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걷는길/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9) - 막11장1-12장12 (김세윤 교수)

꿈심는농부 2017. 3. 3. 03:11

 

하나님 나라와 성전 (1)

 

 

막11장1-12장12

 

하나님 나라와 성전과의 관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 이런 것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공부하다 말았는데 다시 한 번 막 11:1-12:12절 까지를 읽겠습니다.

 

지난번에도 본 바와 같이 이 이야기들은 쭉 연결이 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유월절 무렵에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거여요. 그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스가랴서 9장9절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평화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입성을 해요. 그래서 이와 같은 메시야적 입성의 상징행위에 예수의 제자들을 위시해서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해가지고 예수를 다윗의 아들의 다윗의 왕조를 재건해서 이스라엘을 로마통치로 부터 독립시키고 이스라엘에 자유와 평화와 풍요로움. 그런 구원을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하고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모습이 지금 여기 그려져 있죠.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군중들이 기대했던 대로 가령 군대를 동원한다든지 무슨 기적적인 힘으로 로마제국을 뒤집어엎고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이방민족들을 다 정복하고 그런 일을 하지 않고 구약 스가랴서의 예언대로 메시야적인 입성을 하기는 했는데 그 다음부터의 행위는 그 때까지 사람들이 메시야 보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시온을 장악해서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이방인들을 다 굴복시키고 다윗왕조를 재건하고 스스로 왕으로 이렇게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풍요의 통치를 이룰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지금 성전안의 시위를 하는 거여요. 이 정치신학 해방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이 성전에서의 사건을 그러기 때문에 메시야로서 입성해서 예루살렘을 장악하려고 했던 하나의 정치적 혁명적인 사건으로 해석을 할려고 애를 써요.

 

그런데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우선 물리적 여건이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금방 가르쳐요. 예수가 무슨 군대를 동원했다든지 기적적인 힘을 발휘했다. 그런 것이 아니고 커다란 성전을 지난 번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성전 뜰이 300미터에다가 475미터크기였어요. 거기에 성전 건물이 있었는데 이 바깥뜰에서 제물들을 사고 팔고 환전하는 장사들이 이루어 졌었는데 예수께서 거기서 장사치들에게 너희들이 이 성전을 시장으로 만든 것은 바로 지금 성전의 타락상에 대한 가장 좋은 상징적인 형상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이 예수의 성전시위의 내용인데 그것이 성전을 장악하고 로마 사람들과 결탁하고 성전을 통해서 국민들을 착취했던 사두개 제사장 집권층을 무너뜨리려는 정치적인 혁명 사건이었다면 예수께서 상당한 군대적인 힘이 필요했어요.

 

특히 성전의 서북쪽 벽으로 높이 올려져 있는 안토니아 요새는 로마군대가 4,500명이 상주하면서 성전들을 감시하고 있었어요. 특히 유월절 같은 때는 보통 가이샤랴에 주둔하는 로마 총독이 증원군을 가지고 와서는 예루살렘 전체를 삼엄하게 감시했어요. 왜냐하면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고 종말에 출애굽의 구원을 염원하는 그런 절기이기 때문에 유월절에는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자들 또는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자들의 시위가 늘 있었어요. 군중들의 소요가 늘 있었어요. 그런 것을 진압하기 위해서 로마군대의 경비가 아주 삼엄했고 레위인들로 구성된 성전경찰의 경비도 아주 삼엄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여기서 무슨 정치적인 혁명적인 군사적인 행동을 시도했다면 예수께서 아주 미쳤든지 상당한 병력이 필요했든지 그런 것인데 둘 다 가능성이 아주 희박해요. 그래서 정치적 신학 해방신학에서 말하는 해석은 틀렸다. 예수의 성전시위사건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금방 알아요.

 

그런데 예수께서 메시야로 입성하는 것은 사실인데 이런 일련의 행동으로서 예수가 어떤 메시야인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는 거여요. 스가랴서 9:9절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겸손이 입성하는 메시야로 예수는 시위를 했어요. 그 자체가 자기가 군사를 동원하는 점령자 군사적인 영웅 그런 메시야가 아니고 겸손한 평화의 왕 메시야인 것을 나타내죠. 스가랴서 9:9절에 나귀를 타고 겸손히 그런 상장 행위를 통해서 그것을 나타내뇨.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을 위시해서 예루살렘 시민들은 온통 자기들의 전통 메시야 사상에 입각해서 예수에게 군사적인 정복자 정치적 왕 메시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거여요.

 

다윗 왕조를 재건해 주기를 호산나! 다윗의 나라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고 지금 외쳐대는 거여요. 그런데 예수는 그것 보다도 성전에 들어가서 상징행위를 하나함으로서 이것이 상징행위죠.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메시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상징행위 즉 연극적인 행위를 많이 했죠. 예수도 그 전통을 이어 받아 가지고 연극적인 행동을 많이 했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이 성전에서의 시위사건이어요. 그러면 이 성전에서의 시위사건이 예수께서 이 시위를 통해서 무엇을 상징할려고 했는가? 어떤 메세지를 어떤 뜻을 의도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는가?

 

아까 첫째로 정치적 혁명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둘째로 또 많은 오해는 예수께서 타락한 성전 이 시장 바닥이 되어버린 타락한 성전을 청결케 해 가지고 하나님께 바칠려고 했다. 그런 오해가 참 많아요. 그래서 이 본문을 보통 성전청결 사건이라고 그러는데 그것도 아니어요. 왜 그것도 아닌 줄 아느냐.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 예수께서 성전을 그렇게 귀히 여기는 것 같지 않아요. 우리 다 공관복음서들에서 보지요. 예수께서 성전에 가서 제사하고 무슨 성전의 제사장들을 존중하고 거기에 제사를 중요시 여기고 그렇다는 본문 어디 한 구절이라도 있습니까? 우리 공관복음서에서? 제자들에게 성전의 제사에 대해서 한 가지 가르침이 있어요? 예수께서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 버린 거여요. 사실은. 공관복음에는 예수께서 성전에 한 번 가요. 언제? 지금 . 그의 마지막 유월절에. 가서 그가 제사합니까? 사실은 제사를 방해하죠. 여기서 제물을 사고 파는 것은 성전에서 제사하기 위해서지요. 레위기 법에 의해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가장 흠 없는 제물들을 바쳐야 되는데 순례객들이 저 먼 곳에서 양이고 염소고 소고 데리고 오면 흠이 생길 가능성도 있고 특히 여기서 환전상들이 필요한 이유는 당시 헬라동전에는 헬라신상들이 새겨져 있었어요. 로마동전에는 로마 황제상이 새겨져 있었어요. 그런 동전이 보통 일상생활에서 통용이 되는데 그런 동전 그런 은전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 왜? 그것은 십계명 위반이니까.

 

그래서 신상도 새겨 지지 않고 로마 황제도 새겨지지 않은 은전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이 두로의 은전이라는 거여요. 거기서 환전을 했어야 했어요. 그 두로의 은전으로. 그래서 환전상도 필요 했고요. 그래서 여기 시장에서 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타락의 상징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성전의 제사를 원활하게 하고 더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이죠.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성전의 제사를 방해하는 거여요. 더구나 우리가 복음서에서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는 제사장도 아니고 성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분이 성전의 기능을 스스로 많이 했어요. 가령 예수께서 죄인들에게 너희들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죠.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 그래서 그들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그들과 예수께서 먹고 마시는 잔치를 늘 하지요.

 

그래서 예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죄인들의 친구라. 사실은 구약의 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죄의 용서는 어떻게 확보하느냐면 자기가 지은 죄에 해당하는 레위기에 정해진 법대로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림으로 그 제사의 근거에 의해서 제사장이 너희 죄가 용서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용서했다고 선언하는 거죠. 예수는 스스로 제사장도 아니고 성전의 제사도 안 드렸는데 중풍병자에게도 네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는 거여요. 이 정결의 법도 마찬가지여요. 문둥병자 혈루병자도 마찬가지여요.

 

거기 가서 제사하고 그 제사에 근거해서 제사장이 네가 이제 깨끗하게 되었다. 깨끗케 되었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말이어요.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사귐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는 것인데 예수께서는 혈루병자에게도 문둥병자에게도 너는 깨끗케 되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깨끗케 했다. 그것의 증거로 문둥병이 낫고 혈루병이 나은 것으로 증거를 삼아서 깨끗케 되었다고 선언하는 거여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다 성전의 기능을 스스로 행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어요? 다른 말로 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고 그 대신 자신이 성전의 기능을 지금 성취해감. 그것의 증거로 예수는 무엇을 삼았어요? 문둥병자가 깨끗해 지고 중풍병자가 나았고 혈루병이 깨끗케 되었고 하는 것으로 삼은 거여요. 이렇게 예를 많이 들 수가 있어요. 더 시간이 없으니까 자꾸 더 예를 들지 않겠지만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성전을 존중하고 그 성전의 제사에 참여하고 그런 기록은 하나도 없어요. 전부 스스로 성전의 기능을 대신한다든지 아니면 이 성전에 대해서 예수는 무어라고 예언해요? 막 12장 2절 지난 번에 읽어 본 바와 같이 예수께서 성전을 나가실 때 갈릴리에서 온 시골뜨기 제자들이 입이 딱 벌어져 가지고 선생이여 어떠하뇨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나이까? 이 아름다운 건물 이 아름다운 돌들 이 엄청난 건물 헤롯의 이 성전은 엄청나게 위대했어요. 헤롯이 작고 형편 없었던 스룹바벨 성전을 헐고 엄청난 성전을 지었어요.

 

그래서 로마 역사가들의 기술에도 나중에 유대 랍비들의 기술에도 이런 격언이 전해 내려와요. 헤롯의 성전을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 일생에 아름다운 건물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 격언이 내려올 정도여요. 그런데 헤롯이 이 엄청난 성전을 지은 이유는 성전건축하고 메시야 대망하고 연결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곧 보겠지만 이 헤롯이 누굽니까? 그 아버지가 에돔족 어머니가 유대인이죠. 그런데 로마사람들이 헤롯을 유대인들의 왕으로 강제로 세워 놓은 거여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헤롯이 왕 되는 것을 반대해서 3년 동안 싸웠어요. 그래서 헤롯이 용병들을 사 가지고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3년 동안 전쟁을 벌여 가지고 B. C. 4년 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 특히 경고하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 유대인들에게는 헤롯이 정당한 왕으로 인정이 되지 않는 거여요.

 

누가 왕이 되어야 해요? 다윗의 자손이 왕이 되어야 하지요.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 종말에 와서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고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높이고 자유와 평화와 정의와 구원을 줄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부당한 비 합법적인 헤롯이 로마 사람의 힘에 의해서 왕 노릇하는 거여요. 헤롯은 우리 복음서에 예수의 탄생하는 기사에도 다윗가문에 무슨 메시야가 났다. 그러면 자기 통치권에 대해서 위협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우리 마태복음에 보면 무슨 일이 벌어져요? 다 죽이는 베들레헴 일대의 아이들을 다 죽이는 이런 잔인한 일을 벌리죠. 그것은 자기 통치권에 정통성이 없음에 대한 불안 때문이지요.

 

그래서 국민들의 마음을 이 종말에 올 다윗 왕 다윗적 메시야 왕에게 돌려 가지고 자기의 왕권의 합법성을 조금이라도 확보하려는 수단으로 헤롯이 성전을 엄청나게 크게 지은 거여요.

 

그것은 삼하 7:12-14절 까지의 나단의 신탁이라고 하는 곳. 이스라엘의 모든 가장 중요한 다윗적 메시야 대망의 뿌리인 이 예언에 나단의 예언에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앉고 하나님에 의해서 성전을 지은 것으로 예고되어 있어요. 이것은 일단 솔로몬에게 대한 예고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일으켜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한다는 예언이죠. 그런데 솔로몬에 의해서 성취되었지만 종말에 이 예언이 다시 와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의 왕위에 앉고 성전을 건축하리라고 기대하는 거여요. 그 기대를 될 수 있으면 약화시키고 자기의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헤롯은 엄청난 성전을 지은 거여요. 자기가 바로 그 성전을 지었으니까 자기의 통치속에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종말의 축복을 발견하라 이런 거여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뭐라고 그럽니까? 막13장 2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 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뭘 예언하는 거여요. 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을 예언하는 거여요. 이 예고는 실제로 주후 66년에 유대인들이 로마인들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성전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요. 그래서 주후 70년에 로마군대가 성전을 포위하고 있다가 불화살로 성전을 태워 버리고 완전히 망가 뜨렸어요. 서쪽 벽 하나만 남겨놓고 기념으로 서쪽 벽 하나만 남겨놓고 정말 예수의 이 예언대로 싹 쓸어 버렸어요. 로마의 황제 데스파시안 장군 거기서 승리를 해서 그 장군이 황제가 되어요. 물론 마지막 전투는 그 장군의 아들 디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여러분들 로마에 가면 포럼 로마포럼이라고 로마의 엣날 경기장에 들어가는 행렬하는 광장이 있어요.

 

거기에 아취가 있는데 거기 양면에 예루살렘 유대전쟁에서 유대인들을 굴복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물들을 탈취해 가지고 유대인들을 몽땅 노예로 끌고 행진하는 디도 장군의 개선장면이 양쪽에 부조되어 있어요.

 

하여간 그렇게 해서 예수의 말처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었어요. 지금 예수가 이 이야기를 언제쯤 하고 있어요? 주후 30년쯤 하고 있어요. 무슨 소리냐면 예수께서 내일 모래 이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괴되리라 하는 말은 이런 것을 신적 수동형이라고 해요. 하나님이 무너뜨린다는 말이어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 타락한 성전 하나님이 무너뜨려 버린다는 거여요. 내일 모래 무너뜨려 버릴 성전을 예수께서 뭐 청결해 가지고 하나님께 바치고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성전청결해서 하나님께 헌정한다. 그런 것도 아니어요. 보시다 시피.

 

우리 요한복음에 보면 공관복음에 예수께서 성전에 한 번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성전을 여러 번 가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가고 7장에 보면 초막절에도 가고 또 나중에 유월절에도 가시고 이런 식으로 여러번 가시는데 그것을 또 가만히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 가서 많은 순례객들에게 당시 유대 예루살렘 인구가 상주인구가 한 5만이었다면 순례객들로 인해서 한 4배로 불어서 20만 쯤 된다고 그랬죠. 순례절기에 초막절이나 유월절에 그런데 그곳에서 많은 순례객들을 대상으로 예수께서 뭐라고 선언해요? 자기가 바로 성전과 성전에서 벌어지는 이 잔치 유월절 또는 초막절의 신학적인 의미를 성취한다고 선언해요.

 

유월절에는 첫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고 제 2출애굽의 구원을 간구하던 그런 절기에 예수께서 바로 자기가 그런 유월절의 구원을 가져다 준다. 내가 생명의 떡이라 첫 출애굽때 먹었던 만나가 상징하고 첫 출애굽 때 마셨던 므리바 물이 상징하는 그 구원의 생명을 자신이 준다고 선언해요.

 

초막절에 기념하는 신에게 율법의 계시와 사막에서 물을 공급하는 생명의 힘의 공급 이런 것을 기념하면서 종말에 그것의 재현을 바랐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뭐라고 그래요. 내가 바로 세상의 빛이다. 내가 준 물을 마시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뭘 두고 말하는 거여요? 성령을 가져 오시는 분. 이 세상의 빛이란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와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분이라는 말이어요. 종말에 계시자로서 종말에 성령을 가져오시는 분으로서 이렇게 지금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잔치에서 요한복음에 의하면 그런 잔치들의 신학적인 의미를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거여요.

 

지금 제가 여러가지 예를 들었어요. 무슨 예를 다 들었어요? 예수께서 당시 예루살렘에 서 있었던 성전 그리고 그 곳에 있었던 사두개인 제사장의 서열 그리고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제사. 이런 것에 대해서 전혀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 것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그것이 곧 파괴될 것을 예고하면서 반면에 자신이 이 성전의 의미와 기능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 거여요. 성전의 기능이 뭐여요? 성전이 뭐하는 거여요? 성전이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집이 왜 예루살렘에 있어요?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요?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왜 예루살렘 가운데 있어요? 언약에 의해서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내 백성이다 라는 언약의 표징으로 성전이 거기 있죠. 성전의 제사라는 것이 뭡니까? 언약의 관계에 손상을 가져오는 죄를 씻어 버리고 덮어 버리고 해서 훼손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성전제사의 기능이죠.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가 바로 하나님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경건하지 못하고 더러워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가지 못하는 하나님과 교제하지 못하는 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그러니까 성전의 기능을 재개발한다고 주장하는 거여요. 자 그래서 예수께서 성전시위의 의미가 무슨 정치적 혁명적 사건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전청결사건도 아니고 또 오해가 많은데 사실 마가복음이 그런 오해의 근거를 조금 제공하기도 하는데 여기 지금 이 성전의 사건이 어디서 일어났어요? 성전 제일 바깥뜰에서 일어났다는 거여요.

 

그런데 이 성전 제일 바깥뜰은 어느 뜻이냐면 그 다음에 성전 벽이 있고 마당이 있는데 이 마당은 여자들의 마당이라 그래요. 유대 여자들이 여기 까지 올 수 있어요. 그 다음 마당은 이스라엘의 마당이라고 해요. 유대 남자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어요. 그 다음 마당이 제사장의 마당이어요. 제단이 있고 지성소가 있고 뭐 이렇다고요. 그런데 이방인들이 올 수 있는 곳에 장이 섰는데 예수께서 그들을 몰아냈다. 게다가 여기 지금 막 11장15-16절에 뭐라고 그럽니까? 17절에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라고 하였느냐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그러니까 만민 이방인들이 와서 기도할 곳을 너희들이 다 장사로 차지해 버려서 이방인들이 이 성전에 접근 못하니까 안 되겠다 해서 예수께서 몰아냈다. 그러니까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에게로 접근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했다. 그렇게도 해석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큰 오해 때문에 그래요.

 

이것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보통 부르는데 예수 당시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니여요. 우리가 여자들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에 견주어서 편리하게 그렇게 우리가 이름을 붙인 것인지 예수 당시에 이것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생각한 거여요. 그래서 이 해석도 옳지 않아요. 사실은 마가가 우리에게 이 예수의 성전시위가 무슨 뜻인가를 해석하도록 열쇠를 여기 주고 있어요. 지난 번에도 애기한 바와 같이 어떻게? 그의 샌드위치 기법으로 보시는 바와 같이 지금 마가의 이야기들을 쭉 분석해 놓았는데 예루살렘을 입성한 뒤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그랬더니 무화과나무가 말라 비틀어 죽고 그것에 이어서 예수께서 믿음에 대한 강론을 한 것으로 되어 있죠. 그래서 이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인데 성전시위 사건으로 중간에 끼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야기로 되어 있어요.

 

성전시위와 그 성전시위에 대한 성전시위 때문에 산헤드린의 대표단이 예수에게 와서 너 지금 성전에서 제사를 방해하는 아주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는데 네가 무슨 권세로 그따위 짓을 했느냐고 시비하죠. 성전시위와 성전시위 한 것이 무슨 권세로 했느냐의 심문은 하나의 이야기가 지금 무화과 이야기로 갈려 있어요. 이렇게 마가복음에 샌드위치식으로 두개의 이야기를 이렇게 사이 사이 끼어서 하는 기법인데 그런 경우는 마가가 왜 그렇게 하느냐면 이 상징행위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하는 거여요. 이것을 무슨 뜻으로 이야기 하라?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이 상징행위로 해석하라는 말이어요. 지금 무화과 이야기가 뭡니까? 저주하고 말라 비툴어진 죽음. 그러니까 어떻게 해석하라는 말이어요. 성전시위 사건을 성전이 파괴되리라는 예고로 이해하라는 말이어요.

 

이 제사가 더 이상 소용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아요. 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더 이상 받지 않아요. 이것은 파괴되기로 작정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조금 있다가 이 성전이 파괴되리라고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일단 이 성전 사건은 예수께서 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리라는 예언 하나님께서 이 성전을 벌하심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이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예고이고 둘째로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건축할 것임을 예고하는 거여요. 이 성전은 하나님에 의해서 파괴될 것이고 자신이 새로운 성전을 건축할 것임을 예고하는 하나의 시위였어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행했던 상징적인 행위였어요. 이 산헤드린의 제사장들은 어느 정도의 예수의 시위의 의미를 감지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예수에게 와서 심문을 하는 거여요.

 

심문 내용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죠? 예수께서 뭐라고 그럽니까? 나도 질문할 것이 하나 있다. 당신들이 요한의 세례를 어떻게 보느냐? 요함이 참 선지자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례를 베풀었다고 보느냐? 아니면 요한이 제가 스스로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지도 않고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받은 선지자라고 그러니까 거짓선지자이냐? 그러니까 여기 본문에 본 바와 같이 산헤드린의 대표단이 이렇게도 답하지 못하고 저렇게도 답하지 못해서 모르겠다고 답을 피함으로 예수도 나도 나를 답을 하지 않겠다 하죠.

 

그러나 예수는 실은 이어서 나오는 악한 농부의 비유로 답을 하죠. 그들이 요구하는 직설적으로는 답을 하지 않지만 비유로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답을 하죠. 비유의 내용인즉 포도원을 가꾸는 포도원의 주인과 포도원의 그림은 구약에서 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유명한 그림이죠. 특히 이것은 이사야서에 있는 그림을 여기에 그대로 쓴거여요. 이사야서 5장에 나오는 그림을 그대로 쓴거여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포도원을 잘 가꾸도록 농부들을 세웠어요. 그러니까 현대말로 하면 소작인들을 세운 거여요. 사실은 이것이 당시 갈리리에 경제상태와도 비숫해요. 그러니까 거기 농부들은 누굽니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어요. 지금 산헤드린 대표단은 예수를 심문하는 산헤드린 대표단. 그런 너희들 같은 놈들 이런 말이어요. 성전 대제사장을 위시한 성전 하이라키(서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성전의 제사장이나 산헤드린의 지도자들을 위시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그러나 그들이 잘 가꾸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의 열매를 많이 소출하여 하나님께 바쳐야 되었으나 어쨌다고요?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어요. 그래서 이 주인이 종들을 보내서 소출을 좀 얻고자 했으나 종들을 그러니까 선지자들을 말하겠죠. 그런데 보내는 선지자들 마다 이 패역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몹시 때려 가지고 빈손으로 돌려 보냈다 이 말이어요. 그래서 어쩐다고요?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라. 그런데 어쩐다고요? 이 농부들이 이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데리고 가서 죽이고 그 포도원을 다 치지할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 그런 것으로 끝날 줄 아느냐? 예수께서 예수께서 경고를 하지요.

 

10절 11절은 시편 118:22-23절의 인용이어요. 여기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된다. 건축자들은 농부들과 같은 뜻이어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하나님의 집 ‘집’이란 말이 건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가문이라는 뜻도 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이죠. 민족의 뜻도 있고 집이란 말이 여러가지 있는데 이 이스라엘을 세우는 사람들 지도자들 농부들이나 마찬가지여요. 돌이란 말은 히브리말로 에벤이어요. 아들이란 말은 관사를 붙여 가지고 하벤이어요. 그래서 여기 비유 속에서 농부들이 죽인 아들은 시편 118편에서 돌에 해당하는 거여요. 발음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말의 유희라고 그러는데 예수께서 즐겨 쓰는 거여요.

 

그러니까 농부들이 아들을 죽인 것이나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돌을 버린 것이나 지금 예수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어쩐다고요? 이 돌을 들어 올려 모퉁이돌로 삼는다. 무엇의 모퉁이 돌로? 성전의 모퉁이 돌로 삼는다. 하나님의 집의 모퉁이 돌로 삼는다. 그래서 예수가 일단 자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죽임당할 것임을 예고하고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높여질 것임. 부활을 예고하고 셋째로 성전이 그렇게 해서 건축될 것임을 예고하는 거여요.

 

그런데 성전청결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렇게 한다 이 말이어요. 그러니까 네가 성전에서 그렇게 소란 피움이 무슨 권세로 그렇게 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께서 비유로 무엇이라고 간접적으로 답하는 거여요?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 했다고 답하는 거여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인정을 하지 않고 그를 죽일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켜 높여서 그의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할 뿐 아니라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예수께서 말하는 것이어요. 그래서 예수는 사실은 체포되어요. 아래의 성전에서 시위를 벌여 가지고 소란을 피운 죄 그런데 그것에 이은 예비심문에서 이런 엄청난 주장을 함. 성전파괴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전을 새로 짓겠다는 주장을 은근히 했다는 것에 의해서 사실은 체포되요. 그래서 재판에 회부되죠. 그래서 재판장면이 14장에 나옵니다.

 

14장 55절 부터 몇 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되어 가지고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공회는 산헤드린이어요 70인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기관 동시에 사법기관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칠 증거를 찾되 얻지 못하니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증거가 많으나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못하더라. 어떤 사람들이 가로되 드디어 죄목을 갖다 대는 거여요.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후에 지으리라 하더라 이것이 죄목이어요. 이 예루살렘 성전을 때려 부수고 자기가 새 성전을 짓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증거가 서로 합하지 않더라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에게 물어 가로되 지금 이 증인들의 증거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느냐? 이 사람의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예수께서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기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그 참람한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뇨? 하니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고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이제 사형선고를 내려서 빌라도에게 넘기는 거여요

 

그러니 예수가 체포되고 재판받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성전 죄목이라고 간단이 말할 수 있지요.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주장했다는 것 그러나 그 죄목에 대해서 예수께서 묵묵 부답함으로 대제사장이 또 묻지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냐? 거기에 대해서 예수께서 그렇다고 그래요. 최근까지도 학자들이 이 성전을 부수고 새로 짓겠다는 죄목하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서로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서로 연결되는 줄을 몰랐어요. 그래서 학자들에게 대 혼돈이 일어났어요. 왜? 네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냐 하는 심문에 예수께서 그렇다고 한 것이죠. 거기에 대해서 대제사장이 참람죄.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참람죄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죄여요. 그런데 신약시대 그 직후에 유대법 책들을 아무리 읽어 봐도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주장했다는 것이 책망죄라고 하지 않아요. 아까 말한 대로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한 사람이 많이 나와요. 그것이 거짓 선지자일 망정 그것이 참람죄는 아니거든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는 아니거든요.

 

우리 사도행전에도 그런 자들이 많이 보고되지요. 행 5장에도 여러분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수가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주장했다는 이유로 거짓 선지자 거짓 메시야라고 주장할 줄 몰라도 참람죄라고 하느냐? 그래서 학자들이 아마 이것은 마가가 재판 기록에 대해서 잘 모르고 예수의 재판에 대해 이야기들이 여러 판들이 떠돌아 다닌 것을 어떤 것은 예수가 성전 죄목으로 재판받다가 어떤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고 주장했다는 것으로 재판받았는데 마가가 이 두 가지를 연결 시켜서 그랬는가 보다 라고 주석가들이 쓰기도 하고 그랬어요. 또는 어떤 사람들은 형편 없는 자가 지금 무력하게 산헤드린에 잡혀와 가지고 꼼짝도 못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무슨 하나님의 우편에서 인자라고 주장하고 그런 것이 하나님께 욕되게 함이라.

 

이렇게 억지로 하기도 하는데 이 1947년 부터 쿰란이라는 사회 팔레스티나에 유대 땅에 사회가 있지요. 거기의 언저리에 쿰란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 동굴에서 주전 150년-주후 70년 사이에 공동체를 구성하고 살았던 유대인들의 문서들이 발굴이 되었어요. 우연히 발굴이 되었겠죠. 처음에는 그들이 거기서 항아리에 넣어 두었던 양피지에 썼던 고대 문서들이 발견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문서에 조그마한 문서가 하나 있어요. 그곳에 보니까 구약의 메시야적인 예언들을 모아 가지고 주석을 해 놓았어요. 그래 가지고 곧 그 공동체가 곧 메시야가 올 것을 간절히 고대하면서 메시야가 오면 이런 일을 한다. 이런 일을 한다. 이렇게 모아 놓았어요. 그 문서에 아까 이야기한 삼하 7:12-14절 까지가 중심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것이 무엇이냐면 다윗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고 이방민족들을 다 정복시킨 뒤에 예루살렘 왕궁을 정하고 왕궁을 크게 짓지요. 그 왕조의 완정을 위해서 그리고는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을려고 노력을 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서 너는 하나님의 집을 지을 자격이 없어 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녀석이라 너는 성전 짓지 말라. 그 대신 무었을 약속해요. 네 수가 다하면 내가 너의 씨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네 왕위에 앉힘으로서 내가 너의 가문을 새우겠노라 다시 말하면 다윗의 왕조를 세우시겠다고 약속을 해요. 그리고 그를 내 아들로 삼겠다. 그가 네 대신 나의 백성 나의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아들로 내가 선언하겠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구를? 다윗의 씨를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집을 짓게 하겠다. 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약속이어요. 전에도 내가 몇 번 설명을 했습니다.

 

이 나단의 신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것이 솔로몬에 의해서 성취되지요.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다윗 위에 일으켜서 다윗 왕위에 앉혀서 다윗 왕조를 세우죠. 그리고 솔로몬이 하나님 백성위에 하나님 대신 통치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훌륭한 성전을 지었지요. 그리고 대대로 이제 다윗의 씨가 다윗 왕위에 오르면서 이 나단의 신탁에 의거해서 통치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거여요. 정통성을 주장하는 거여요.

 

그래서 가령 시편에 등극시라는 것이 있지요. 이스라엘의 왕이 등극할 때 부르는 시 그 중에 대표적으로 시편 2편이 있어요. 그 시2편 7절에 이스라엘 왕이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 뭐라고 선언해요.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그럼으로 해서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정통 합법성을 가지고 통치하는 거여요. 그런데 오늘 우리 목사님이 열왕기를 강의하시지만 열왕기나 역대기를 읽으면서 무엇을 느껴요.

 

다윗의 씨들이 한결 같이 실패하죠. 그러다가 드디어 무슨 일이 벌어져요? 주전 587-6년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북쪽 이스라엘은 그 전에 망하고 남쪽 유다는 이때 완전히 망하지요. 그리고 유대인들의 다수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가지요 그런 다음에 중동의 패권을 잡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바벨론의 포로로 와 있는 유대인들을 다시 유대 땅에 돌려 보내면서 그 중에 다윗 왕조의 마지막 왕자 스룹바벨을 리더로 삼아서 돌려 보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하게 하지요. 그것이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에 쓰여졌기도 하고 학개서나 스가랴서 같은 곳에 다 기록이 되어 있지요. 스룹바벨이 다윗의 씨로서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두고 유대인들이 아 나단의 신탁이 다시 한 번 성취될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러면 스룹바벨을 왕으로 다윗 왕조를 재건해서 그 위에 앉히시고 다윗왕조를 세워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다시 한 번 다윗 때의 영광을 줄 모양이라고 기대를 잔뜩했어요, 그런데 그것이 다 무산되어 버렸지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다가 그리이스의 통치를 받다가 로마사람의 통치를 받는 이렇게 되었다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이 나단의 신탁을 하나님의 종말의 약속으로 보고 방금 쿰란의 문서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고 다른 문서에서 많이 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종말에 다윗의 씨를 또 일으킨다. 다윗의 아들 다윗의 가지 다윗을 또 일으킨다고 고대하는 거여요. 그래서 이 나단의 신탁에서 메시야 대망 종말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일으킨다 다윗의 씨를 일으킨다. 다윗의 가지가 돋아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당시 가장 중요한 메시야 사상이었는데 이것이 나단의 신탁에서 나오는 거여요.

 

그 계시에 의해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뭐라고? 예수는 스가랴서에서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해도 유대인들은 뭐라고 소리 질러요? 다윗의 나라가 재건된다고 소리 질러요. 이 기대에 의해서. 그런데 예수는 다윗의 나라를 재건하기 보다는 성전에 가서 시위를 하는데 내용이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을 새로 짓는다는 시위여요. 그래서 여기서 무엇을 느껴요? 예수는 지금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다윗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기 보다는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한다고요? 성전을 새로 짓는다고요. 네가 무슨 권세로 그렇게 했느냐?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무슨 권세로 했다고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요. 왜?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엇 하는 사람? 성전 짓는 사람. 그러기 때문에 아까 그 대제사장이 너 성전을 때려 부수고 짓는다고 했어? 안 했어? 하는 말에 예수께서 묵묵부답함으로 다시 물은 거여요. 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주장한거야? 안 한거야? 왜? 이 두 죄목은 나단의 신탁에 의해서 두 죄목이 아니라 하나죠. 예수가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했다면 이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산헤드린의 신학자들에게는 뭐라고 들린거여요?

 

이 친구가 나단의 신탁을 성취한다고 주장한 친구이구만. 다윗의 씨로서 다윗의 씨가 무엇이라고요?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 아니냐 그 소리여요. 그러니까 이것은 두 개가 아니고 사실은 하나여요. 너 성전을 때려 부순다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새로 짓는다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예수는 답을 하지 않아요? 왜? 예수가 스스로 성전을 때려 부순다는 것이 아니어요. 하나님의 신탁의 성전을 때려 부순다는 것이어요. 하나님의 진짜 의도는 성전을 새로 짓는 거여요. 그런데 그런 것을 지금 제사장하고 논할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지금 답을 안 한 것이어요. 그러니까 지금 제사장은 다시 한 번 묻는 거여요. 너 지금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윗의 씨로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이지 거기에 예수께서 그렇다고 함으로 드디어 죄목이 성립되는 거여요. 그런데 그 죄목은 참람죄.

 

왜? 아까 참람죄가 뭐라고 그랬어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죄라고요. 신명기법에 의하면 여러분들 집에 가서 신명기를 자세히 읽어 보세요. 몇 번이나 되풀이 되는 말에 성전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곳 그래서 성전을 공격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공격하는 거여요. 신학적으로 그러니까 지금 성전을 파괴한다고 그러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방해하고 제사를 방해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거여요. 그래서 참람죄가 성립이 되는 거여요. 왜? 예수는 자기의 메시야적 과업을(메시야로 입성을 했어요)구약의 메시야의 test에 의해서 성전을 새로 짓는 것으로 보았나? 얼핏 보기에는 우리 생각에는 이상한 사고 아니어요? 왜? 메시야가 다윗왕조를 재건해서 정치적 자유와 정의로운 사회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유대인들이 기대를 했는데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까지만도 그 기대를 잔뜩 부풀었는데 예수는 그것보다도 성전을 새로 짓는다는 주장으로 자기의 메시야 됨 자기가 어떤 메시야 성전을 새로 짓는 메시야 아니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이 하나님 나라 다윗왕조가 뭐여요? 유대신학에 의하면 다윗는 누굽니까?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행하는 자여요. 그러니까 다윗왕조가 뭡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실체죠.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것이 다윗 왕조지 메시야 왕조를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가장 이상적으로 하나님 대신 펼치는 자가 메시야이고 그 메시야 통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당시 열혈당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메시야 왕국 재건된 다윗왕조와 완전히 일치시키면서 하나님 나라를 재건된 다윗왕조 세계를 통치할 다윗왕조로 생각을 했던 거여요.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분이 어떻게 해서 그런 길로 가지 않고 도리어 성전 건축에 의미를 부여했나. 그것을 이 다음 시간에 자세히 논하겠습니다만 오늘 이것 까지만 하고 넘어가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언어들을 보면 차이가 있어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많이 그리죠. 그리고 하나님의 행위를 다스리다로 많이 그리지요. 그 대신 하나님 나라는 구약에 잘 안 나온다고 그랬죠. 그런데 예수께서는 거꾸로여요. 예수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수 없이 쓰죠.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왕으로 그리지 않아요. 그리고 그의 행위를 다스린다고 하지 않아요. 예수는 하나님을 뭐라고 그려요? 하나님 아빠 항상 아빠. 그리고 하나님의 행위를 뭐라고 그려요? 집안의 가장 아빠가 자녀들을 위해서 베푼 것으로 상속을 주고 아이들을 돌보고 식탁잔치를 베풀고 가장의 아빠가 하는 행동 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는 집으로 많이 그려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는 뭐가 있어요? 문이 있죠. 어느 문으로 들어가라고요? 좁은 문으로. 문에 가서 뭐하라고요? 두드려라. 그러면 어쩐다고요? 열리리라. 그 문은 뭐가 달려 있어요? 열쇠가 달렸죠. 그 열쇠는 누구에게 주었어요? 베드로에게. 문 열쇠를 열고 하나님 나라 방에 들어가면 그 속에 뭐가 있어요? 방이 있어요. 내 아버지 집에 뭐가 많아요? 방이 많아요. 그 방에서 뭐를 베풀거여요? 잔치. 이것이 예수께서 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련의 그림이어요. 이 그림은 별로 안 쓰고 예수의 비유 중에 하나는 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한 두 개 나올 정도여요. 주로 이 그림 다시 말하면 집 하나님 나라를 집으로 그려요.

 

그런데 하나님의 집이 뭡니까? 성전이 하나님의 집이지.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아오는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과 함께 잔치를 하는 곳이죠. 그 제사가 잔치 유월절 잔치 초막절 잔치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언어 중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이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다는 언어. 이 들어간다는 언어가 성전에 들어간다는 언어와 이른 바 신학적으로 뉘앙스적으로 완전히 일치해요.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해요.

 

가령 시편 15편 24편에 보면 성전에 누가 들어갈 수 있어요? 누가 시온 하나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며 누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느냐? 시편 15편에 그렇게 시작하죠. 그럼 뭐라고요? 마음이 정하고 십계명을 다 지킨 녀석이 들어올 수 있다고요. 예수도 마찬가지여요.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어린 아이여야 되고 다윗은 누구보다 더한 의인이어야 하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 이런 것들이 전부 성전에 들어가는 언어에 맞추어서 그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 자체도 성전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분이 하나님 나라를 지금 이루는 실행하는 단계에서 지금 성전에서 중대한 일을 하는데 그 일이 나단의 신탁에 메시야적 예언의 성취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로운 성전을 짓는 의미로 했다. 이 말이어요.

 

이 다음 시간에 이것은 사실 뛰지 않고 한꺼번에 해야 여러분들 기억에 잘 남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가 버려서 여기서 끊을 수 밖에 없는데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뜻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는 뜻이 무엇인가? 그것이 왜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인가? 그것은 다윗왕조의 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왜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이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사도들의 복음과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런 것을 이 다음시간에 계속 할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