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걷는길/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비유(12) - 양과 염소의 비유 (김세윤 교수)

꿈심는농부 2017. 3. 3. 03:54

 

 

양과 염소의 비유

 

 

오늘 같이 공부할 말씀은 마25:31-46절입니다.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여기의 이 비유는 먼저 비유의 뜻을 제일로 먼저 밝혀요. 31절에 인자가 자기영광으로 모든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에 앉아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할 것임. 이것에 대한 비유이다. 이렇게 예수께서 비유에 대한 뜻을 밝혀요.

 

여러분들이 성경을 많이 읽으셨으면 여기 지금 25:31절 이 말씀과 또 그때에 심판 때에 구원 받는 자들에게 만세전부터 창세전부터 예비 된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다는 점에서 여러분들이 금방 아 이것은 다니엘서 7장에 예언된 말씀을 예수께서 지금 염두에 주시고 하신 말씀이다. 그것을 알게 될 것이어요.

 

다니엘서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앞으로의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환상으로 미리 계시해주셔요. 처음에는 네 괴물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어요. 이 괴물들은 이방왕조들을 표현하는 말인데 이런 이방왕조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주 못살게 핍박하고 짓밟고 할텐데 그런 끝에 하나님께서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어요.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 하나님의 왕좌들이 놓이고 다니엘서 7장 9절 부터입니다. 개역번역에는 단수로 되어 있는데 사실은 복수여요. 왕좌 하나가 놓인 것이 아니고 그중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계신이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어요. 그 하나님이 보좌에 등극하시고 천사들이 부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송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책이 열려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하는데 그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구는 마지막 왕조를 대표하는 뿔난 괴물을 불로 멸망시키고 그리고 내가 또 보니(단7:13)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로 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았다. 하나님이 그 통치권을 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주셨다. 그것을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서 본 것이어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여기 지금 하나님이 등극하시고 모든 천사들이 예배하는 가운데에 온 세상에 대한 심판이 열려서 뿔난 괴물을 하나님을 반항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굴었던 이방왕조를 심판의 불로 멸망시키고 그런 끝에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 나아와서 하나님으로 부터 나라를 받았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 우편에 등극을 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그의 통치권(나라) 왕권을 위임받았다. 그런 말이어요.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시110:1절에 나오는 말로서 우리 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의 구절인데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대권자가 된다는 말이어요.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 대신에 행사하는 자 된다. 그런 말이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았다고 고백을 하지요. 우리 사도신경에 그렇게 고백을 하지요.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우리를 심판하고 구원하시러 온다. 우리 시도신경에서 외울 때마다 고백하는데 그것이 우리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고백되는 부분이어요. 시110:1절의 성취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자기 우편에 높이셨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 말은 하나님의 왕권을 통치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주권을 예수에게 위임했다. 그 말이어요. 그래서 예수가 만유의 왕의 통치권을 대행한다. 그란 말이어요. 그것에 대한 예언이 단7장에 있는 것이어요.

 

그래서 이 하나님과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그냥 사람이란 말이어요. 숙어여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셈족언어에서 하나의 숙어여요. 한 사람이라는 말이어요. 사람이라는 말도 종을 말해요. 거기에 아을디라는 말이 붙은 경우에는 종들 중의 하나 라는 말이어요. 사람이라는 종중의 하나. 그러니까 한 사람이란 말이어요.

 

그런데 그 분이 어떤 분이냐? 사람 같은 모습으로 사람 같은 분으로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 나타나는 거여요. 아까 단7:5절에 하나님은 노인 형상으로 나타났지요. 하나님도 한 사람 같은 분으로 그런 형상으로 나타났고 그런데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그래서 이름을 옛적부터 계신이라. 노인형상으로 나타났는데 여기 또 하나 환상 중에 또 하나 나타난 분이 있는데 그 분도 사람 같은 분이어요.

 

그런데 구름을 타고 온 것에서 우리는 아 이분이 인간이 아니고 신적인 존재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어요. 구약에서는 구름이 하나님의 운반체여요.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구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 그래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상징해요. 그래서 이 한사람의 아들 같은 이라. 사람의 모습을 한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여요. 또 하나의 인간. 제 2의 하나님 같은 분. 옛적부터 계신 노인 같은 하나님과 또 한분 사람의 모습을 지니는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 그 분이 하나님 우편에 등극하여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는 장면을 이제 다니엘이 보았어요.

 

예수께서 31절에 복음서에 보면 스스로를 인자라고 그러지요. 이것은 단 7장을 염두에 두고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 그 말이어요. 여기 단7:13절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다. 단7장에 계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분이다. 그런 말이어요. 예수께서 인자라고 부르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이라고요? 자기가 단7장에 예언된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다는 말이어요. 자기가 바로 단 7장에 예언된 그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는 분이다. 그런 뜻이지요.

 

“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자 다니엘은 여기까지 환상을 보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을 때 천사가 18절 부터 이 환상의 뜻을 해석해 주어요.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천사가 해석해 주기를 당분간 아까 말씀을 드린 대로 괴물들로 상징되는 무지막지한 이방왕조들이 일어나서 세상을 다스리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못살게 굴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대로 둬버리지 않고 종국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그의 백성들 그때까지 신실하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 이것을 단 7장에서 뭐라고 표현을 하느냐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에게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게 해석을 해요.

 

앞에 나오는 네 괴물들은 네 이방왕조들을 상징한다고요. 왕조들, 이들의 세계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종결을 지우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심판으로 다 물리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여기 다니엘이 본 환상과 18절 이하의 천사의 해설을 연결시키면 이제 인자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바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이고 상징이고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 나라를 중개해주시는 분이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자신이 아주 독특하게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어요. 아마 여러분들이 많이 가지고 있는 주석 성경도 보면 아마 인자라는 말이 신약시대에 메시야에 대한 칭호였다. 이렇게 많이 나와 있을 거여요.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인자라는 말은 원래 칭호가 아니었어요. 그냥 한 사람이라는 말이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것을 자기에게 칭호로 만드신 거여요. 거기다가 우리말로는 잘 표현하기 어려운데 관사를 더 붙여서 그 사람이다. 자신을 예수께서는 항상 그 사람이라고 가르쳤어요.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그 당시 유대교에 있어서 무슨 메시야적 칭호가 아니었고 다윗의 아들이라든지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다윗의 가지라든지 다윗의 씨라든지 이런 것들은 다 메시야에 대한 칭호였는데 인자라는 말,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그와 같은 칭호는 아니었고 그냥 사람이라는 말이어요. 하나의 숙어여요.

 

예수께서 그 말에 그 관사를 붙여 가지고 자기에 대한 칭호를 만든 거여요. 왜 그것이 칭호가 되느냐?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 그런 뜻이었다고요.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의 역활을 하는 분이다. 자기가 바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해 주시는 분이다. 그런 뜻이어요. 예수께서 자기를 인자라고 불렀다고요.

 

자 그러니까 여기 그런 분으로 예수께서 단 7장의 예언이 종국적인 성취로 나타날 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예수께서 여기 인자로서 그 인자로서 그 사람의 아들로서 이렇게 하나님의 우편에 하나님의 보좌위에 등극했을 때에 천사들이 이에 부복하고 예언하는 것이지요. 그때에 단7장에 그림대로 심판이 벌어지는데 그 심판을 비유로 예수께서 지금 설명을 하는 것이어요.

 

그때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일단의 사람들을 왼편에 오른편에 구분할 것이다. 이것은 책들을 보면 당시의 팔레스티나에서 여기 양들과 염소들을 한 무리로 치기도 했던가 보아요. 그것이 한 목자가 양 따로 염소 따로 칠 수가 없으니까 함께 섞어서 친 경제적인 편의도 있겠지만 또 목축의 지혜와도 좀 관계가 있었던가 보아요. 양들 보다는 염소들이 더 참을성이 없답니다. 양들이 더 미련해 가지고 더 이상 뜯을 풀이 없는데도 양들은 계속해서 거기서 뜯는 경향이 있답니다. 그런데 염소들은 참을성이 없어서 풀이 별로 없으면 곧장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가고 이런 것을 염소들이 더 잘 안대요. 그래서 염소가 이동을 해가면 양들도 따라 가고 이렇게 되어 가지고 풀 뜯기는데 양과 염소를 이렇게 섞어서 치면 좀 더 좋았답니다. 그래서 그렇게 쳤대요. 그리고 밤이 되면 팔레스티나 기온이 상당히 내려갈 때에 이제 거꾸로 양들은 추위를 잘 견딥니다. 염소는 못 견디고 염소는 좁은 우리로 끌러 드리고 양들은 밖에 세우고 낮에는 함께 섞어서 치다가 밤이 되면 양들과 염소를 구분했답니다. 지금 그런 것을 배경으로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고 계신 거여요.

 

그 심판의 때에 예수께서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나타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할 때에 마치 밤이 되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사람들을 구분한다. 그래서 양떼는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런데 무엇에 따라서 구분했냐? 35절 부터 양들은 아들로 비유되는 사람들은 내가 목말라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 이들을 뭐라고 부릅니까? 37절에 의인들이라 그러지요. 이들에게는 단 7장의 예언대로 뭐가 주어진다고요? 하나님 나라가 주어져요. 종국에 완성이 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 구원의 완성이 주어진다. 그 말이어요. 반면에 염소로 비유되는 사람들은 42절에 내가 주리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 옷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41절에 저주를 받는 자들이라고 부르지요. 이들에게는 주의 심판이 주어져서 마귀와 그의 종들이 받게 되는 영원한 반열에 심판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염소로 상징되는 악인들과 양으로 상징이 되는 의인들의 차이가 뭐여요? 주를 섬겼는가? 아니 섬겼는가? 그것이지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반면에 악인들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주를 섬겼는가? 안 섬겼는가? 의 차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여러 비유들이 그런 점에서 같았지요. 심판의 기준이 얼마만큼 우리가 주께 신실하였느냐에 있다고 그랬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본 여러 비유들이 다 똑같이 가르쳤어요. 얼마만큼 우리가 주께 신실하고 주께 순종하고 주를 섬겼는가에 따라서 심판이 내려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비유들과 지금 오늘 보는 비유의 큰 차이는 무엇이냐? 주를 섬긴다는 뜻이 무엇이냐? 주께 신실하다는 뜻이 무엇이냐? 그것을 오늘 비유는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 거여요.

 

지난번에 본 달란트의 비유 기억나십니까? 열 달란트 받은 사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한 달란트 받은 사람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을 해서 주의 재산을 많이 늘리는 사람들로 칭찬을 받고 상급을 받았지요.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를 오해하고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해서 주의 뜻을 잘 섬기지 못해서 벌을 받았지요. 거기서는 우리가 달란트는 무엇이고 달란트를 잘 활용한다는 뜻이 무엇인가?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그 비유들을 설명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이 비유는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거여요. 주로 부터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한다는 뜻이어요. 다시 말하면 주께 신실하고 주를 섬긴다는 뜻이 뭐냐? 애매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그런 것이 아니고 아주 구체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나그네를 돌보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본 한마디로 하면 이웃을 잘 돌보는 이웃을 사람 함. 그런데 그 이웃은 우리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웃이어요. 그것이 또 우리가 좋아하는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내용이 아닙니까? 이웃이 뭐냐? 하나님을 헌신을 다해서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라. 예수가 모든 계명을 이 두 마디로 요약을 했지요. 두 마디가 아니고 하나의 사랑의 계명이어요. 하나님을 헌신을 다해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아. 그런데 그때 이웃이 누구냐?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이웃이 우리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이웃이어요.

 

여기 오늘 우리의 본문도 마찬가지여요. 우리의 이웃이 누구냐? 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 이 사회에서 항상 소외되고 박탈당하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 지극히 작은 사람들 이들이 이웃이다.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이루어진다. 이 말이어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예수께서 이렇게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옥에 갇히고 병들고 이런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뭐라고 부릅니까?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지요(40절) 내 형제들 중에서도 더 많이 어려움을 당하는 고난 받는 자들. 세상적으로 보면 지극히 작은 자들, 이런 자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주어진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러면 여기 지금 이렇게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사회에 소외되고 고통을 받는 이런 일반적인 사람들을 가르치느냐? 아마 여러분들 성경을 읽으면 다 그렇게 해석을 할 것이어요. 성경학자가 마태복음을 자세히 읽어 보니까 딴 생각이 들었어요. 왜? 마태복음 10장을 보시겠습니까? 마10:40-42절까지 보십시다. 예수께서 이제 자기의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내어 보내는 선교파송의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10:40-42절과 마25:31-46절 까지 본문을 비교해 보면 여기 마 25장의 굶주리고 목마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나그네로 쫓기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선교사로 유리방황하면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의 제자들을 가르킨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어요. 예수의 제자들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러 유대 땅과 사마리아 땅과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나그네 노릇하면서 때로는 굶주리고 때로는 목마르고 헐벗고 핍박받고 감옥에 갇히기도 한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찬물 한 그릇이라도 준 자는 예수에게 준 것으로 간주되어서 그들에게 최후의 심판 때에 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마10장 40-42절 까지 말하고 있지요. 이 두 본문을 연결시키면 여기 마 25장에도 형제들 예수께서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로 유리방황하고 병들고 감옥에 갇히고 하는 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가르킨다. 그러한 해석이 가능해요.

 

그렇다면 이 우리가 보는 비유는 주의 심판 때에 예수께서 모든 민족들을 다 심판을 하시는데 그 심판의 척도가 복음선포하러 온 예수의 제자들 선교사들에 어떠한 태도를 취했느냐? 그들을 잘 영접하고 그들을 도와서 복음선포가 잘 이루어지도록 했느냐? 아니면 그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복음을 거절하고 했느냐? 에 따라서 양 의인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의 완성을 받을 자들, 염소들 악인들 저주받을 자들, 사단 마귀에 속한 자로 구분이 된다. 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런 뜻이 되겠어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열심히 그렇게 해석을 할려고 해요. 그런데 마10:40-42절 까지와 마25:31-46절 까지와 놀라운 유사성도 있지만 큰 차이가 하나 있어요. 마 10:42절에는 ‘누구든지 나의 제자의 이름으로 오는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에게는 상이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보는 것은 마 10장은 예수의 제자인줄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 냉수를 주는 이야기 이고 여기 마 25장은 정반대로 양으로 구분이 되었던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거여요.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그 고통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그 고통 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곧 예수에게 주는 것임을 모르는 거여요. 마10장은 명백히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제자들 오는 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왔기에 예수의 제자들이기에 따뜻히 대접한다는 이야기이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러분들이 그냥 마10장에 대한 지식이 없이 읽을 때에 얻는 인상대로 읽으면 되어요.

 

오늘 읽은 본문은 헐벗고 굶주리고 하는 자들이 특별히 복음선포하러 나서는 사도들, 선교사들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고난 받은 사람들이어요. 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난 받은 사람들 가난하고 쫓기고 감옥에 갇히고 병들고 하는 사람들 여러분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께서 특별히 이런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부여 주었어요. 그래서 가령 눅4:16절에 있는 예수의 첫 메시야로서의 설교가 이사야서의 61장의 예언대로 가난한 자 전쟁포로들 감옥에 갇힌 자들 병든 자들 그들에게 마태복음에서도 산상수훈에 가난한자들 우는 자들 예수께서 누구를 특별히 영접하고 누구를 도왔어요? 사회에서 멀리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 문둥병자들, 저기 죄인들 이런 사람들을 예수께서 특별히 돌보도록 가르쳤어요.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비유도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되어요.

 

자 그래서 우리가 여기 구원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을 불렀어요. 그래서 일단의 사람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응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 왔어요. 그래서 예수를 주라고 고백했어요. 반면에 일단의 사람들은 예수를 거부함으로서 자기들이 스스로 그렇게 생각을 안 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사단의 통치에 그냥 머무르게 한 거여요.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서 벌써 여기서 구원의 첫 열매를 맛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종말에 다시 오실 때 아까 비유가 가르쳐 준대로 이제 심판이 일어나요. 그런 가운데 이것이 분리되겠지요. 양떼와 염소로 구분이 되어요. 염소로 상징이 되는 자들은 마귀와 그의 사자들 마귀의 종들과 함께 멸망을 받을 자들이어요. 그러니까 마귀의 나라에 속한 자들로 분리될 것이어요.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이 비유를 누구에게 주고 있어요? 그의 제자들에게 하고 있어요. 지금 예수의 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응한 자들에게 지금 하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최후의 심판 때에 물론 이렇게 지금 예수의 복음에 응한 자들과 그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한 자들이 분리될 것은 사실이어요.

 

그러나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 예수께서 이 비유를 그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이른바 믿음으로 응한 자들 가운데 분리가 일어날 것임. 이 자들이 염소로 그의 복음을 거부한 자들이 염소로 마귀의 나라에 속해서 마귀와 함께 멸망에 처해지는 것을 너무나 상식적인 당연한 일인데 예수가 이 비유를 그의 복음에 응한 자들에게 지금 하고 있다고 해서 무엇을 알게 되느냐면 그의 복음의 메세지에 믿음으로 응한 자들 가운데서도 양과 염소의 분리가 일어날 것임. 쉽게 말하면 지금 교회에 다 속한 자들 가운데서도 양과 염소의 분리가 일어날 것임.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똑같은 비유이지요. 이 사상이 가시적인 교회 속에서는 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 속에서 주의 심판 때까지 진짜 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진짜 하나님 나라의 백성 밀, 또는 양이 있고 외형적으로는 거의 구분할 수 없는 염소 영과 구분하기 어려운 염소 또는 밀과 구분하기 어려운 가라지가 있을 수 있음. 최후의 심판 때 그것이 갈라짐. 그래서 양 밀 진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로 확인이 될 것이고 진짜 속하는 사단의 나라에 마귀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마귀와 함께 불의 멸망에 처해질 것임. 지금 그런 이야기여요.

 

그런데 어떻게 그 심판이 이루어지느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게 마시게 했고 내게 영접했고 내게 찾아왔고 ····내게가 누구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가 얼마나 신실했느냐? 아까 이야기한 대로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모든 비유들이 다 똑같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 비유가 주 예수께 신실하다는 뜻이 무엇이냐? 우리 마음속으로 그냥 주여 주여 부르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방언을 열심히 하고 술, 담배 안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그런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이웃을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 내가 10원 도와 주면서 저분이 나를 100원 도와줄 수 있다. 내가 언제라도 반대급부를 계산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이웃이 아니고 김영삼씨가 야당국회의원으로 닭장차에 실려 다닐 때 내가 사진 찍고 같이 데모하면 그 사람 언제 대통령 되면 나 한자리 시켜주겠지 그것이 이웃이 아니고 이웃이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어요. 그 이웃에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이루어진다.

 

마 7:21-23절을 보시겠습니다. 여기서도 최후의 심판 때에 대한 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로서 주여 주여 기도 열심히 하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는 자 목사 노릇하는 자 설교 많이 하는 자들. 우리 같은 사람들 큰일 났어요.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 잠실 주경기장에 수만 명 모아놓고 손바닥만 내밀어도 막 뒤로 자빠진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양떼들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까? 그 사람들은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떠나거라. 그들이 우리 25장의 비유에 염소에 속해서 그들은 사실 사단의 나라에 속한 자들로서 마귀와 함께 영벌에 처해진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자 그 자를 21절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자 오늘 묵상하는 비유대로 말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 구체적으로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자들 굶주리는 자들 헐벗은 자들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자들 그들에게 우리가 얼마만큼 도왔느냐? 에 의해서 심판이 이루어진다.

 

최후의 심판이라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의 상태의 재확인에 불과해요. 왜 그러느냐면 전에도 여러 번 강조했지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또는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께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그에게 전적으로 순종한다. 그런 말이지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 무슨 말이어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이 되었다. 피조물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이 됨. 그것이 의인이 되었다는 말이어요. 올바른 관계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함. 그 말이어요. 거꾸로 죄인이라는 말은 사단에게 의존하고 순종함.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는 의존하지 않고 거부함. 이 길은 사단에게 의존하고 순종함.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고 죽음으로 월급을 주어요. 죽음이 현재 모든 고난들로 증상이 나타난다고요. 예수는 우리를 어떻게 다스려요? 의로 다스려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의를 행하게 해요. 의를 행한다는 말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이웃과 올바른 관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함. 이웃과 올바른 관계가 이웃을 사랑함. 그러면 생명이 일어나요. 생명이 정의와 평화 환경적인 건강, 육신적인 건강으로 나타나다고요. 예수께서 우리를 이런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서 불러내어서 이런 상태에 있던 자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해서 하나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을 시킨 것이어요.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애매 한 것이 아니고 종말에 예수가 오실 때에 그때 처음으로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또는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 예수가 오실 때에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벌써 여기서 체험하게 된다고 그랬지요. 믿음으로 들어가고 지금 여기서 벌써 그 구원을 누린다고 그랬지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하면 우리가 이런 것을 얻어야 이것은 여러 번 설명했듯이 이런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건강과 이런 것이 확대되어요.

 

우리가 과연 여기 지금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들에게 옷을 입히고 병든 자들에게 돌보고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면. 왜 그렇게 살아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 하나님 나라에 있다는 소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는 소리는 바로 이 두 계명을 실천한다는 말이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소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다는 소리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순종이 뭐여요? 하나님 나라의 통치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다. 우상숭배 맘몬숭배하면 죽임이 와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했으면 성수대교가 잘 만들어졌을 것이고 아파트도 잘 지어졌을 것이고 지하철도 잘 지어졌을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 되어요? 우리의 평안도 확대되어요. 우리가 평안해지면 지금 바다보래로 지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불안하다고 그러지요. 불안하면 어떻게 되어요? 건강이 헤쳐져요. 맘몬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헌신했으면 아파트 지은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의미로 아파트를 지었으면 어떻게 되었을 거여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확대되었겠지요. 그런데 사단을 쫓고 맘몬숭배해서 죽음이 확대되는 판이어요.

 

그러니까 제가 상당히 오랫동안 여러분들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공부하면서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그렇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강은 사랑 그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고 순종하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을 나타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것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의 온전케함. 지금 여기서 벌써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건강의 확대로 모든 좋은 것. 우리 삶을 온전케 하는 것으로 나타나요. 이것이 물론 종말에 완성이 되지요. 그 종말에 완성될 형태의 그것을 지금 여기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너무나도 큰 것일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의 첫열매를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런 형태로 구체적으로 누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으로서 그 통치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이 계명으로 오는데 그 곳에 순종한 사람은 그 순종행위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들어내는 것이고 그렇게 순종하지 않은 사람은 형식적으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 주의 이름으로 설교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병자도 고치고 난리를 피지만 실제로는 사단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어요. 그래서 최후의 심판 때는 고스란히 그것이 드러나는 거여요. 확인이 되는 거여요. 최후의 심판을 벌써 우리의 삶으로 결정을 하는 거여요.

 

최후의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는 거여요. 진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고 진짜 예수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형식적으로 예수를 주여 주여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 저렇게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저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저렇게 복음선포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하고 믿음이 좋다 하지만 예수께서 내가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어요. 우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에 대한 헌신 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게으른 사람은 겉으로는 종교적 열정이 있을망정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볼 수 없다. 지금 우리는 양과 염소를 구분 못하고 밀과 가리지를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사람들 다 훌륭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으로 간주할지 모르나 심판 때는 다 드러나서 그런 사람들은 원래 속하는 사단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사단과 함께 멸망 받게 된다. 지금 그런 경고여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얼마나 무서운 경고여요. 우리 한번 우리 스스로를 다 돌아보아야 겠어요.

 

그런데 여기서 이 본문이 두 가지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아 가지고 그것만 간단히 지적하고 마칠까 합니다. 하나는 이 본문을 보고 어떤 사람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선행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런 가르침이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 본문을 잘 이해를 못하고 하는 말이어요. 이 본문이 아까 누구에게 주어지는 이야기라고 했어요? 믿음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제자들. 그들에게 주어진 거여요. 그들에게 그 믿음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지만 그 하나님의 통치 아까 이야기한 두 계명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반대말은 우상숭배라고 그랬지요. 우상숭배의 가장 절실한 형태가 무엇이라고요? 맘몬이즘 그것 항상 같이 가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 하면서도 우상숭배를 하고 맘몬이즘 이 세상적인 가치 돈 권력 명예나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이웃에 대한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이익만 추구하면서 사는 그런 일이 없도록 경고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말씀이라는 것. 이미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이 전제된 이야기지. 그런 믿음이 없이 그냥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맏는다. 그런 말은 아니지요.

 

아까 믿음이 우리를 올바른 관계로 회복을 시키는데 올바른 관계에 머무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함.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그의 나라로 불러 들였어요. 예수의 속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덮어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었어요. 의인 만들었어요.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뭐여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내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헌신 대신 하나님을 의존하는 대신에 내가 돈을 의존한다든지 권력을 의존한다든지 하면 그 순간 뭐하는 거여요? 하나님의 통치에 등을 돌린 것이지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음.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가 지키지 않으면 그 순간에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어요. 그러면 그 순간에 내가 죽음을 맛보아요.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면 그 순간 우리의 구체적인 가치판단과 윤리선택의 순간 순간마다 우리가 사단을 순종하면 죽음을 맛보아요. 어제 제가 백화점에 갔었는데 자동차가 서로 양보를 않고 한 옷 잘 입은 아주머니하고 돈이 꽤나 있게 생긴 아저씨하고 부딪혔어요. 싸우고 난리여요. 그 사람들이 지금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 거여요. 왜? 하나님의 말을 안 들어서. 그 순간에 뭐라고 그랬는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좀 양보하라고 그런데 그 두 운전자들이 양보가 뭐여요? 사단의 말을 들었어요. 너 주장하고 네가 먼저 앞서 나아가라. 앞서 나아가다가 둘이 죽음을 맛본 거여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빵빵 거리고 난리가 나 가지고 그 두 사람 때문에 우리가 함께 죽음을 맛 본 거여요.

 

또 하나 잘못된 해석이 해방신학 특히 우리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이 그런 형태인데 여기 보세요. 내가 굶주렸을 때 네가 나의 밥을 먹였고 내가 목말랐을 때 네가 나를 물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네가 나를 찾아왔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들과 자기를 동일시 했다. 거기서 민중신학자들은 논리를 비약시켜서 가난한 자들이 예수다 그래요. 그래서 우리 한국의 민중신학이라는 것이 민중이 예수다고 해요. 예수는 따로 개인으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고 민중의 표상이다. 가령 우리 마가복음이 나사렛 예수의 개인의 삶과 가르침과 섬김과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가 아니고 고난 받는 민중의 이른바 사회적인 전기이다.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이 자기의 고난 받는 백성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자기에게 한 행위로 간주한다. 그 말이지 그러니까 바로 그 가난한 자들이 아니고 가난한 자들이 왕이기는 더더욱 아니지요. 왕이 내가 굶주렸을 때 네가 찾아왔고 그렇게 말하는데 무슨 말이어요? 왕이 자기의 고난 받은 백성에 대한 섬김을 자기에 대한 섬김으로 간주한다는 말이지 왕은 왕이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여요. 왕이 가난한 자는 아니지요.

 

더더구나 민중신학 같은 집단이 왕이기는 더더구나 아니지요. 그러니까 그 혼돈은 우리가 말아야한다. 그런 민중신학 해방신학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제 이 비유를 마치면서 두개의 오해 우리의 선행이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또 하나는 민중신학으로 예수가 가난한 자들이고 가난한 자들이 예수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 말로 공부를 마치면 우리가 마음 편하게 집에 돌아가야지요. 우리가 종전대로 살면 되겠구만 그런데 그래서는 안 되어요. 이 본문은 우리에게 엄청난 경고를 아까 마7장에 있는 것 같이 우리가 서로 겉으로만 주여 주여 우리의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은 제자도의 댓가를 요구해요. 병든 자들을 돌보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고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들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을 댓가로 요구해요. 우리의 것을 나누어 주어야 되어요. 그러면 손해 희생 아픔을 요구하지요. 그것을 하기가 싫어 가지고 우리가 종교적 경건한 행위들로 위장하는 습관들이 있어요. 우리 모두가 그런 유혹을 다 받아요. 어떻게? 주여 주여 기도를 더 큰 소리로 하고 전도한다고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돌아다니면서 나같이 성경 공부했다고 열심히 가르치면 된다고 그리고 설교하면 된다고 그러고 또한 무슨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잠실 주경기장에 사람들을 몽땅 모아놓고 시위하면 자기가 과연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을 하면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기 쉬운데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 다 쓸모 없을 수 있음. 주께 신실함. 아주 구체적으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그 도움을 주는 것.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우리가 진짜 주를 사랑하고 주께 신실하다면 추운 겨울에 가난한 사람들도 돌보고 고아들을 돌보고 시골의 노부모들도 돌보고 우리 부모만 아니라 남의 부모도 돌보고 이런 일 우리가 해야지요. 우리보다 더 굶주리는 백성들 우간다, 보스니아의 어디에 이런 일 하기 싫어서 종교행위로 위장하면 최후의 심판 때에 무엇을 받아요? 지금 당장은 양과 비슷하게 밀과 비슷하게 염소같이 가라지 같이 지낼지도 모르나 최후의 심판 때에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사단의 나라에 속한 녀석이야 이렇게 될 수 있음. 엄중한 경고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