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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정경이 될 수 없는 도마복음 (결론)"

꿈심는농부 2018. 9. 29. 08:19
"신약정경이 될 수 없는 도마복음 (결론)"
입력 : 2011년 02월 24일 (목) 20:35:11 / 최종편집 : 2011년 02월 24일 (목) 20:36:42 [조회수 : 67]김기천abqkee@gmail.com


5.3. 셋째 이유: 현존하는 2만5천여 개의 성서사본들의 증거

예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초기 교회는 외부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면서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사도들은 나름대로 장로나 집사를 세워서 여러 교회를 치리했다. 여러 지역에서 교회가 세워지면서, 예수의 목격자들의 증언이나 사도들의 증언을 토대로 예수의 말씀이나 행적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수집 편집되면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만들어졌다. 바울과 같은 사도나 사도들의 권위를 계승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서신들이 여러 지역 교회들에게 보내졌다. 이렇게 해서 신약성서 원본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원본이란 오늘날처럼 신약 27권이 한꺼번에 묶어놓은 책이 아니라 각각 낱권들을 가리킨다.

1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기독교 내에 가장 큰 위기는 예수의 제자들이었던 사도들과 예수의 목격자들이 세상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도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믿을만한 제자들을 세워 사도의 권위를 계승시켰다. 사도 권위를 계승받은 여러 지역의 교회 지도자들은 그 지역에서 이미 만들어진 신약 원본을 의존하기 시작했다. 기록된 신약 원본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약 원본들이 기록된 이유는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밖에 없는 원본을 교회마다 돌려가면서 읽었다. 교회의 숫자가 계속 불어나자 회람에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결국 원본을 보고 베껴서 쓴 사본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더욱이 교회가 여러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라틴어, 시리아어 등으로 번역된 사본들도 잇달아 생겨났다.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에 책을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일이 손으로 써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손(manu)으로 쓴(scriptum) 글을 “메뉴스크립트”(manuscript)라고 한다. 현존하는 신약의 메뉴스크립트는 모두 원본을 보고 베껴 쓴 사본(codex)들이다. 이 말은 현존하는 신약 원본은 없다는 뜻이다. 문서를 기록할 때 사용했던 종이도 양피지나 “파피루스”(Papyrus)로서 오늘날 종이와 다르다. 8세기에 중국에서 사용하던 오늘날과 흡사한 종이가 아랍에 의해서 유럽에 공급되기 전까지 유럽에서는 책을 만들기 위해서 “파피루스”라는 종이를 사용했다. 이 파피루스는 나일 강가에서 자라나는 식물 파피루스의 줄기를 말려서 만든 종이였다. 이 두터운 파피루스 위에 신약본문 전체를 적어 놓고 그것들을 오늘날 한 권의 책으로 묶듯이 합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현존하는 신약 사본들의 숫자는 현존하는 어떤 고대 문헌들보다도 더 많다. 15세기 독일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손으로 쓴 신약 사본들의 숫자를 구체적으로 보면 희랍어로 된 것들이 5,800개 이상이며, 라틴어로 된 것들은 10,000개 이상이며 그 외에 다른 고대 언어들로 된 사본들은 9,300개 이상이다. 이 모든 사본들이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기록한 것들이기에 서로 차이가 있지만, 이 사본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서가 기독교 정경이었음을 입증해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일 강 주변에 일찍부터 들어와 있던 인도 종교인들의 영향을 받아 영지주의와 같은 혼합종교가 발달되었다. 영지주의의 모판이 된 나일 강 유역에서 영지주의 문헌들이 발견되고 있다. 『도마복음』 사본들도 나일 강 상류인 낙하마디(Nag Hammadi)와 옥시린쿠스(Oxyrhynchus)에서 발견되었다.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그리스어로 된 세 개의 파피루스 단편들로서 “파피루스 옥시린쿠스 1[2세기 말엽이나 3세기 초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말씀 26,27,28,29,30,77b,31,32,33 등이 수록되어 있다.], 파피루스 옥시린쿠스 654[3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서두와 말씀 1,2,3,4,5,6,7 등이 수록되어 있다.], 파피루스 옥시린쿠스 655[말씀 24,36,37,38,39 등이 수록되어 있다.]” 등이다.

『도마복음』 사본들은 이집트 나일 강 유역에서만 발견되지만 오늘날 정통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의 사본들은 다양한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 기독교는 선교를 통해 1세기 이후로 유럽, 소아시아, 아프리카 등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성서 사본들을 사용했다. 당연히 나일 강 유역에 있는 도시들도 선교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옥시린쿠스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을 보면 도마복음 단편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정경 단편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도마복음』이 신약정경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를 현존하는 신약 사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현재 발견된 신약 사본들 가운데는 복음서 외에 신약의 다른 본문들도 함께 기록된 사본들이 많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복음서와 바울서신, 복음서와 일반서신, 복음서와 계시록 등이 함께 수록된 사본들을 말한다. 그러나 『도마복음』과 신약의 다른 본문이 함께 기록된 경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신약 본문을 모두 수록한 고대 사본들은 흔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런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희랍어 대문자로 기록된 사본들인 시내 사본(01), 알렉산드리아 사본(02), 바티칸 사본(03), 에프레미 사본(04) 등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본문들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고 있다. 물론 이 사본들 안에『도마복음』 본문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이런 사실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 성서 27권은 기독교 정경이며 반면에 『도마복음』은 기독교 정경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입증해준다.



6. 결론

『도마복음』은 기독교 경전이 아니다. 인도종교 사상이 혼합된 책이다. 기독교적인 인물이나 용어를 사용했지만 내용은 인도사상에 가깝다. 인도 포교사들이나 아니면 이에 영향을 받은 어떤 사람이 기독교 내에 자신들의 가르침을 침투시키기 위해 예수나 그의 제자들의 이름을 도용했고 신약 복음서 본문 중에서도 자신들의 가르침에 합당한 구절들을 몇 개 갖다 붙여서 『도마복음』을 만들었다.

학자들은 『도마복음』이 예수의 말씀만 기록한 특별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도마복음』은 예수와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인도 경전들을 보면 스승과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문헌들은 수도 없이 많다. 『도마복음』의 예수는 이름만 “예수”이지 내용을 보면 오히려 인도 경전에 있는 깨달음을 얻은 스승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도마복음』이 말씀 어록만 기록되었다는 그 특별한 문학 형식 역시 인도 경전에서 온 것이다.

『도마복음』은 본문 끝에 적어 놓은 책제목이나 본문 서두에 “도마”란 이름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여기서 “도마”는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당시에 잘 알려졌던 예수의 제자를 가리킨다. 이렇게 “도마”란 이름을 명시한 저자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로, 당시 기독교인들이 존경했던 “도마”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도마복음』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그러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도마복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 읽을 것이라고 저자는 기대했을 것이다. 둘째로,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도마”의 이름을 언급함으로, 『도마복음』의 가르침과 인도종교의 가르침 사이의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집트에 일찍부터 자리를 잡은 인도 포교사들은 지식, 지혜, 깨달음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들의 가르침을 펼쳐왔다. 그러나 그곳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지혜를 중심으로 하는 이들의 가르침은 메시아의 탄생, 대속의 죽음, 부활 등과 같은 예수의 삶을 기초로 세워진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과 분명하게 충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의 선교가 그 지역에서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이미 인도 종교에 영향을 받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르침을 기독교인들에게 알릴 목적으로 『도마복음』을 만들었다. 기독교적인 인물, 용어, 구절들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가르침을 기독교 내에 침투시키려고 했다. 인물이나 용어나 구절들이 기독교적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오늘날 이런 전략에 말려든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가르침의 성격이 워낙 차이가 났기 때문에 기독교를 뒤엎을 만큼의 커다란 영향력은 없었다.

이집트에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인도사상과 예수의 삶을 강조하는 기독교 가르침의 대결은 4세기 초엽에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비호하면서 끝이 났다. 로마의 정치적 권력을 등에 업은 기독교는 크게 세력을 떨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득세로 인해 이집트 지역에 있었던 기독교에 해를 끼치는 이단, 혼합종교들이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 결과로 이단 종교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중히 아끼는 책들을 빼앗길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책들이 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 책들이 오랫동안 보관될 수 있도록 항아리에 넣고 잘 밀봉하였다. 그리고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장소를 물색하다가 근처 벼랑에 있는 동굴에다 감추어 둔 것이다. 그것이 낙하마디 마을에 벼랑에 있던 동굴 안에서 발견된 항아리였고 그 안에 『도마복음』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낙하마디 문서의 전문가이며 프린스턴 대학 종교학 교수인 페이젤스(Elaine Pagels)는 『도마복음』이 가지고 있는 유별난 가르침들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해서 이 가르침과 인도종교의 가르침을 비교할 수 있는 능력 있는 학자들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We look forward to the work of scholars who can study these traditions comparatively to discover whether they can, in fact, be traced to Indian sources.[Elaine Pagels, The Gnostic Gospels, xxi.]

(발췌: 큐복음 상권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 341-347페이지)

목차(상기 내용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 목차를 추가한다)
VIII. 부록: 인도종교와 혼합된 『도마복음』
1. 항아리에서 쏟아진 영지주의 문헌들
1.1. 『도마복음』이 들어있던 항아리
1.2. 침묵하는 항아리
2. 그리스 로마 세계에 포함된 인도
2.1. 낙하마디 문헌들의 뿌리를 찾아서
2.2. 기원전 6세기 이후 인도와 문화 교류
2.3. 그리스 로마 문헌에 기록된 힌두 종교
2.4. 인도 북부 개혁 불교
2.5. 해외로 전파되는 인도 불교
3. 인도종교 이해
3.1. 힌두 경전 『리그베다』
3.2. 힌두 경전 『우파니샤드』
3.3. 기원전 6세기 힌두 개혁종교: 자이나교, 불교
3.3.1. 자이나교
3.3.2. 불교
3.4. 정통 내에 개혁바람: 힌두 육파철학
3.4.1. 상키야(Samkhya) 학파
3.4.2. 요가(Yoga) 학파
3.4.3. 베단타(Vedanta) 학파
3.4.4. 미맘사(Mimamsa) 학파
3.4.5. 바이세쉬카(Vaisesika) 학파
3.4.6. 니야야(Nyaya) 학파
4. 인도종교와 기독교의 혼합
4.1. 영지주의의 본산 이집트
4.2. 영지주의 문헌 안에 힌두사상: 브라만교, 불교, 자이나교
4.2.1. 영지와 깨달음
4.2.2. 영지주의와 힌두종교의 신관 4.2.3. 영지주의와 힌두종교의 세계관
4.2.3. 영지주의 기도와 힌두종교 만트라
4.2.4. 영지주의와 인도종교의 일치
5. 절대로 신약정경이 될 수 없는 『도마복음』
5.1. 첫째 이유: 복음과 독약이 혼합된 『도마복음』
5.2. 둘째 이유: 초대교회 교부들도 인용 안한 『도마복음』
5.3. 셋째 이유: 현존하는 2만5천여 개의 성서사본들의 증거
6.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