안식을 있게 하는 분 그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주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친 거여요. 예수의 많은 가르침과 그 행위들은 상당히 드라마 극에 대한 센스를 가지고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요.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로 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어요. 그 메세지를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극을 상징행위를 많이 하시고 요새말로 하면 데모를 많이 하셨어요. 안식일 날 병고친 것도 하나의 데모여요. 오늘 우리가 하는 최후의 만찬도 하나의 극이어요. 효과적인 메세지의 전달 수단으로서의 연극.
자 그래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주로 병자를 고쳤다. 이 초대교회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그 제자들은 한 동안 유대인들의 안식일 오늘 우리의 월력으로 말하면 금요일 저녁 해짐으로 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어요. 유대 관례로 말하면. 그 안식일과 그 다음날을 주일이라 해서 예수의 부활의 안식일 다음이었으므로 부활한 예수를 만남을 기념하는 안식일 다음날 양일간 예배 모임을 했던 것 같아요. 신약성경 시대의 교회는 나중에 안식일의 의미가 안식일 다음날 주일로 합류되어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주일을 지키는데 그것은 신약적으로 참 잘한 일이어요.
왜 그러느냐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종말의 구원의 성취에요. 그래서 아까 출애굽후 안식일은 무슨 의미를 갖는다고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의미를. 출애굽의 구원은 무슨 의미로 해석이 된다고요? 첫 창조의 회복으로 해석이 된다고 그러지요. 신약성경에서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이라고도 설명을 하고 이것을 뭘로도 설명을 해요? 첫 창조로도 설명을 하지요. 그래서 가령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누구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번역하는 고전 5:17절 말씀이 정확히 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그에게는 새창조가 일어났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원을 새 창조라고 그래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구원을 새 창조로 설명을 하고 있어요. 그것은 아까 이야기한 역사이해에서 그래요. 종말은 태초의 회복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역사의 원칙에 따라 그래서 출애굽의 구원을 첫 창조의 회복으로 보고 곧 안식일이 바로 태초의 안식일의 회복으로 의미를 가졌듯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주의 날.
부활하신 예수를 지칭하는 말이 ‘주’란 말이어요. 주라는 칭호는 가장 기본적으로 무슨 뜻이냐면 부활하시어 하나님께 높임 받은 분으로서 예수를 주라고 지칭해요. 주라는 말이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다 상호교환 용어로 쓰는 칭호들이 아니고 다 의미가 좀 달라요. 쓰임세가 달라요. 그런데 주라는 말의 기본 의미는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았다는 말 그래서 세상을 통치하는 분으로서의 예수를 주라 하고 높여주는 것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주의 날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제2의 출애굽의 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고 태초의 회복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래서 뭐라고요? 창조라는 category를 쓴다고요. 곳곳에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이 쪽에서 완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이미 일어남 미리 주어짐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 그리고 그 때에 있을 안식이 미리 주어짐 그래서 요새 한국 신학자들이 지어낸 새 줄기 새 신학언어가 ‘선취함’ 이다. 이 말은 라틴어에서 나온 말 이어요. 한국말 번역으로 미리 취함 선취함 저도 한동안 한국에 와 가지고 신학을 안 해서 신학 용어들이 참 생소해 가지고 선취란 말을 쓰기 어려웠어요. 잘 안 써 지더라고요.
선취 그래서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이 종말의 구원의 성취로서 그러기 때문에 종말에 주어질 안식의 성취로서 이해가 되는 거여요. 그래서 주일에 부활을 기념하는 것과 원래 안식일을 합류해서 우리가 주일날 안식일을 지키는 거여요. 자 그러면 지난 번에 우리가 안식일에 대해서 토론했지요. 지금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왜 병자를 많이 치유하셨는가 순전히 역사적인 문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만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그러면 우리가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안식일의 원칙을 올바르게 지키는가? 그런 질문들이 다 있을 거여요. 지난 번에 다들 질문하고 토론해서 아주 간단히 한 마디만을 하고 지나면 어떻게 지켜야 되겠어요?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나은 입장에 있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종말에 이 구원이 성취되어서 우리에게 안식일의 축복이 그만큼 더 확대되어 체험되게 되었다는 것. 예수의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 다스리심.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심.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함이 어떻게 나타난다고요? 치유로 나타남. 치유가 뭐라고요? 우리를 온전케 함. 우리 삶의 모든 면에서 온전케 함으로 나타남. 그것을 우리가 기념하고 그것이 빨리 완성되기를 고대하는 모임이 오늘 우리의 모임이어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가 그 주권이 빨리 완성되도록 그래서 사단의 죄악과 죽음의 통치가 빨리 종결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빨리 완성되도록 예수께서 모든 원수들을 다 극복한 후에 어쩐다고요? 바울이 고전 15:25-28절에 그때에 그 왕권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드린다고 그때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어서 하나님의 모든 것 위에 궁극적인 의미로 존재하게 됨. 그때에 완전한 구원 완전한 치유. 인류와 세상의 온전케 됨. 안식이 있죠. 그것을 빨리 오시기로 기도하는 모임이 첫째 우리 모임이지요.
그래서 초대교회에 그런 기도가 뭐였다고요? 마라나타 주여 오소서! 그 다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아까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으니 구원 우리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 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고 하나님의 의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도 하고 그런 말로 표현하는 말에 대한 체험. 그것에 대한 확신을 다시 받고 확신을 어떻게 받아요? 설교로 받고 성경공부로 받고 지금까지 성경공부를 뭐하러 합니까? 바로 그것에 대한 새로운 확신 그 확신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 그 확신에 따라 우리가 고백하는 거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끝까지 그의 전능함으로 그의 전지함으로 그의 온전하신 사랑으로 끝까지 하나님 노릇 해 주실 것에 대해서 고백하고 그 분께 의지하고 순종해 살겠다고 결단하고 그렇게 해야겠죠.
우리가 하루의 생업을 쉬고 다음 6일을 생업에 종사하면 살되 그 신앙고백의 자세로 산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내게 달렸다. 내 손에 달렸다. 내 운명이 내 손에 달렸다. 내가 죽어라고 일을 해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내게 안전이고 행복이다. 이런 자세가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 손에 달렸다. 그에 뜻에 따라 그 일을 해야 할까? 저 일을 해야 할까? 악을 도모하고 죽음을 도모하는 일 보다는 그래도 생명을 도모하는 일을 해야 되고 일을 하되 어떤 자세로? 죽어라고 일을 해서 죽은 자세가 아니고 과연 정말 얼마만큼 소유하고 얼마만큼 소비하는 것이 생명을 북돋우는 길인가? 를 비판적으로 생각을 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은 신앙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서 비판하게 만들어요. 그런 자세로 살아야죠. 그것이 안식일을 지킴이죠. 안식일을 지킴이 무슨 말이라고요? 아무 것도 안한다. 그런 말이 아니어요.
지난 번에 그것에 대해 충분히 토론했으니까 아무 것도 안한다고 생각하면 유대인식으로 무엇에 빠져요?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 가지고 위선에 빠져 가지고 신학적인 의미는 모르고 우리 삶을 확보하고 확대하기 보다는 도리어 얽어매는 일만 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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