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의 비유
오늘 공부할 말씀은 막 13장입니다. 34-36절 까지인데 32-37절 까지 읽읍시다.
“막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
지난 번에 우리가 예수께서 종말에 대해서 어떻게 예고하셨나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래서 종말이 임하는데 그 날은 심판과 구원의 날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이 완성이 되는 날인데 그 때에 많은 환란이 있을 것을 예고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어요. 그 날은 언제일런지 예수 자신도 모르고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자적인 결정에 달려있음을 말한 것을 보았어요. 그러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떠한 자세로 그 날을 준비해야 되는가를 말하는 거지요.
여기서 보는 말은 33절에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과 또 결론에 있어 37절에 다시 한 번 깨어 있으라는 말도 처음 한 문단의 시작과 그 문단의 마침을 이렇게 삼아요. 강조하기 위해서. 중간의 주제가 깨어 있으라는 말이구나 성경을 여러분들이 자세히 읽으면 그것을 여러분들이 발견해요.
이렇게 한 이야기 또는 한 가르침의 단위가 처음에 중요한 말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 되풀이 하는 말로 끝나고 이런 것이 아주 자주 발견이 되어요. 예를 들면 가령 마가복음 1장 1절에 뭐라고 시작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시작을 하지요. 마가복음 15장 39절 클라이 막스에 가면 백부장의 말을 통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이는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마가복음의 클라리막스에 가면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마가복음이 종결이 되어요. 그래서 막가복음 전체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는 책이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바로 복음이구나. 그것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
그런데 마가복음 8:27절부터 31절쯤으로 해서 여기를 분수령으로 해서 여기서 부터는 계속해서 예수가 십자가를 향해서 감. 예수가 고난을 받아야 함을 보여주어요. 이 부분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 이루어지는 거여요.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고 고백을 해요. 그전에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능력의 시위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의 시위 그리고 그의 가르침의 권위 그래서 여기서는 주로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대권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힘 권위를 시위하는 것을 차례 차례 보여주어요. 가르침에 있어서의 힘, 그래서 심지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꼼짝을 못하게 하는 가르침의 힘, 말씀의 권위, 이적의 힘, 사람들을 치유하는 죄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죄 문제가 일으키는 여러 가지 고난의 문제들 문둥병자도 낫고 중풍병자도 낫고 이렇게 시위하는 힘, 심지어 귀신들도 제어하는 힘, 그래서 여기서는 주로 예수의 예수의 말씀과 행위의 권위의 힘을 보여준다고요. 그와 같은 예수의 계시 끝에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서 옳게 고백을 해요. 예수가 메시야이다.
이 고백을 받아서 자기가 어떤 메시야인가? 만민들을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하는 고난 받는 메시야이다. 그래서 여기서 부터 막8장 31절부터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예고해요. 그것의 클라이막스가 십자가의 죽음이어요. 그러니까 예수의 메시야적인 행위는 십자가에 달린 분으로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거여요. 그래서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보고 백부장이 과연 저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는 거여요. 우리가 이런 구절을 이렇게 볼 줄을 알면 아 이 마가복음 전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보여주는 것이구나.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르치고 행했다는 것이 그것이 복음이다. 그것을 보여 주려고 하는데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의 내용은 무엇이냐?
그것은 십자가에 우리를 향한 대속의 죽음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성경의 큰 책 복음서 같은 큰 책에서도 이런 구절들을 발견하지만 이렇게 조그마한 한 단락에서도 이렇게 주제를 처음에 여는 문장과 마지막에 결론문장에 되풀이함으로서 우리에게 여기서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가 무엇이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요. 조그마한 단락에서 바울서신에서도 볼수 있고 복음서에서도 흔히 볼 수 있어요. 이런 것을 인쿠르지오라고 해요.
지금 우리가 여기 보는 마가복음 13:33-37절 까지 조그마한 단락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어디에 초점이 있느냐? 깨어 있으라. 그래서 처음 가르침을 이 말로 시작을 하고 마지막 맺는 말이 이 말로 시작을 해요. 깨어 있으라가 이 단락의 인쿠르지오여요.
자 우리가 이런 것을 많이 발견하는데 이것을 세 복음서를 나란히 놓고 보면 마태복음서는 예수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 마가복음에서 읽은 이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고 비슷한 비유들을 여러 개를 담고 있어요. 이 종말이 인자가 도둑같이 온 비유, 청지기의 비유, 지혜로운 처녀와 바보처녀들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 이런 비유들을 쭉 연달아서 마태복음 25장에 담고 있어요.
반면에 누가는 예수의 종말에 관한 가르침 가운데에 우리가 읽은 이 비유와 마태복음 24장에 담고 있는 비유들을 담지 않고 종말에 잠자지 않고 깨어서 잘 준비해야 된다는 비유 없이 그냥 권면의 말씀만 담고 있어요. 반면에 누가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비유와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비슷한 비유들 아까 이야기한 도둑의 비유····등을 12장에 갖다 놓고 있어요. 일찌감치 먼저 비유들을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의 이 비유도 누가복음에는 아마 12장 쯤에서 찾으면 있을 법하다고 짐작할 수 있지요. 그래서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실제로 눅12:35절을 보십시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으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라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 복이 있으리로다. ”
여기 눅 12:36-38절 까지 보면 막 13장에 있는 비유와 내용이 같은 것을 알게 되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막 13장34-36절 까지가 권면의 말씀 33절 비유가 34절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 이렇게 비유가 있지요. 34-35절 쯤까지가 비유 그 다음에 다시 권면(36절) 홀연히 와서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고 깨어 있으라(36-37절) 이렇게 구조가 되어 있는데 그 중에 비유를 보면 이것이 완전한 비유가 못되고 반쪽자리 비유인 것을 알게 되어요. 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다.
누가복음12장 36-38
눅 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보통 예수의 비유 같으면 처음에 이렇게 시작을 해요. 그래가지고 주인이 왔는데 그때에 종이 깨어 있으면 그 주인을 잘 맞이해 가지고 어떤 복을 누리고 이 종이 게을러 가지고 잠자고 있을 때 주인이 당도했을 때 잠자는 상태로 발견이 되면 어떤 벌을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한 뒤에 그 다음에 권면의 말씀이 있을 터인데 보통 예수의 비유의 후반부가 그냥 없어요. 그냥 35절 부터 권면이 시작이 되는 거여요. 34절 까지만 비유이고 35절 벌써 권면이 시작이 되는 거여요.
여러분들이 아까 읽는 누가복음 12:36-38절 까지 거기를 읽으면 멀리 갔다가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같이 되라. 그래서 주인이 와서 그 사람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라. 왜냐하면 주인이 그 사람을 식탁에 앉히고 식사에 시중을 든다. 이렇게 되어 가지고 마가복음에는 없는 보통 예수의 비유의 후반부가 누구복음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짐작할 수 있냐면 마태는 예수의 종말에 관한 비유들을 나름대로 충분히 기록한 반면에 마가는 굉장히 생각을 해가지고 핵심적인 권면만 주로 담고 있음을 우리가 알게 되어요.
그래서 문지기의 이름을 파수꾼이라고 그러는데 문지기의 비유가 더 맞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문지기의 비유가 원래 지금 막 13:34절과 눅12장 후반부가 합쳐진 것이 원래 예수의 전체의 비유였는데 그것을 마가와 누가가 조금씩 다르게 누가는 전반부가 없어요. 마가는 한 사람이 집을 떠나가는 것부터 시작을 해요. 누가는 돌아오는 것으로 부터 시작을 하지요. 누가는 돌아와서 그 주인이 어쨌다는 것이 없지요. 누가는 주인이 떠나가는 장면은 없지만 돌아와서 종을 발견해서 어쨌다는 것이 있지요. 그래서 마가와 누가의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의 반쪽 씩이다고 보면 되어요. 마가에 문지기의 비유의 전반부가 있다면 누가에 12장 35-38절 비유에 후반부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 되어요. 문지기의 비유를 막13:34-36절과 눅 12:35-38절 까지를 하나의 비유로 생각을 해보면 좋다는 그런 말이어요.
예수께서 그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어떻게 대비해야 되느냐? 주의하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했어요. 뭐냐면 주인이 집을 떠나서 멀리 가면서 그 집의 종들에게 각각 임무를 주고 잘 집안을 꾸려갈 것 특별히 집을 잘 지킬 것을 명하고 갔어요. 갔다가 한참 있다가 다시 돌아 왔을 때 종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잘하고 특히 문지기가 깨어 있다가 주인을 잘 맞아들여서 문을 열어주고 들어가게 하면 그러면 주인이 와서 이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자기가 식사대접을 하는 시중을 들어서 식사대접을 할 것이다. 그 비유여요.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 깨어 있으라. 그런 비유이지요.
여기 종들이라는 말은 신약시대의 종들은 주로 두 형태가 있었다고 그래요. 하나는 법적으로 종이고 주인에게 법적으로 완전히 소유된 자들 그래서 주인이 하나의 상품으로 팔고 사고 할 수 있는 존재들, 법적으로는 아무 권한이 없었어요. 그러기 때문에 혹독한 주인을 만나면 아주 형편없이 대우를 받았지요. 반면에 완전히 주인에 속하기 때문에 주인집의 식구여요. 좋은 주인을 만났을 때는 굉장히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지요. 여러분 유명한 영화 벤허 보셨지요? 벤허 집안의 종들 알지요. 그래서 만약 주인이 후사가 없으면 종이 후사가 되어요. 그래서 종이 주인에 따라서 좋은 대접을 받기도 하고 좋은 대접을 받기도 해요. 이 종은 돈을 모아 가지고 자기 자유를 살 수도 있었어요. 자유인이 될 수도 있었어요. 물론 어렵지만.
또 레위기 25장에 희년의 율법에 따라 원래 모세의 법대로 한다면 매 50년마다 희년 때는 노예들이 전부 해방이 되었어요. 물론 인간의 사악함 때문에 이 법이 잘 안 지켜져 가지고 편법이 마련이 되어 가지고 종들을 잘 해방을 안 시킨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또 희년법을 레위기법대로 그대로 지키면 약자들의 역효과가 다 나타났어요. 그런 일들로도 정확히 지킬 수가 없는 그런 법이기도 했어요. 그런 종들이 있었어요.
반면에 품팔이 종들도 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법적으로 종은 아니나 고용된 사람들 부자 집에 고용이 되어서 일당을 받고 월급을 받고 고용이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법적으로는 종들보다 낳지만 실제로 대접을 받기는 종들보다 못할 경우가 많았어요. 왜냐면 종들이 받는 주인의 보호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런 두 종류의 종들이 있었는데 오늘 우리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전자에 속하는 거여요.
오늘 비유는 초점이 예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깨어 있으면서 인자가 오는 것을 맞이하라는 것인데 이런 유의 비유들 마24장 도둑의 비유 청지기의 비유 달란트의 비유 들은 주인이 가고 없는 사이 주인이 나중에 돌아온 사이에 주인으로 부터 부여받은 각자의 임무를 잘해야 된다. 성실히 해야 된다는데 초점이 있어요. 예수의 재림 때까지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때가 금방일수도 있고 그때가 오래일수도 있고 그러는데 그것에 너무 이장림파 식으로 언제 올지 모르니까 곧 올 가능성이 있으니까 생업에 종사하고 이 땅에서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다 모아서 오시는 주를 맞이하려고 기도나 하고 있자 이러지 말고 각자에게 부여된 일을 충실히 하라. 그런 가운데 맞이하라. 그런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요. 달란트의 비유라든지 청지기의 비유라든지 이런 비유들은 그래요.
그런데 오늘 우리의 비유는 그것보다도 깨어 있으라는 경각심, 늘 다시 오실 주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라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오늘 우리 비유가 조금 전에 13:32절에 바로 그 위절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심지어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니까 그 날을 헤아리려고 노력하지 마라 그 말이어요. 그것은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경륜에 달려 있고 그의 선택결정에 달려 있으니까 그 날은 인간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므로 그 날을 어떻게 헤아리려고 무슨 숫자노름을 하고 여기 앞에 있는 징조들이 지금 세계사에서 일어나고 이런 것을 어떻게 해석해 가지고 그 날이 언제고 몇 시고 헤아리지 말라. 성경의 요한계시록을 뚫고 다니엘서를 뚫고 해서 그 날을 헤아리려고 하지 말라. 심지어 예수께서 말하는 종말의 징조들은 환란이 나고 전쟁이 나고 지진이 나고 핍박이 심해지고 이런 것을 자꾸 자꾸 가지고도 그 날을 헤아리려고 하지 말라. 그 말이어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니까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니까 그 종말도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때에 우리에게 임하게 할 것이다라는 마음으로 안도하라는 말이어요. 그것이 중요한 것이어요.
그 종말이 언제이고 안절부절하는 것은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음이 적은 거여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해서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게 하여서 우리 구원을 완성할 것이다라는 그 안도함을 가지라는 말이어요.
반면에 똑같은 이유로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까 늘 그 날에 대비하고 있으라. 우리의 가장 우리한 때에 하나님께서 그 날을 정하실테니까 그 하나님께 맡기고 안도하라 그랬지요. 그 말은 왠만한 사람에게 뭐라고 들려요? 잊어 버리고 살아도 되는 것이지. 예수의 두 번째 권면은 그러지 말라는 말이어요. 깨어 있으라. 이것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 같아요. 사실은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약간의 긴장이 있는 것이 사실이어요. 그 날에 대해서 안절부절해 가지고 어떤 날짜를 미리 헤아리려고 하는 태도. 이런 것을 하지 말라. 이 말이어요. 그것과 깨어 있으라는 것과 좀 긴장이 되지요. 모순은 아니라도 그런데 둘 다 왜 그러냐면 그 날에 대해서 모르니까 언제일지 모르니까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날짜를 헤아려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그 날짜를 헤아리려고 하면 할수록 안절부절이 되어요. 이장림의 시한부 종말론을 한 번 행각해 보세요.
그러지도 말고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까 그 날을 미리 헤아릴 수 없으니까 잊어버리고 살자. 이 세상이 마치 영원할 것 같이 항상 이럴 것 같이 그냥 살자 그러지도 말라. 깨어 있으라. 종말이 언제라도 임할 수 있음. 언제 임하든지 그 종말에 늘 대비하는 자세로 살라. 그러니까 하나는 안도와 깨어있음. 이 두 가지가 상호 긴장을 이루면서 우리 가운데 있어야 그것이 건전한 믿음이고 종말에 대한 건전한 태도여요. 우선 오늘 초점은 깨어 있으라는 것에 있는데 그것을 보면 우선 여기에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을 이 세상에 두고 멀리 떠날 것을 말을 헤요. 그리고 이 비유로 다시 돌아 올 것을 말해요. 그런데 멀리 떠나고 다시 돌아올 사이 이 세상으로 부터의 부재기간이 충분히 길어서 그 기간 동안에 그의 제자들도 잠들어 버릴 그런 유혹을 느낄 수도 있음. 그래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 그의 교회를 떠난 뒤 그 분이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때까지 그 기간이 충분히 길어 가지고 그의 제자들 중 일부는 잠들 유혹을 느낄 수 있는 만큼의 그것을 우리에게 먼저 이야기가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둘째로 이 이야기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돌아오셔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고 구원이 완성이 됨, 예수가 정말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분임. 그래서 하나님 나라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임도 보여줌.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의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이 되었어요. 그의 치유로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이제 예수가 다시 돌아와서 심판과 구원을 베풀어야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처음부터 시작 때서 종말의 완성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대권자여요.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통치를 담당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분임.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이 되었는데 그 뒤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교회를 떠나 있는 동안이 꽤 긴 기간이 될 것임. 그 기간 동안에 누구는 잠들 유혹을 느끼는데 그렇게 잠들어서는 안 되고 깨어있어야 됨.
그 다음에 세 번째로 그렇게 깨어 있는 종은 누가복음에 우리 비유의 결말대로 한다면 그것이 사실은 이 비유의 가장 놀라운 점이지요. 37절에 어떻게 된다고요? 우리가 예수의 재림 때에 깨어 있으면 그래서 돌아오시는 주를 잘 맞아들이면 주인이 띠를 띠고 그러니까 부엌일을 하기 위해서 앞치마를 입고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나와서 수종을 든다고. 섬긴다는 말은 식탁에서 음식을 대접한다는 말이지요. 여러분들 여기 아마 여러 번 읽으셨겠지만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여요. 얼마나 놀라운 결말입니까? 지금 예수께서 자기와 제자들의 관계를 무엇으로 설정을 하셨어요?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정했어요. 그런데 자기의 재림 때에 그의 제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깨어 있다가 자기를 잘 맞으면 어떤 축복 속에 들어간다고요? 자기가 종노릇하고 그의 제자들 종들이 상전 노릇하는 거여요.
이것은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의 유대사회는 고대 이른바 동방에 속했지요. 고대 동방사회에서 왕과 종의 관계 백성의 관계는 얼마나 엄격하게 구분이 되었어요? 고대 동방의 왕을 막스 베버의 말에 의하면 그런 통치법을 절대군주라고 그래요. 왕이 주인이지요. 동방이 서방보다 군주의 권위를 더 높였기 때문에 동방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사실은 서방에서도 마찬가지여요. 왕이 신하들을 식탁에 앉혀놓고 식탁에서 수종을 든다는 말은 동방에서만 아니라 서방에서도 없는 일이지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이 비유를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놀라운 비유.
여기서 우리가 관찰할 것이 많아요. 하나는 예수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에 대해서 식탁의 잔치의 비유를 듬.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식탁의 풍요로운 잔치로 그렸어요. 왜? 우리 인간들의 결핍으로 부터의 해방 인간들의 제한성으로 부터 해방 하나님의 무한한 무요함에 들어감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다고 그랬지요. 아주 우리에게 익숙해요. 그래서 예수의 재림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부요한 잔치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래서 우리의 모든 제한성을 극복하고 제한성에서 오는 모든 고난들을 극복하고 영생에 이르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식탁에 앉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시종 드는 분이 됨.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상당히 놀라운 비유의 결말인데 별로 놀랄 것이 없어요. 왜? 최후의 만찬 때에 예수께서 바로 이것을 극으로 나타냈지 않습니까? 가령 눅 22:22-27절을 한 번 읽어 봅시다. “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앉히고 식탁에 앉히고 섬겼어요. 수종을 들었어요. 먹는 것 마시는 것을 수종을 들었어요. 그래 가지고 그것을 이 세상의 도와 대조를 했어요. 이 세상에서는 이른바 위대한 자가 왕이 주가 종들을 부리는 자여요. 그런데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서는 큰 자가 섬기는 자 식탁에서 수종 드는 자 자기가 내일 죽음을 당하게 되는데 바로 그 죽음이 이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서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죽음문제를 해결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잔치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만찬의 식탁에서 풍요로운 식탁으로 그리고 자기의 섬기는 몸짓으로 시위를 한 거여요. 그 시위 그 연극을 눅 22장에서는 예수께서 한 말만 옮겼지요. 그런데 그 몸짓 제스츄어를 우리에게 자세히 기록하는 복음서는 요13장이 바로 누가가 말하는 눅 22장의 내가 너희 가운데에 섬기는 자로 있느니라는 말의 그 내용을 그대로 행동을 기록했어요.
예수께서 요13장 최후의 만찬 식탁을 배설하시고 만찬도중 예수께서 일어나셔서 눅 12장에 있는 비유대로 띠를 두르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고 그래서 그들의 죄가 깨끗이 씻긴 상태로 하나님 나라의 그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죄를 씻는다는 것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의 의미를 상징하는 거여요. 그 죽음이 속죄의 제사여요. 이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씻어내는 제사. 그것을 예수께서 극으로 표현을 했어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제자들을 위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의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섬김이어요. 그것을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에 만찬을 배설하시고 그들에게 떡을 떼어주고 포도주를 부어주는 그 섬김으로 표현을 하고 그것을 그들의 발을 깨끗이 닦아주는 종이 하는 일-이것도 유대의 종은 하지 않았어요. 이방 종이나 하는 아주 천한 일이지요-을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하셨어요.
그런데 지금 이 비유에서는 그가 재림 때도 그때에 그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깨어 그를 기다리고 맞을 준비를 하다가 영접하면 바로 그 인자의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될 것임. 그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두 가지를 배웁시다. 첫째 우리가 신앙의 올바른 긴장을 유지하자는 것. 이장림이 나와서 뭐라고 하든지 어떤 달변의 부흥사가 와서 뭐라고 하든지 또는 세상이 어떻게 흉흉하고 무슨 난리가 나고 지진이 나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안절부절하고 날짜를 헤아리고 그러지 말고 그런 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의 주권을 믿고 안도함이 있어야 할 것이고 반면에 우리가 더 내일도 오늘 같고 모래도 오늘 같고 예수가 재림을 한다는 것 벌써 예수의 가르침이 이천년이나 지났는데 우리 벧후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이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이 세상에서의 가치나 열심히 추구하면서 살자. 이런 유혹을 받으려고 할 것 같으면 다시 한 번 각성을 해서 종말이 임할 것임 곧 임할 수도 있음. 그 종말이 임할 곳에서는 가치의 완전힌 뒤집어짐 가치들의 전도가 일어나니까 우는 자에게 위로가 있고 배고픈 자에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이 땅에서 부요함을 누리고 권세를 누린 자에게 눅 6장의 평지설교에 의하면 이 땅에서의 가치들이 완전히 뒤집어 진다고요.
그러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깨어있다는 말은 이 세상의 가치들에 혼을 뺏겨 가지고 이 세상의 가치들을 절대화해서 그것에 혼을 빼주고 그것을 얻으려고 발버둥치고 바울이 고전 7장에서 우리에게 충고한대로 고전7:29-30절 말씀을 봅시다.
“고전 7: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
이렇게 주의 재림이 확실히 있고 그 재림이 언제라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면 우리가 깨어 있게 되어요. 주를 맞을 준비를 한다고요. 깨어있음은 이 세상의 가치들을 절대화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좀 가난하다고 울고불고 할 것도 없고 그래서 돈만 벌면 다 될 것 같이 돈에 혼을 다 빼주어 가지고 그것을 무슨 수단 방법을 써서 벌려고 그러지도 말고 돈이라는 수단을 가졌다고 해서 또는 이 세상에서 조금 성공을 했다고 해서 마치 영생을 얻은 양 웃고 과시하고 그러지도 말고 웃는 자들은 웃지 않는 자 같이 이 세상의 가치들을 과격히 상대화해서 이 가치들로 부터 자유로와지고 재림과 더불어 있을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대비하고 있으라. 그 말이어요.
우리 신앙생활이 이 두 가지가 적절히 긴장을 이루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되요. 안절부절하지도 말고 반면에 종말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이 전부인양 이 세상의 가치들에 혼을 빼주고 이 세상과 타협하고 살지 말고 주를 생각하면서 주의 오심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인의 도를 따라 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로 여기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누가 주여요? 섬기는 자가 주임. 아까 읽은 눅 22장에도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 나라 완성된 곳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섬기는 자이심. 그것은 벌써 이미 이 세상의 역사속에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우리가 참여하고 사는 거여요.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는 될 수 있으면 우리의 시민권이 하나님 나라에 있으니까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니까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되어요. 이 세상에서의 삶의 원칙은 자기주장 함. 남에게 군림함이어요. 그런데 그것은 항상 고난을 가져온다고 그랬지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원칙은 남을 섬김. 종노릇함. 그것이 구원의 완성이어요. 예수의 비유의 끝이 눅 12장대로 바로 예수 스스로가 최후의 만찬 때 그림으로 연극으로 시위했듯이 우리를 위해서 종노릇하는 주의 오심을 보여줌으로서 우리에게도 바로 그러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종노릇함에 힘입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도 서로에게 해야 할 그래야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이루어짐. 그런 것을 우리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이 비유로 오늘 배우게 된 거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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