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걷는길/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비유(6) - 그물의 비유 (김세윤 교수)

꿈심는농부 2017. 3. 3. 03:51

 

그물의 비유

 

 

오늘은 그물의 비유 마태복음13:47-50절입니다.

 

“마 13: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지반 번에 두 주전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공부한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였지요. 오늘 그물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짝을 이루는 비유여요. 이렇게 둘씩 둘씩 짝을 이루는 비유들이 있다고 그랬지요. 지난 번의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도 이렇게 짝을 이루어요. 비슷한 가르침 비슷한 요점을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슷한 가르침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비유들의 짝이 이렇게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짧은 비유는 지난 번에 공부한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짝을 이루어요.

 

그런데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농업사회에서 얻은 비유이지요. 그런데 오늘 보는 그물의 비유는 어업에서 얻는 비유이지요. 그런데 이 갈릴리 예수의 활동 무대가 주로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무대였지요. 갈릴리의 예수의 활동무대에서 예수의 청중들이 아마 가장 많이 종사한 직업이 두 가지일거여요. 농업이고 어업이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의 청중들이 가장 쉽게 즉각적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삶의 현장에서 얻어낸 비유들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쳤어요.

 

그런데 그물의 비유를 우리가 생생하게 연상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사건이 1986년에 벌어졌어요. 여러분들이 신문에 난 것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1986년에 바로 그 갈릴리 호수 바다에서 예수시대의 고기배가 아주 고스란히 별견이 되었어요. 조금도 망가지지 않고 아주 고스란히 발견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고기배가 어느 정도로 크냐면 길이는 10미터 폭은 3미터크기의 고기 배였는데 현대 과학적인 연대측정법으로 보았을 때에 예수시대의 고기배여요. 그래서 어떤 성급한 사람들은 혹시 예수께서 베드로나 이런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탔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훨씬 우리에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바로 그의 제자들과 그런 배들을 타고 다니면서 갈릴리 호수들을 건너기도 하고 그런 배들을 타고 고기 잡은 제자들 베드로나 안드레나 요한이나 이런 야고보나 제자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면서 고기 잡는 언어 제자들을 예수께서 뽑아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웠단 말이어요. 그것도 고기 잡는 어업에서 나온 그림을 사용했어요.

 

오늘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도 그물의 비유로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야고보와 요한의 형제 세베대의 집안에 고기잡이에 대한 우리 복음서들의 간단한 진술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 같이 고기잡이가 그 당시가 요새말로하면 중소기업으로도 성행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주로 가내 가족중심으로 고기잡이가 이루어졌지만 좀 돈이 있었던 집은 배를 여러 척을 가지고 일꾼들을 고용해서 고기잡이를 했던 것 같아요. 야고보와 안드레 요한 세베대의 아들들이 바로 그런 중소기업 가정의 아들들이어요. 그래서 이 고기잡이가 상당히 위험하기도 하고 아주 어떤 때는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려야 하는 직업이기도 했지만 돈벌이는 꽤 되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거기에 종사하는 것이 적어도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중산층으로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난 1986년에 발견된 그 배에도 그물을 내리는 추가 함께 발견이 되었어요. 오늘 그물의 비유에서도 그것을 상상을 해야 되요. 요새말로하면 바다에서 하는 그것을 저인망이라고 하지요. 그물을 추를 달아서 바다에 내리고 양쪽 끝에 한 쪽은 한 배가 이렇게 끌고 가서 고기를 다 잡는 그런 방법을 우리가 상상을 해야 되어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 같으며 바다에 이렇게 그물을 내려서 쭉 그물을 끌고 육지로 가면 그 안에 온갖 고기들이 가득차서 올라오는 거여요. 그래서 이제 여기 그물에 우리 번역이 좋지 못합니다만 가득하매 여기 요점이 어디가 있느냐면 그 요점이 잘못되었어요. 요점은 뭐냐면 그물에 온갖 고기가 가득하매 그래요. 거기에 요점이 있는데 불행히도 온갖 고기라는 말이 빠져 버렸군요. 온갖 고기 그 고기에 먹을 수 있는 고기도 있고 못 먹는 고기도 있고 온갖 고기들이 다 잡히는 거여요. 하나님 나라가 그런 것 같다. 온갖 고기가 다 그물에 끌려오는 것 같다. 온갖 고기가 다 그물에 다 끌려오는 거여요. 초점이 온갖 고기에 있는데 마침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분 같다.

 

그런데 가령 구약의 레위기 11:9-12절 같은데 보면 생선 물고기 중에서도 어떤 물고기는 불결하니까 먹어서는 안 되고 하는 구절이 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약의 법을 따라 어떤 물고기들은 먹어서는 안 되어요. 부정하니까.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 같냐? 그물을 내려서 온갖 물고기를 다 걷어 올리는 것 같다. 그 속에는 부정한 것도 있고 먹을 수 없는 것도 있고 또 좋은 것도 있고 그래서 육지에 다 끌어올려서는 거기서 어부들이 고르지요. 그래서 먹을 수 있는 좋은 고기들은 집에도 가져가고 시장에 팔기도 하고 먹을 수 없는 것 불결한 것 부정한 것은 내버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끝에도 하나님 나라의 완성 때도 그러하다. 그때에 천사들이 와서 의인과 악인을 가른다. 아까 그물의 비유와 짝을 이루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의 공통점들이 무엇입니까? 크게 두 가지 둘 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지금 예수와 더불어 여기 역사속에 와서 우리 가운데에 실제로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관한 것인데 두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하나는 밀과 가라지가 한동안 공존해요. 그런데 여기 그물의 비유에서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같이 있어요. 자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과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자녀들과 실제로는 사단에 속하나 겉으로 형식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가라지 같은 또는 좋지 않는 고기 이것이 공존함. 이것이 하나 공통점이어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역사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종말에 완성이 될 때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과 사단의 자녀들이 공존함.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러나 종말에는 분명한 가름이 있음 심판이 있음,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판명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고 나쁜 고기 또는 가라지들은 심판의 불에 던져짐, 그래서 분명히 그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있음, 이 두 가지가 크게 공통점이어요. 그래서 이 두 비유가 비슷한 내용을 가르치는 짝을 이루는 비유라고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와의 차이가 있다면 강조에서 차이가 있어요. 그것은 여러분이 자세히 봐야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강조점은 그러니까 억지로 종말 전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단의 자녀들을 자꾸 분간 할려고 하지 말라. 그렇게 하다가는 밀 가지도 다칠 수 있다. 거기에 강조점이 있어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그물의 비유는 이렇게 한동안 공존할 수 밖에 없음이 미리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을 해서 인간의 힘으로 악을 자꾸 제거해서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이룰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강조점이 그것에 있었어요.

 

여기서는 종말에는 분명히 가름이 있다. 분명히 심판이 있다. 이 둘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악한 나쁜 고기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는다. 심판의 분명함, 확실함이 거기에 강조점이 있어요. 그물의 비유는 . 그래서 약간의 강조점이 차이가 있어요. 비슷한 내용을 가르치는 이 비유들이 차이가 있다. 그래서 그물의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요한계시록 21:27절 종말에 새예루살렘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시민이 될 새 예루살렘은 어떠하냐면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그물의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비하면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어요.

 

자 그러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공통점에서 우리가 두 가지를 배워야 되어요. 교회는 믿음으로 죄를 회개함으로 사단의 통치영역에서 벗어나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함으로 그 고백으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역으로 들어왔어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교회여요. 이 안에 교회멤버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이 속에 밀도 있고 가라지도 있고 좋은 고기도 있고 나쁜 고기도 있어요. 이 소리는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나의 제자가 아니다. ”라는 것을 연상케 해요.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실제로는 예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의 자식들 그러니까 사단이 통치하는 세상의 자식들일 수 있음.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늑대가 교회 공동체 내에도 있을 수 있음. 그러니까 아주 관대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요새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교회 안에 있으면 다 그리스도인이고 교회 안에 있으면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없다. 이 말이어요. 또는 옛날 서양에 이른바 기독교 국가 크레스텐돔(?)의 사상에 의해서 기독교국가에서 났고 기독교를 고백한 부모 사이에서 났고 교회에서 세례 받았고 하면 다 그리스도인이다. 그럴 수 없다. 이 말이어요. 그것을 좀 더 제도화된 것이 카톨릭 사상이지요. 교회 안에 있으면 다 구원이 보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의 모습인 교회 안에는 밀도 있고 가라지도 있고 좋은 고기도 있고 나쁜 고기도 있으니까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다.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 고백한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 수 없다. 이 말이어요. 그러니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자 예수를 뒤 따라가는 자 그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 삶에 선함이 믿음이 사랑이 소망이 확실히 나타나는 자 예수께서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 그러니까 이렇게 실재적으로 구체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여요. 그런데 교회 내에는 형식적으로는 믿음을 고백하고 주여 주여 부르지만 그 주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열매를 맺는 가라지도 있고 나쁜 고기도 있고 그런데 그것이 한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어떤 유혹을 자주 받습니까? 특히 믿음이 돈독한 사람들. 하나님 나라에 열성이 있는 사람들이 어떤 충동을 받아요? 어떻게 교회 내부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 가라지들 나쁜 고기들 이런 것들을 뽑아 내버리고 갈라내어 버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가 좀 더 거룩하고 좀 더 의롭고 좀 더 사랑이 넘치고 순결하고 이렇게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런 충동을 자꾸 느껴요.

 

여러분들 어제 신문엔가 오늘 신문엔가 무슨 목사가 하여간 요새 사이비 교가 많으니까 그런데 신문에서는 그런 것을 분명히 안 하니까.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목사라는 이름을 붙이면 다 우리 기독교가 뒤집어쓰게 되었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시는지 알겠어요. 어떤 목사가 자기 양녀와 교회 젊은 신도들을 지난 10년 동안 상습적으로 강간해 왔다고 해서 체포되고 구속이 되었다는 기사 여러분들 읽어 보았어요. 그러니까 몇 년 전에 목사가 부동산 관계로 다투다가 장로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지요. 목사가 강간하지를 않나 사기를 하지 않나 살인을 하지 않나 여신도들을 유흥가에 팔아먹지를 않나 목사가 그러면 신문에 나는데 장로들은 안 그렇습니까? 그런 짓을 해서 붙잡히는 죄인들 가운데 장로들도 많아요. 그리고 일반신도들도 마찬가지여요.

 

그러니까 우리 교회 안에 목사라는 자도 장로라는 자도 신학자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도 여기 지금 예수의 비유에 가라지에 해당하고 나쁜 고기에 해당이 된 자가 많아요. 이런 것을 볼 때 신문에 한 번 나면 그렇지 않아도 반기독교적인 감정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저 따위니 뭐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욕이 다 돌아가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도의 길이 다 막히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데 그뿐입니까? 그런 자들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암적으로 작용을 해요. 영적으로 아주 나쁜 분위기를 형성해요. 나쁜 고기가 우리 가운데 있으면 거짓말하고 시기하고 간음하고 남을 헐뜯고 분쟁을 일으키고 이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 우리의 공동체가 망가지는 거여요. 경건성이 망가지고 신뢰가 망가지고 사랑의 관계가 망가지고 평화가 깨지고 바울은 그것을 뭐라고 표현을 해요? 고전 5장 우리 공부할 때에 아주 험하게 간음한 놈을 내어 쫓으라.

 

고전 5장 한 번 읽어 보세요. 자기 아비의 아내를 취한 이 음행한 자를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 왜 그래요? 5장 6절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이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예수의 누룩의 비유는 긍정적인 의미로 썼어요. 누룩이 그 하나님 나라의 힘 변화의 힘으로 그런데 바울은 반대로 누룩을 악의 작용 그런 나쁜 고기 하니까 이때는 우리 속담이 생각납니다. 미꾸라지 하나가 온 방죽을 더럽힌다. 나쁜 고기 하나가 교회 공동체에 우리 속에 지금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표현인 교회 공동체 분위기를 완전히 시악하게 만들고 더럽게 만들어요. 바울은 그런 자를 어쩌라? 내어 쫓으라. 자 우리가 그런 충동을 느끼지만 그래야 한다고 지금 여기 바울은 고전 5장에서 가르치고 지난 번에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8장에서도 타이르고 말을 안 들으면 출교하라. 그런 가르침도 주시지요.

 

그러나 반면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에서는 정 반대로 말하는 것 같아요. 그것이 한동안 종말에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가를 때까지 공존할 수 밖에 없음.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차라리 함부로 가릴려고 미리 인간이 하나님 노릇을 대신해서 너는 밀이고 너는 가라지다. 너는 좋은 고기이고 너는 나쁜 고기이다. 이렇게 갈라서 나쁜 고기 가라지라고 판정된 자를 자꾸 내어쫓을려고 하지 말라. 그러니까 상반된 가르침이 성경에 있는 것 같지요.

 

자 문제가 발생했어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데 아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종말 전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갈라지기 전에 가라지를 뽑을려고 성급하게 굴지 말라는 가르침을 왜 주어요? 그 이유가 뭐여요? 거기 보면 마13장에 보면 밀까지 다칠까 보니까. 그것이 우리가 아주 비판적으로 생각해야할 요점이지요. 자 우리 교회에 한번 적용을 해봅시다. 우리가 교회적으로 삶을 살 때 어떤 때는 엄격하게 가라지 나쁜 고기를 구분하고 규정하고 내어 쫓아야 되는 것이며 어떤 때에는 그것을 삼가해야 하는 것인가? 한번 좀 여러분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 한국교회사를 역사를 들어도 좋아요. 지난 시간에 세계교회사를 조금 예를 들었지요.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요? 핍박 때에 믿음에 충실한 자와 믿음을 생명이 아까 와서 타협한 자가 항상 갈라진다고요. 로마제국의 그 엄청난 핍박 속에서 성도들을 막 불속에 던지우고 성도들을 마구 맹수와의 경기장에 던지고 할 때에 로마 황제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을 이제 철회하면 살려준다고 그래요. 그러면 상당수는 그런 순간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믿음을 타협한다고요.

 

옛날 일제 때에 신사참배하라. 다 동방요배하라. 그랬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감옥에 보낸다 할 때에 우리 교회의 다수는 타협을 했어요. 신시참배 동방요배가 다 우상이 아니고 하나의 애국의 표현일 뿐이다. 그런 것을 그리스도인이 해도 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과 그것은 배치되지 않는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합리화 하면서 정당화하면서 신사참배를 다수가 했어요. 그러나 일부는 고신이 그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이다. 하고 끝까지 예수의 주권에 대한 신실함을 목숨으로 감옥에 가면서 까지도 지켰어요. 이런 핍박이 있고나면 항상 서로에 대한 손가락질이 벌어져요.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믿음을 지킨 자들은 믿음을 타협하고 배신한 자들에게 가라지 나쁜 고기라고 해요. 양의 탈을 쓴 늑대에 불과했음, 거짓말로 주여 주여 했을 뿐이지 진짜 한 번도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예수의 진짜 제자가 못되었음. 그런 자들을 쫓아내야 한다. 그런 자들은 다수이니까 쫓아내지 못함으로 우리가 따로 나와야 된다. 그래서 고신 교단을 새로 만들어야 된다. 그래서 고신교단을 새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분열이 난 것이지요. 그전에도 신학적인 분열의 조짐이 있었지요. 다수 보수계열과 지금 한신교회의 조직신학교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분열이 있었으나 교단적으로 첫 분열이 그렇게 일어났어요.

 

자 그것은 어떻습니까? 어디에 해당합니까? 여기 고전 5장에 해당합니까? 교회의 순결 성스러움 성도의 교제를 망가뜨리는 누룩 같은 암적인 존재를 없애 버려야 교회의 온전함을 지킨다. 거기에 해당됩니까? 어떨까 염려되어서 아직 가라지 뽑는 일을 하지 말라 하나님께 그 일을 마치고 어떨까? 밀까지 망칠까봐 우리 교회의 역사가 그 후자에 해당됩니까? 전자에 해당됩니까? 잘 모르겠어요? 아마 판단이 조금씩 다르겠지요. 그러나 나는 후자에 해당이 된다고 보아요. 왜? 한국교회의 지금 큰 문제가 지금 정말 한국교회의 문제가 분열이지요. 한국교회의 수십 수백갈래로의 분열은 우리 교회 공동체의 전체의 삶에 어떠한 독소 어떠한 독의 누룩을 갖다 집어넣었느냐? 교권싸움 교권쟁탈 교권정치 이것이 외국가면 교회생활에 그런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왠만한 목사들은 양떼를 잘 돌보는데 보다도 교회정치에 교권싸움에 더 시간과 신경과 에너지를 더 많이 써요. 그래서 신학교 하나 잘 되는데 없고 교회 총회 하나 진짜 은혜스럽게 끝나는데 없고 노회 한번 제대로 되는데 없고 그렇게 되니까 심지어 개교회의 공동체적인 삶까지도 전부 정치와 이런 것으로 심지어 어느 교회는 장로투표도 못해요. 우리교회는 그래도 정말 모범적이어요. 어떤 교회는 장로투표도 못해요. 왜? 서로 장로 되려고 싸움질을 해서.

 

그래서 누룩이 가라지를 뽑고 교회의 순결을 지길려고 하는 일면 정당화되는 그런 노력이 밀 밭 전체를 망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말이어요. 우리 개교회에서도 그래요. 그런 때 우리 당회가 어떠해야 합니까? 이 두 가지를 놓고 생각해야지요. 고전 5장 같은 데의 가르침, 마18장의 가르침을 따라야할 경우냐? 아니면 밀과 가라지의 비유 그물의 비유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경우냐? 어떻게 지혜롭게? 자기 감정 대로가 아니고 성령의 인도함을 바라보면서 그러니까 이것이 당외니 제직회니 이런 회의가 중요한 것이지요. 어느 한 사람의 독단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함이 교회의 전체를 온전함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으로 믿고 충분히 토론을 하는 가운데 저 사람을 두는 것이 악의 누룩이 퍼지게 해서 우리 교회를 망치게 하는 경우냐? 하여간 타일르는 것이 나으냐? 제거하는 것이 나으냐? 아니면 가라지 같이 좀 참으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갈를 것을 믿고 우리는 기도하고 타이르고 참고 이렇게 해야 되느냐?

 

그렇지 않으면 지난 시간에도 강조한바 완전주의, 종말에 완성된 완전이 있어요. 그런데 완전주의, 교회의 순결이라든지 이런 모든 점에서 완전주의를 추구하다가는 역효과가 벌어질 수 있다. 내가 예를 들었지요. 우리 교회가 지금 순결을 추구한 것은 참 좋은 일이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가라지를 너무 일찍 뽑다가 밀밭 전체를 망가지는 역효과가 난 경우. 자 우리 교회공동체에서 이 가르침을 적용했습니다만 이것이 우리 가정에도 적용이 되어요. 우리 가정에서 구성원의 서로의 부족함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이 되는 것이어요.

 

징벌이라는 것이 어떤 때에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며 어느 때에 완전주의를 추구하는 나머지 징벌은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음. 이런 것을 우리가 좀 생각을 해야 되겠어요. 너무 완전주의를 추구하면 자기의의 주장 교만함의 심정이 싹트게 되어요. 우월감 이것이 싹트게 되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 자체가 무엇입니까? 악이지요. 그래서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을 우리가 잘 살려서 그러니까 지난 번에 공부한 밀과 가라지 비유 그리고 오늘 공부한 그물의 비유와 다른 한편 마 18장이나 고전 5장에 비추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교회생활에 대한 올바른 이해, 교회 징벌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고 우리의 완전을 추구함에 있어 유보적인 태도 관용의 태도가 함께 있어야함. 이런 것을 우리가 공부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