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과 하나님나라
마가복음 14장17-25절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은 지난 번에 두어 차례 벌써 읽었습니다만 다시 한 번 막 14:17-25절까지를 저와 여러분이 교독합시다. “저물매 열둘을 데리고 와서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는 마시지 아니 하니라 하시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벌써 12회째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는데 이제 결론에 도달해요. 사실 오늘은 결론을 맺으려고 두 가지 문제를 생각 하려고 그랬어요. 하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와 그의 죽음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가? 특히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라ㅡ하는데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 문제를 하나 다루려고 했고 또 하나는 지난 번에 두 주 전에 맺으면서 이 다음에 제가 하겠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당시 유대인들이 바라던 다윗왕조의 재건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오늘 우리 교회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런 것들을 오늘 다 다룸으로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몇 차례의 연구를 마무리 하려고 그랬는데 오늘은 짧게 하기 위해서 첫 번 것만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두번째 것은 이 다음에 다시 한 번 생각을 하려고 그럽니다.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쭉 공부를 따라 오셨다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지난 번 마지막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거라고 했죠. 어떻게 한다고 그랬어요? 다시 한 번 전체를 요약하면 죄악과 죽음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나라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의와 생명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들어오라고 우리를 불렀다고 그랬죠. 의와 생명을 약속하면서. 이 초대장에 예수께서 무엇을 쓰셨다고 그랬어요? 우리에게 너희들이 사단의 통치 아래서는 사단이 우리로 자꾸 죄를 짓도록 하고 죄를 지으면 죽음으로 월급을 주고 품삯을 주고 한다고 그랬지요. 그것이 어떻게 된다고 그랬지요?
지난 번에 사단이 우리에게 자꾸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네 스스로 네 자원으로 네 능력으로 네 지혜로 너의 생명과 안전과 행복을 확보해가라 하는 자꾸 충동한다고 그랬죠. 원래 사단이 아담에게 했던 충동을 우리에게 자꾸 한다고 그래요.
우리가 자꾸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의지함이 없게 하나님께 순종함이 없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주로서 그의 피조물인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거부하고 우리의 능력대로 우리의 지혜대로 우리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 그것이 죄악이라고 그랬죠.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요? 우리의 제한성 속에 갇히니까 우리의 제한성 결핍성 속에 갇히니까 거기서 무엇이 온다고요? 고난들이 나온다고요. 그것이 죽음의 증상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우리로 죄를 짓도록 사주하고 지으면 죽음으로 댓가를 치르는 그런 상태로 우리가 있는데 예수께서는 그러니까 거기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 무한하신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하고 순종해 살라. 그것이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고 의인이 되는 것이고 그러면 생명의 근원인 창조주의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이 그러니까 무한한 부요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적인 신적인 삶을 얻게 된다. 이것을 성경의 숙어로는 영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약속을 예수께서는 무슨 그림으로 즐겨 그렸다고요? 잔치의 그림으로 즐겨 그리고 간혹 상속의 그림으로 많이 그렸다고 그랬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창조주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음. 그래서 하나님의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그런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얻게 된다. 그것이 생명이라. 그것이 구원이라. 이 말이어요. 그런 구원을 약속하면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고 우리를 초대한 거여요. 그렇게 한 의도는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려고 하나님의 백성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려고 다시 말하면 우리 피조물로 하여금 아담 이래로의 창조주와의 분리된 창조주에게 등 돌림으로 해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받지 못하는 상태를 극복하고 창조주와 다시 연결시킴으로 우리가 우리의 피조물성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초월과 무한에 참여함으로 피조물의 제한성 결핍성에서 고난들을 다 극복하도록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란 말이어요.
이것을 예수는 또 어떻게 표현했다고요? 새 성전건축이라는 것으로도 표현을 했다고 그랬죠. 예수께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한다고 주장함.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고하시고 자기가 새로운 성전을 건축한다고 한 것인데 이때에 예수께서 짓는 새 성전은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고 인간이 지은 것도 아니고 돌과 나무로 지은 것도 아니고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새로운 성전이라고 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 살펴본 것이 그것이어요. 예수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새로운 성전이라고 했고 그것을 건축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새 성전건축의 사명은 예수가 스스로 자기의 메시야적인 사명이라고 예수가 규정을 했는데 그것은 어째서 그런다고 했어요?
삼하 7:12-14절 까지 나오는 나단의 신탁에 의지해서 그랬다고 그랬죠. 이 나단의 신탁이 유대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데 여기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일으켜서 다윗의 왕위에 올려서 다윗왕조를 건축하고 그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게 하리라 하는 예언 그 예언에 따라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가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겠다고 주장을 하는 거여요. 그런데 여기서 지금 유대인들과 의견이 엇갈리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특히 열혈당 유대인들은 예수 당시 다윗왕조의 재건으로 보았다고요. 왜? 다윗왕조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일을 했거든 또 성전도 건물 성전으로 보았다고요. 그런데 예수는 다윗왕조와 하나님 나라를 일단 분리해서 생각을 하고 이 다음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그래서 막 12:38절 이하에 왜 서기관들이 당시 신학자들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다윗 스스로가 시편 110편에서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고 예수께서 당시 신학자들 서기관들과 신학 논쟁을 벌이죠.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단순히 재건되는 이 지상의 다윗왕조와 동일시 할 수 없음. 나단의 신탁에 의해서 재건되는 다윗왕조가 단순히 정치적 군사적 제도일 수 없음. 또 여기서 말하는 성전이 단순히 돌과 나무로 지어서 다시 짐승제사가 이루어지는 그런 성전일 수 없음을 말해요. 대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창조함을 말한다고 예수께서 여러 가지로 직관적으로 가르쳐요.
그래서 이 다음시간에는 우리가 예수의 그와 같은 나단의 신탁과 그 전승에 나오는 메시야 사상에 대한 재해석이 얼마나 타당한가. 유대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 까지도 끝까지 이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와 동일시하는 것을 버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가령 우리가 행1:4-6절 까지 보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승천하시는 예수를 붙들고도 뭐라고 제자들이 호소 겸 부탁을 해요. 하나님 나라가 뭐라고 그럽니까? 거기 행 1:4-6절을 보면 이들이 뭐라고 그래요. 4절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가 이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좀 더 가르치니까 6절에 그들이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나님 나라를 유대 다윗왕조의 재건쯤으로 생각하는 당시의 유대 민속 메시야 사상에 꼭 고정되어 가지고 그 기대를 끝까지 갖는 거여요.
그래서 우리가 평가를 해야죠. 왜 예수께서는 그러한 기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보았고 그것을 새 성전으로 보았는가? 지금도 이스라엘의 정통 신학자들은 메시야가 오면 다윗왕조를 재건하리라고 보는데 그것이 더 합당한 진리인가? 예수의 가르침이 더 합당한 진리인가? 우리가 살펴보아야겠어요.
우선 그것은 이 다음시간에 하기로 하고 우선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의도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창설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을 예수는 새로운 성전 건축이라는 말로도 표현을 했고 결국 새 성전건축 한다는 주장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는 거여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새로운 성전을 건축한다는 주장을 예수는 성전에서의 제사제물들 사고파는 행위를 금하는 시위 행위를 해서 사실은 자기 죽음을 유발하는 거여요. 그래서 예수가 성전에서 시위를 해서 데모를 해 가지고 체포되는 거여요.
그랬을 때 지난 번에 우리가 막11:27-12:11절에서 본 바와 같이 자기가 바로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로운 성전을 건축하는 자로 시위를 했다고 한다고요. 무슨 권세로 네가 이 일을 했느냐 하니까 예수께서 무슨 권세로. 세례요한의 세례 때에 하늘로 부터 임명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일을 했다고 말을 하고 그래서 그 예비 심문에 의거해서 산헤드린의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네가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 성전을 건축한다고 했느냐 하는 질문에 그 질문의 다른 표현인 네가 메시야냐? 하나님의 아들이냐 는 질문에 그렇다고 함으로 이제 사형이 판결이 되어요.
그러니까 예수는 지금 성전에서의 재물의 사고파는 것을 금함이 아주 중요한 죄목이어요. 자기에 대한 체포와 자기에 대한 처형이 임박함을 알고 지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유월절 만찬 무렵에 성전에 가서 제사를 방해하는 시위를 했어요. 그러니까 성전 관리들이 예수를 붙들고 예비심문을 해서 그들이 감을 잡았어요. 아 이 친구가 나단의 신탁을 성취하는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는다고 주장하는 구나. 그래서 그를 체포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때에 예수도 그 사건이 일어날 줄 알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싯점으로 기회를 삼아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의 의미를 여기서 설명을 해요. 미리 해석을 해요. 전에도 제가 한 번 설명을 했는데 예수의 하나님의 선포의 전체 맥락에서 다시 한 번 설명하니까 일부 중복됨이 있는데 여러분들 양해하시기 바래요. 그래서 이 최후의 만찬은 3중 4중 5중의 상징성이 있다고 그랬지요. 우선 만찬의 시점이 유월절 만찬의 싯점이어요. 정확히 유월절 우리 공관복음에 의하면 이 만찬이 유월절 만찬의 싯점에 이루어져요. 요한복음에 의하면 하루 전 날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되어있어요. 그것 조금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여러분들 아마 설명이 필요 없을 지도 몰라요. 하여간 알아 두실 것은 공관복음을 따르던 요한복음을 따르던 유월절 잔치의 context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런데 유월절은 무슨 날이어요. 출애굽의 구원을 기념하는 종말에 있을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염원하는 절기죠. 그래서 메시야로 말미암아 모세와 같은 선지자 또는 메시야로 말미암아 빨리 있어야할 제 2의 출애굽의 구원을 간절히 염원하는 그 시점이어요. 그 시점에 만찬을 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굉장히 의식하는 절기여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가장이 우리가 애굽에서 노예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어떻게 구원했는가 라는 첫 출애굽의 이야기를 쭉 하게 되어 있어요. 식탁에서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기념하고 빨리 또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메시야를 통해서 또 출애굽의 구원이 있어야 할 것을 열망하는 그 때에 이루어지는 거여요. 둘째 연극의 재료들이 굉장히 상징성이 있다고 그랬지요. 먹고 마시는 것 예수께서 먹는 밥과 마시는 포도주를 재료로 삼아서 연극을 하는데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뭐하는 거여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까? 내일 다가오는 사건은 제2의 출애굽의 구원임. 유월절 무렵이라는 시간이 그것을 상징해요. 둘째로 그런데 그 구원은 뭐냐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거여요. 먹고 마시는 것이 상징하는 바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사건임.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자기 몸의 부서짐과 피흘림으로 이루어짐. 잔인한 죽음으로 이루어짐. 그 상징성을 우리가 다 알지요.
떡을 부수고 빨간 포도주를 붇고 하는 상징성 . 그런데 그것이 누가 주느냐? 자기가 내어 주어요. 자기 자신을 내어줌.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 이루어짐 이런 상징성으로 이루어 져있어요. 그것이 어떻게 덕을 입느냐? 떡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포도주를 마심으로. 이런 것이 지금 3중 4중의 상징성이 있는데 그것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거기다가 떡의 말씀 잔의 말씀 해설의 말씀을 붙었어요. 연극의 제스츄어 몸짓 상징성의 몸짓에 해설을 덧붙였어요.
잔의 말씀을 보면 21절은 만찬의 제목이어요. 인자는 자기의 기록된 대로 간다. 내일 다가오는 것이 자기가 인자로서의 죽음인데 그것은 성경의 예언들의 성취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2중 3중 4중의 상징성을 가진 제스츄어와 몸짓과 그것의 해설의 말씀들로 구성이 되는데 그 중에 잔의 말씀이 제일 풍부하게 되어 있으니까 잔의 말씀을 분석하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이란 말과 ‘언약의 피라’는 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그랬지요. 이 잔의 말씀이 언약의 피다. 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이 말은 이사야서 53장 10-12절의 인용이라고 그랬지요. 21절에 예수는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인자로서의 성경의 예언대로의 죽음이라는 것인데 성경의 예언이 어디 성경이어요? 이사샤서 53장의 예언이어요. ‘주의 종이 패역한 불의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자기 몸을 대속의 제사로 내 The는다’ 는 예언이어요. 흘러버린다는 예언 그러니까 주의 종이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대속의 제사로 바쳐서 그 하나님의 백성의 죄가 덮어짐으로 그들을 의롭게 한다는 예언이어요. 그러니까 예수는 내일 피흘리는 잔인한 죽음이 이사야서의 주의 종의 역활을 감당하는 또는 이사야서의 예언대로의 죽음임 곧 대속의 제사임.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의롭게 하는 사건임. 이렇게 미리 제자들에게 해설을 해 준거여요.
이 언약의 피라는 말은 여러 가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는 출애굽기 24장 8절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시내 광야에 모아놓고 모세가 언약의 제사를 드리고 그 언약의 제물의 피를 이스라엘 회중에 뿌리며 언약의 피라고 외치지요. 그래서 그 언약의 피에 따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이 되는 거여요. 왜? 언약이란 것이 뭐라고 그랬지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가 내 백성이다. 그것이 언약의 형식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아서 내가 너희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시겠다고 약속함이어요. 그것이 언약이어요. 그래서 이 시내에서의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복 주시고 그들에게 가나안의 유업을 주시고 이것이 다 하나님 노릇해 주심.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해야 되어요? 내가 너희 하나님이고 너희가 내 백성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쪽에서 그 언약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되어요?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하여 살아야 되거든요.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하고 순종해서 살아야 되는데 이 친구들이 안 해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목사님이 열왕기를 열심히 강의하시는데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것이 계속해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역사여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언약이 파괴된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렘 31장 33절 이하에 뭐라고 예언해요? 새 언약.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무엇을 약속해요?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해요. 옛 언약은 그러니까 시내 모세를 통한 시내 언약은 어디에다 새겨 졌어요. 돌판에 새겨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심장이 돌같이 딱딱해 가지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은 어디에다 새긴데요? 우리의 심장에 새긴데요. 부드러운 심장 살에 새겨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내면에서 부터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이 우리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우리의 사상과 감정과 의지의 출처인 심장에서 부터 우러나오도록 하겠다는 새 언약이어요. 그런데 이사야서 42:6절이라든지 49:8절 같은데 보면 또 이 새 언약을 누구를 통해서 세우냐면 주의 종을 통해서 세운다고요.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사 49: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사42-53장 까지는 다 주의 종의 노래들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이방의 빛으로 내세울 뿐 아니라 백성을 위한 언약으로 내세운다고 예언을 해요. 이방의 빛으로 내세운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면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다 준다고요. 빛은 무엇을 가능케 해요? 앎을 가능케 하지요. 지식을 가능하게 하지요.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빛을 가능케 함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말이지요. 주의 종의 역활이 그것 뿐 아니고 백성에게 언약을 세운다. 언약의 중보자 노릇을 하게 한다. 이런 예언들을 지금 염두에 두고 인자는 어쩐다고요? 성경의 예언대로 간다. 죽음.
그런데 언약의 피라는 말은 이런 예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면 예수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어요? 새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어요. 새 언약을 세우면 무엇이 초래되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 되어요. 그러니까 다시 정리하면 예수는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두 범주로 크게 해석을 한 거여요. 대속의 제사의 범주로 해석을 해서 곧 새 언약의 제사의 범주로 해석을 했어요. 그것이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이 대속의 제사인 한 무슨 효과를 가져 온다고요?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덮어 버리고 그들에게 용서가 일어나고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 연결되게 하는 의가 초래되는 것이고 언약의 제사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고 두 개가 합쳐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무슨 사건이라는 거여요? 새로운 그리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란 말이어요.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어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은 로마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아서는 유대인들의 왕이라고 했다는 반란범으로서 정치범으로서 죽었어요. 그러나 유대 신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메시야라고 주장했다는 것이고 그런데 그 주장이 헛주장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위협하는 참람죄로 말미암아 신명기 21:23절이 선언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거여요. 왜냐면 신명기 21:23절이 당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자라는 선언이여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지금 이 시점까지 예수의 십자가에 달릴 때까지 예수를 따라 온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의 입장에 여러분들이 한 번 서 보세요. 그들의 마음 속 깊이에는 예수가 다윗왕조를 재건해서 로마제국을 압도하고 이스라엘에게 태평성대를 가져다주고 그래서 더불어 자기들도 좀 어떻게 한 등 해볼까 하는 민속 메시야 사상으로 가득차 있어서 지금까지 따라 왔는데 자기들이 하나님 말씀 자체로 하나님의 법 자체로 인정하는 신명기 21:23절에 예수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거여요. 왜? 예수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거짓 메시야로서 백성을 오도한 자로서 하나님을 참람되게 한 자로서 그러니 이들이 다 도망갈 것 아닙니까? 그들이 뭐 비겁해서 도망가기보다도 그들이 신학적인 이유로 이들이 다 도망을 간 거여요.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예수의 부활이 일어났어요.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어요. 바로 이런 신명기 21:23절 같은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아까 목사님 예수의 부활을 제자들이 지연할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 가지 변증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도 제자들이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지도 않았는데 부활했다고 이야기를 지어낼 수가 없어요. 유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가 저주받은 죽음이어요. 하나님의 저주받은 거여요. 그래서 제자들이 다 흩어진 거여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지어냅니까? 지어낼 수 없는 거죠. 신학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런데 하여간 예수께서 부활해서 그들에게 나타났어요. 그러면 여기 지금 요한과 야고보와 베드로의 입장에 여러분들 서 보았어요. 여러분들에게 지금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어요. 그러면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제일 먼저 무엇을 깨달아요?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을 제일 먼저 깨닫게 됩니다. 뭐가 옳다고 인정한 거여요? 어제 그제 2-3일 전에 자기 다가오는 죽음이 대속의 제사요 새 언약의 제사라고 설명한 것이 옳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거여요.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 신명기 21:23절이 선언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이 사실인데 그것이 자기 죄에 대한 저주가 아니고 우리를 위한 대신 대속 대표로 우리의 죄 짐을 지고 그 죄에 대한 징벌을 받고 한 제사구나. 그것이 확인된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하고 하나님의 그 구원을 치유로 시위한 것이 전부 하나님께서 옳다고 인정한 거여요. 그러니까 이 제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그 통치 아래로 들어오라고 초대하고 그러면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진짜 구원의 힘이 있음을 치유함으로 시위하고 하면서 궁극적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를 창조한다고 하고 그것을 새 성전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다 옳다는 말이어요. 그러고 보니까 예수의 대속의 제사다. 새 언약의 제사라는 것이 뭐여요? 아 그것이 새로운 성전건축하는 사건 아니어요. 성전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어요? 성전이라는 것이 무슨 근거로 예루살렘에 있는 거여요? 언약의 근거에 의해서 있는 거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 노릇해 주심의 상징이죠. 그래서 성전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어좌가 있는데 그 지성소에 하나님의 어좌가 무엇입니까? 언약궤 아닙니까? 언약을 담은 상자 뚜껑이 하나님의 어좌다. 원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기로 작정하시고 그것이 성전인데 그 언약궤 위에 계신 것을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나의 백성이다. 언약에 근거한 거죠. 죄라는 것이 뭡니까? 그 언약에 대한 위반이 죄여요.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그 관계에 어긋나게 행동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을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것이 죄거든요. 그 죄를 덮고 그래서 그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내는 수단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여요. 속죄제사라는 것이 언약의 법에 대해서 어긋남을 덮어 버리는 것은 죄를 덮고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언약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제사의 기능이어요. 속죄의 제사의 기능.
언약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의라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 피조물들이 다시 한 번 창조주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의 관계로 회복하는 것이 의여요. 그것을 확보하는 것이 뭐라고요? 제사란 말이어요. 그것이 성전의 제사기능이어요. 그런데 예수가 자기 목숨을 바로 언약과 대속의 제사로 바침으로서 예루살렘 성전과 건물 성전과 그 곳에서 타락한 제사장들의 부복한대로 그 짐승제사로 늘 확보하려했던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과의 올바른 관계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사는 올바른 관계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성전이 가리키려고 했던 그 실상을 예수께서 성취한 거여요. 그래서 예수께서 어쨌다고요? 은근히 자기가 성전의 기능을 성취한다고 가르쳤다고 그랬죠. 죄의 용서를 성언하기도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하다고 선언하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죠.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가리킬려고 했던 바를 죽음으로 성취함으로서 성전을 성취해 버림으로서 이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간에 적어도 예수의 구원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 피조물 간에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언약의 관계 원래 창조 때와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이 되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여요?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하시고 옛날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거하시듯이 그들 안에 거하시고 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함.
성전이 뭡니까? 성전의 원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거처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누구 안에 거하시는 거여요. 예수의 언약과 대속의 제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들어간 그 사람들 안에 거하신다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뭐여요? 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성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로 성전을 건축한다고 그래요. 예수께서 그것이 진짜 구원이다는 말이어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한 번 멋들어지게 짓고 그것이 다 짐승제사 드리는 것. 그것이 구원이 아니고 다윗의 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을 해 가지고 인간이 왕노릇 하고 좀 더 정의롭고 좀 자유롭고 풍요롭고 한 그런 정치 펴는 것이 구원도 아니고 궁극적으로 인류를 하나님의 창조주와 연결시켜서 그 창조주가 우리 안에 거하죠. 우리가 그 창조주에 힘입어 살게 됨. 그것이 구원이라는 말이어요. 그 구원을 이루었다.
자 이제 그럼 여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죠.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부요한 잔치에 참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그의 죽음 언약을 세우는 제사 대속의 제사로 성취하는 거여요. 그래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사역을 마무리 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그것은 다 깨달은 제자들 예수의 부활 후 그것을 다 깨달은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뭐가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다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예수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만들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버렸다. 그것이 더 중요합니까? 어떤 것이 더 중요합니까? 후자가 중요하죠. 이것이 구원의 사건이죠/죽음이 구원의 사건이죠. 예수의 가르침. 선포는 그 구원의 사건에 대한 예고요 약속이죠. 그러니까 사도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되풀이 하지 않고 어디에 집중했어요? 그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그것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설명하는데 집중한 거여요.
그래서 고전 15장 3-5절 까지 누차 본 본문에서 사도들이 한결 같이 선포한 복음이 뭐라고요?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 그가 장사되었다는 것 그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것 그가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 그것이 다시 요약하면 그리스도가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 죄문제를 해결한 사건이라는 것 죄문제를 해결했다는 말은 죄가 뭐라고요?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등을 돌리고 사단의 사주속에 자기의 내재속에 갇혀 그래서 죽음에 이르었음. 그 문제를 해결했음. 어떻게? 성경의 언어로 말하면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 만들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존해 살게 했다고요. 다시 또 다른 언어로 표현하면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의롭게 했다는 것 우리를 의롭게 했다는 말이 무슨 말이라고요? 하늘과 땅을 지으신 무한한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해 살게 되는 관계속에 들어갔다고요. 그림으로 말하면 우리 생명의 근원인 우리 창조주에게 뿌리를 박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의 생명력을 힘입어서 살게 된 거여요. 그 생명력이 언제 완성이 되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완성이 될 거여요. 그런데 지금 벌써 우리는 그 생명을 덧입어 살 수 있어요. 단편적으로나마. 어떻게? 우리 신앙생활로. 더 구체적으로 우리 기도생활로. 기도라는 것이 뭡니까? 기도의 첫 마디가 뭡니까? 하늘과 땅을 지으신 무한한 하나님을 무엇이라 불러요? 아빠! 아빠 부르면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와요? 나의 지금 삶의 구체적인 고난들을 해결해 달라는 청원이죠. 그것이 다 뭡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행위는 뭐여요? 우리의 내재자원 우리의 자원으로 문제를 해결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을 지으신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를 빌리고 그의 능력을 빌리고 그의 사랑을 힘입고 그러려는 행위가 기도죠. 우리가 기도로 벌써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덧입어 사는 관계에 들어갔죠.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첫열매를 단편적으로나마 지금 누려서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첫맛을 보게 되는 관계에 들어갔죠.
이 다음 시간에 마지막으로 해서 하나님 나라를 마칠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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