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걷는길/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비유(9) - 도둑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 (김세윤 교수)

꿈심는농부 2017. 3. 3. 03:53

 

도둑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

 

 

우리가 지금 예수의 비유들을 차례로 공부해 나가고 있는데요. 최근에 우리가 몇 번 공부한 것은 종말의 재림에 대해서 준비하라는 그런 가르침을 주신 비유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비유가 오늘 공부하는 도둑의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24장42-51절입니다.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오늘 두개의 비유들을 잘 읽었습니다. 하나는 도둑의 비유로 42-44절 까지이고 또 하나는 청지기의 비유로 45-51절입니다. 우선 도둑의 비유를 보면 이것이 소위 예수의 범죄의 비유시리즈입니다. 예수의 비유에 범죄자들을 등장시켜서 하는 비유들이 꽤 많이 있지요.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노상강도가 등장하는 비유여요. 예수께서 막2장 27절에 보면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함을 더 강한 자가 강한자의 집에 침범을 해서 그 강한 자를 꽁꽁 묶어서 그 가솔을 심판하는 것으로 비유를 했지요. 그래서 스스로 더 강한 분으로 강한 자 사단의 집 사단의 왕국에 침입을 해서 사단을 묶고 사단의 권세아래 놓여있는 우리를 해방을 시키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치유하는 사역을 설명했지요.

 

또 어떤 집에 침범해서 그 속에 있는 가솔들을 침탈하는 그런 비유로 설명했어요. 또 예수께서 땅위에 재물을 쌓아두지 말라. 왜 그러냐면 도둑이 와서 도둑질해 간다. 하늘에 재물을 쌓아두라. 그 곳에는 도둑이 와서 침탈할 일도 없고 좀이 먹을 일도 없다. 도둑이 등장을 하지요.

 

이와 같이 예수의 비유들의 도둑, 침범하는 자. 이런 자들이 등장을 해요. 이런 것들을 범죄비유들이라고 편리하게 이름을 붙이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잘 시사해 주고 있어요. 그 당시 아마 삶이 굉장히 어려웠던가 보아요. 당시의 시대상황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에 의하면 특히 갈릴리는 삶이 굉장히 어려웠던 것으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자연히 도둑들이 성행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께서 도둑을 자료로 삼아서 비유를 드는데 사람들이 금방 무슨 말인가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비유들을 대개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의 체험에 너무 가까와서 사람들이 금방 깨달아요. 그런 것들을 자료로 삼아서 하지요. 씨 뿌리는 장면 농사에서 자료를 얻는다든지 또는 어부에서 자료를 얻는다든지 주로 이런 것들이 많아요. 어쩌다 빈도가 조금 적은 데 행상에서도 한두 번 자료를 얻고 그러는데 이번 공부하는 비유는 도둑의 비유여요.

 

예수께서 자신이 최후의 심판자로 구원의 완성자로 그러니까 인자로 오실 것을 도둑의 옴의 비유에서 지금 설명하는데 여기서 세 가지 요점을 금방 깨달을 수 있지요. 하나는 도둑이 오는 것은 기대하지 않은 때에 그것은 전혀 예측할 수 없음이 하나의 요점이고, 두 번째 요점은 그러기 때문에 도둑이 옴에 대해서 늘 대비하고 있어야함. 세 번째는 대비하고 있지 않을 경우는 손해가 막심할 것임. 이런 것이지요.

 

이런 우리가 도둑과의 일상적인 경험을 자료로 삼아서 인자가 오는 것은 도대체 예측할 수가 없음,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늘 인자의 오심에 대해서 대비하고 있어야 될 것임에 대해서 말을 하지요. 그렇게 대비하고 있을 경우에는 오심이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의 날이어서 우리에게 도리어 축복의 시간이 될 것이나 대비하고 있지 않을 경우는 도둑에 대해서 대비하고 있지 않으면 그 주인이 집안의 재산을 다 잃어버리듯이 그래서 큰 손해를 보듯이 최후의 심판자로 오시는 주에 의한 심판을 받게 되어서 엄청난 손해가 있을 것임을 지금 경고하는 것이지요. 이 뜻은 우리에게 너무 분명해요.

 

그런데 예수가 인자로서 오심을 도둑의 옴과 비유했는데 곰곰이 생각을 하면 이 세 가지 점에서는 비슷한 점이 있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어요. 도둑이 오는 것과 주께서 오시는 것 두 가지 차이가 있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세 번째 요점 예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심판으로 연결이 되어서 큰 손실을 얻으나 예비하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오심이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축복을 의미하니까 거기에 차이가 하나 있지요.

 

또 하나의 차이가 있는데 도둑의 옴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사이에 또 하나의 차이가 도둑의 옴에 대해서는 언제 오는가 그 시점만 불확실한 것이 아니고 도대체 올지 안 올지 그것도 불확실해요. 그것도 불확실해요. 예수의 오심에 대해서는 언제 오실는지 모르는 그 시점에 대해서는 불확실성이 있지요. 그러나 예수의 인자로서 최후의 심판자로 구원의 완성자로 오심은 확실한 거여요. 그것이 큰 차이지요. 그러니까 도둑은 안 올수도 있기 때문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불확실성도 있지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그 점에도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에 도둑에 대한 대비는 좀 느슨할 수도 있어요. 느슨해도 조금 덜 바보스럽다 그렇게 생각이 되겠지요. 그러나 여기 예수의 오심은 너무나 확실한 거여요. 거기에는 불확실성이 없어요. 분명해요. 단지 언제 오실지만 예측할 수 없어요. 그런데도 예수의 인자로서 오심을 대비하지 않으면 얼마나 바보스러워요?

 

그러니까 도둑의 비유는 한편 예수의 오심과 도둑의 옴이 비슷함으로 해서도 우리에게 경고가 되지만 거기에 있는 차이점으로 해서도 우리에게 더욱 경고가 되지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로서 오심은 너무나 확실한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됨을 여기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아까 제가 처음 비유를 소개할 때 예수께서 그의 재림에 대한 깨어 대비할 것을 가르치는 여러 가지 비유들을 했는데 그중에서는 여러분들 살전 5:2절을 읽어 봅시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니라.”

 

여기 주의 날이 주께서 오셔서 취후의 심판을 벌이고 우리 믿는 자들의 구원의 완성할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한다고요. 이 종말에 대해서 유대인들도 가르쳤지만 종말에 옴에 대해서 도둑같이 온다. 이 그림은 유대문서에 나타나지 않아요. 오로지 예수의 비유에 처음 나타난다고요.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곳에서 바울이 지금 우리가 마태복음 24장에서 보는 그 예수의 비유를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음을 말을 해요. 바울서신들에는 예수의 말씀들이 잘 인용되어 있지를 않아요. 그러나 자세히 보면 더러 예수의 말씀들이 간접적으로 반영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살전5:2절이어요.

 

그런데 바울만 그러는 것이 아니어요. 벧후3:10절을 읽어 봅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 거기도 주의 날이 도둑같이 임한다고 말을 한다. 계시록3: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 부활하신 예수께서 교회에게 하는 경고 그것은 생전에 예수께서 교회에게 했던 경고와 똑같지요? 마지막으로 계시록 16장 1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 여기서도 부활하신 주께서 교회에 다시 한 번 생전의 경고를 되풀이 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도적같이 온다. 모든 곳에서 언제 올지 예측하지 못하는 그때에 온다. 준비된 자들에게는 그때 구원의 완성의 축복의 순간이겠지만 준비되지 않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심판의 시점이 될 것임. 그러니까 깨어 있으라는 것 잠자지 말라는 것 술 취해서 흐리멍텅해서 그러지 말라는 것. 그 다음 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의 도를 새롭게 하고 해야 할 것을 늘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두 번째 비유 청지기의 비유로 넘어가기 전에 제가 도둑의비유와 예수의 범죄의 비유 시리즈 중에 라고 했는데 여러분 들 좀 불편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왜 이렇게 범죄자들을 등장시켜서 비유로 나왔나? 거기에 대해서 도덕적인 판단을 안 하는 거여요. 지금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할 때 그 여리고 성을 가는 중에 이 사람을 죽도록 때리고 돈까지 다 훔쳐 갔는데 그 놈 나쁜 놈이다. 이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강도를 만난 자를 누가 어떻게 도왔는가를 말함으로서 제자들에게 이웃을 사랑해야 됨을 말하는데 지금 여기 도둑의 비유에서도 도둑의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도둑을 범죄자 시리즈를 또 여기 눅18:1-8절까지 에서는 하나님께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로 매달려야 됨을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로 들어요. 불의한 재판관에게 한 과부가 자꾸 가서 호소함으로 결국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내는 그것을 예로 들어요. 얼핏 보기에는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으로 좀 비유를 했단 말이어요.

 

조금 더 내려가면 눅19장11-27절 가지에 므나의 비유에서 장사를 잘못한 잘하지 않은 종을 주인이 악한 종이라 하고 심하게 심판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들에게 큰 이익을 남기라는 다분히 자본주의적인 정신을 고취하는 것 같은 그런 비유를 들고 있어요. 이런 비유 모든 비유들을 대할 때에 아마 여러분들은 다 신앙이 성숙해서 그럴일 없겠지만 거기에 요점은 우리로 하여금 그 곳에 등장하는 도둑 불의한 재판관 불의한 청지기 이런 사람들을 본받으라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아주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의 경륜과 직접 연결되는 그런 생생한 자료로 가르침의 재료를 삼아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구원 그의 심판 이런 진리를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거여요.

 

그래서 오늘 여기서 본 바와 같이 도둑의 비유에서 특별히 도둑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 도덕적으로 민감성이 없었다던가. 그래서 이런 도둑을 내세워서 종말에 잘 대비해야 될 가르침을 주신 것이 아니라 종말에 우리가 잘 대비하고 있어야함을 잘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취하려고 하다보니 도둑을 재료로 삼아서 가르침을 주시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러분들 간에는 그런 사람이 없지만 가끔 평신도들 중에서도 전문신학서적을 우리 신앙을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신학을 좀 더 평신도에게도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문신학서적을 읽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그런 분들이 읽는 책 중에 바로 우리 복음서들에 예수의 말씀들로 예수의 가르침들로 쓰여 진 나타나는 것들이 사실은 예수가 가르치고 예수가 쓴 말들이 아니고 나중에 교회가 지어내 가지고 예수의 입 속에 넣어서 마치 예수가 했던 말 가르침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쓰여 져 있는 신학책들이 가끔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 가끔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여기 이야기한 범죄자 시리즈 비유들 만약에 예수께서 자기의 인자로서의 오심을 도둑의 옴에 비유해서 가르치지 않았다면 교회가 베드로가 야고보가 요한이 그런 비유를 만들어 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 자신이 이런 비유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만약 베드로나 요한이 이 비유를 만들었다면 베드로나 요한이 예수를 도둑같이 만드는 것 아닙니까? 불의한 재판관과 같이 만드는 것 아닙니까? 도저히 교회가 이런 비유들을 만들어 낼 수가 없지요.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어요?

 

그러니까 이런 자료들을 이렇게 생각해 보면 범죄자 시리즈 이것은 오로지 예수만이 할 수 있는 예수만 가르칠 수 있는 비유들이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 복음서의 자료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정확히 예수로 부터 직접 듣고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긴 자료들임. 그래서 우리 복음서에 있는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들이 아주 신실하게 우리에게 전승된 자료임을 알게 되어요. 가끔 경솔한 신학자들이 여러분들 이런 책을 읽었다면 우리 복음서에 신뢰할 만한 예수의 말씀들이 적다는 그런 책들이 더러 있는데 거기에 별로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자 그러면 두 번째 비유 여기 청지기의 비유 마24:45-51절 까지 계속해서 깨어 종말에 대해서 예수의 재림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어야 될 것을 말하지요. 여기는 이제 종들 중에 우두머리 종과 나머지 종의 관계로 지금 비유로 들고 있어요. 그러니까 주인이 이제 종들 중에 대표자를 세워서 청지기지요. 그로 하여금 밑의 종들을 질 거느리고 그들로 하여금 주인의 가사를 잘 돌보도록 그렇게 책임을 주었는데 그 청지기가 주인이 없이 주인대신 종들을 잘 거느려서 가사를 잘 다스려야 할 때에 두 가지 방법이 있지요.

 

한 신실한 종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때를 따라 자기 밑에 있는 종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고 그 집안을 잘 다스려요. 신실하지 못한 종 악한 종은 밑의 종들을 자꾸 때리고 학대하고 자기는 술친구들과 더불어 흥청망청 사치하고 향락을 누리고 그렇게 살아요. 이 악한 종이 왜 그렇게 삽니까? 주인이 더디 돌아올 것이라 해서 주인이 언제 올지도 모르고 아마 빨리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 마음이 방자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까 도둑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주인이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때에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예측하지 못할 그 시점에 이르러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에게는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이제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을 보고는 자기 전 재산을 관리하도록 맡긴다. 이 악한 종에게는 엄중한 심판 벌줌이 있다고 말을 하지요.

 

여기 재미있는 것은 첫 번째 종들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들이라고 표현을 했고 이렇게 주인의 옴에 대비를 못하고 주인이 떠나 있는 동안에 주인의 뜻을 받들지 못하는 자에게는 악한 종이라. . 그러니 그 마음에 바보 같은 환상을 갖게 되고 옳지 않은 생각을 한 사람으로 그렇게 여기 그리고 있어요. 이것은 예수께서 특별히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던 것 같아요.

 

우선 종들 중에 우두머리를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비유자체에서도 우리가 이 비유는 주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목사들 장로들 선생들)에게 의도하고 주신 비유 같다는 인상을 받지요. 예수 당시의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 등 사도들에게 주로 염두에 두고 주었던 비유 같아요. 그것은 특히 눅 12:41절에 보면 바로 지금 본 도둑의 비유를 듣고 베드로가 여짜오되 예수께서 이 비유를 우리들 사도들에게 하신 말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에게 하심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 청지기의 비유를 한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누가복음은 더 확실히 청지기 비유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주어진 비유임을 알게 되어요. 교회지도자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땅위에 계시지 않는 동안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잘 맡아 관리하는 위탁관리인들임. 그런데 그 주인이 이제 와요. 와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위탁관리 잘했는가 안했는가를 심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때 위탁관리를 잘했으면 칭찬을 받고 조그마한 가사를 돌보는 임무에서 주인의 모든 재산전체를 관리하는 임무를 받는다. 반면에 위탁관리를 잘 못한 종에게는 엄중한 문책이 있고 그런데 그 문책에 대한 그림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기 마태복음 24장 51절 엄히 때리고 처벌해서 그들이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지옥에 떨어짐을 주로 말하는 그림이지요.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저주의 땅에 떨어짐.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다는 말은 주로 지옥에 떨어짐을 말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주께서 부활승천하시고 다시 우리에게 오실 때까지 그 기간 동안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잘 위탁관리를 해야되는 데 그 지도자들이 위탁관리 하는 것이 주로 무엇입니까?

 

45절이 사람들에게 같은 종된 자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 이것은 복음으로 잘 가르치는 일을 비유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지도자들의 주된 임무가 주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재림할 때까지 그 교회부재기간에 땅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잘 위탁 관리하는 교회지도자들이 주로 할 일이 무엇이냐면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영의 양식을 잘 먹이는 일 그것이 주된 일이어요. 그 일을 잘 했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 일을 잘못하면 큰 벌을 받는 것이지요. 그 일을 잘해서 칭찬을 받는 경우는 주인의 모든 전 재산을 관리하게 된다. 그러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이지요.

 

마태복음 19:28절을 한 번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때에 교회지도자들 지금 예수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의 주권에 참여해요. 예수께서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통치하고 그의 주권에 참여하게 되어요.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어요. 아 그러니까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의 부재기간 동안 그것을 맡아 신실하게 그 일을 하면 예수의 주권에 동참하고 예수의 심판에 동참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자신들이 심판을 받아 영원한 죽음의 땅에 떨어지고 그렇게 된다. 그 말이어요.

 

이 예수의 가르침도 이 비유도 바울사도가 그리고 신약의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계속 이어받아 가르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요. 우리가 잘 아는 고전 4:1-5절을 보시겠습니다.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바울이 자기와 아볼로와 다른 사도들을 청지기들로 교회를 잘 위탁 관리하도록 위임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충성 신실함이어요. 주께서 오실 때에 자기를 청지기들이 그의 임무를 신실하게 감당했나 안했나 판단이 있고 신실하게 했을 경우에는 주로 부터 칭찬을 받는다고요. 지금 우리가 읽은 비유와 사실 얼마나 가깝습니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마태복음 24장에 있는 청지기의 비유를 거의 고스란히 지금 자기와 아볼로에게 적용을 하고 있어요.

 

벧전4:10절도 그런 것이어요. “각각 은사를 맡은 사람이······· 청지기들로 봉사하라.” 벧전 5:2절이 더 가깝습니다. 1-2절을 읽읍시다.

 

“벧전 5: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베드로도 지금 예수의 이 가르침을 다시 자기가 세운 교회의 장로들 대표들 지도자들에게 그대로 지금 전달하고 있어요. 첫째 그 임무를 신실하게 하라. 둘째 섬기는 자세로 하지 군림하는 자세로 하지 말라. 마24장의 비유에 악한 종은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을 마구 때리고 자기는 자기 친구들과 더불어 흥청망청 마시고 그런 자세로 하지 말고 섬기는 자세로 하라. 이렇게 베드로도 지금 예수의 비유를 잘 배워서 자기가 세운 지도자들에게 잘 전달해주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오늘날 우리 교회에 세워진 지도자들 목사들 장로들 집사들 다 지금 예수의 비유대로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서 임무들을 다 맡았어요. 그래서 예수가 오실 때에 우리 각자에게 물음이 있다고요. 주께서 우리 각자에게 책임을 묻는다고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각자에게 주신 임무를 신실하게 감당했나 안했나 책임을 물어요. 특히 교회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잘 가르치는 것 가르침을 주는 자들이 특히 중요하다고요. 그러지요.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에게 특별히 강조하는 바가 그것이지요? 목사들이 정말로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는가? 그리스도의 진리를 제대로 가르치는가? 엉터리 복음 엉터리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주면서 그들의 신앙을 왜곡하고 그들의 제자들을 헛되게 만들지 않았는가? 책임추궁이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악한 종의 태도는 남 위에 군림하는 태도 스스로 흥청망청 대접을 받고 잘 지내려는 그런 태도 이런 목자들이 우리 가운에 얼마나 많아요? 우리 스스로가 이런 목자들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되지요. 그래서 두 번째 청지기 비유는 특히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비유들로서 우리들에게 맡겨진 양떼를 어떻게 잘 돌보는가? 어떻게 잘 복음의 진리로 가르치고 잘 섬기는 태도로 직분을 감당하는가? 이것을 생각하게 되어요. 책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되어요.

 

이 비유들이 그러니까 근본 의미는 주의 재림 때를 우리 각자가 준비하도록 도둑의 비유에 대해서는 각자가 신실하게 믿음을 유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우리 삶을 잘 순종하면서 살아가야 함을 말했다면 두 번째 청지기의 비유는 우리가 교회에서 각자 직분들을 맡은 자들로서 그 직분을 잘 감당해야 됨. 신실하게 감당해야 됨을 말했어요.

 

그러나 이것과 함께 본 것은 이 두 비유들이 바울은 어떻게 이 비유들을 해석해 가지고 교회에 가르치고 베드로는 또 어떻게 이 비유들을 해석을 해서 교회에 가르치고 이런 것을 우리가 보았어요. 그래서 여기서 두 가지를 교훈을 얻지요.

 

하나는 얼핏 보기에는 신약의 공관복음을 지나 가지고 저 서신들로 가면 도대체 예수의 말씀이나 가르침에 전혀 안 나타난 것 같아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사도들의 가르침에 예수의 말씀들과 비유들 가르침이 다 들어가 있어요. 정말 예수의 참된 제자들로서 예수의 가르침을 잘 이어 받아 가지고 자기들의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음을 우리가 이번 시간에 찾아보았어요.

 

이것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가르칩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예수의 이 가르침을 잘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제자들에게 우리의 양떼들에게 잘 전수해야 됨을 우리가 배웠어요. 도둑의 비유가 제일로 유명한 비유라고 그랬지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바울도 가르치나 베드로도 가르치나 요한계시록에도 두 번이나 나오나? 이것이 우리이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신약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오심에 대한 관심 그것에 대한 기대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에 대한 강조 그것이 얼마나 컸는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잖아요.

 

우리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물론 작년에 시한부 종말론 열광주의자들도 있었지요. 그것도 잘못되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반대가 아닙니까? 여기 악한 청지기 같이 주께서 오시는 것이 더디니까 이 세상이 전부인 것 같이 흥청망청 이 세상을 즐기고 신앙이 게으르고 제자도에 대해서 게으르고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도 베드로도 요한계시록에서도 자꾸 되풀이 해서 이 예수의 도둑의 비유가 가르쳐졌다는 것은 우리가 종말에 대한 기다림 기대 그것에 대한 준비 그런 자세로 살아야 올바른 삶임을 가르쳐 주고 있잖아요? 그래서 바울이 고전 7장에서 때가 단축되었다고 그래서 종말이 가까옴에 대한 늘 마음을 가지고 갈라고 가르치지요. 우리 더 앞으로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