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함께 걷는길/기도선집

폭력적인 사회와 비폭력적인 예수

꿈심는농부 2017. 2. 25. 10:53

폭력적인 사회와 비폭력적인 예수

 

 마 5-7장은 산상수훈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문호인 톨스톨이는 이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말씀 중에 보석과 같은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수많은 위인들, 사상가들에게 감화를 끼친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입니다. 마 5-7장은 하나님 나라의 헌법입니다. 천국시민이 지켜야 할 헌법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헌법인 율법을 받고 선포한 것과 같이 주님께서도 산 위에서 오르셔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헌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시내산과 예수께서 오르신 산, 구약의 모세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모세의 율법과 산상수훈은 모두 대칭되고 있습니다. 일찌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 땅, 복(3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신정국가 이스라엘의 3대요소였습니다.

 

 먼저 1단계로 야곱의 70자녀들을 애굽으로 내려가게 해서 그기서 모판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430년 동안 번창하게 하셨습니다. 자손을 키우신 것입니다. 이제는 애굽의 바로가 두려워할 정도로 강대하고 큰 자손이 생기자 제 2단계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기 위해 출애굽을 시켰습니다. 3단계로 이 약속의 땅에서 신정국가를 이루어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는 신정국가의 국민이 지켜야 할 법, 헌법을 주셨습니다. 국가의 3대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 신정국가에도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법으로 자유를 구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자유와 안녕과 평화를 누리고 복을 받기 위한 법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헌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헌법인 산상수훈은 너무나 위대한 말씀이기에 감히 우리가 말씀 그대로 지키기에는 힘겨운 말씀들입니다. 특히 오늘 읽은 말씀은 참으로 문자 그대로 지키기에는 힘든 말씀입니다. 일찌기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크게 감명과 도전을 받았던 마하트마 간디는 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비폭력, 무저항 정신을 배워서 인도의 독립운동에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리스도인이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사람을 찾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모택동도 초기에는 복음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이후에 복음을 떠났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오해하고, 편협하게 본 측면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 밖의 사람들을 비판과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여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울때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비폭력과 무저항을 말합니다. 오기로, 피가학증적인 자세로 왼편도 드리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온유함과 부드러움익 강함을 이기고, 사랑이 증오를 극복하고, 선이 악을 이기고, 비폭력이 폭력을 이기는 것입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모든 것을 이깁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잡으려고 달여오는 병정들에게 저항하지 않으시고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마치 도수장으로 끌여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엎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마 5장에서 오른편을 치면 왼편까지도 돌려대라고 가르치신 그 주님은 이후에 자신의 가르침대로 사셨습니다. 그렇게 사신 그 분이 오늘 우리에게 자신을 닮아 그렇게 살라고 하십니다. 이 역설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하나님의 약함이 사랑의 강함보다 강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강압적으로, 폭력적으로, 강제적으로 자신의 섭리를 관철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게 보이는 방법으로, 가장 부드러운 방법으로, 가장 온유한 방법으로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 폭력이 오락으로 정당화되고 있지 않습니까 ? 우리의 새싹들은 매일 전쟁과 폭력을 즐기고 있지 않습니까 ?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는 이 종말론적 희망을 얼마나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  43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말씀은 레위기 19장 17, 18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레위기 말씀에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이후에 자신의 유전과 전통으로 첨가시킨 것입니다. 본래의 레위기 본문에는 오히려 원수를 갚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구약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은 없고 오직 이에는 이, 눈에는 눈과 같이 잔인한 복수의 율법만 있으며, 예수님께서 비로소 처음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현대의 이스랄엘과 아랍국가들의 끊임없는 전쟁에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이 적용됩니다. 그러나 본래의 율법의 정신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출 21:23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이것은 잔인한 복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법은 부당한 보복을 방지하며 합당한 벌을 내릴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원수를 사랑할 것을 가르친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율법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출애굽기 23:4 "네가 만일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리라". 잠언 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구약의 이 말씀을 신약 로마서는 12장에서 그대로 재인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구약의 율법에서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구약율법에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까지도 도우라고 말씀하셨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여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다시금 새롭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이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첨가했을까요 ? 그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도 그러하지만 유대인들만큼 많은 전쟁과 포로생활을 겪은 민족은 없을 겁니다. 이집트 종살이 430년, 바벨론 포로 70년, 페르시아 등 주변민족으로부터 언제나 전쟁으로 유린되고 괴롭힘을 당해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신앙적인 의미에서 이방인들이 점차 원수가 된 것입니다. 우리민족도 일제 36년의 식민지 기간으로 인해 일본과의 미묘한 민족감정이 있는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주변 이방민족을 더욱 더 멀리하고 원수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 유대인들은 이웃을 자기민족에게만 제한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은 언제나 유태인이라는 민족공동체의 테두리 안에 제한되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는 바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통념에 큰 도전을 주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 그 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태어난 혼혈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인들이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것과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심산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이유로 매우 멸시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정통 유대교의 제사장도 랍비도 아니라, 그 멸시받았지만 선한 일을 한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율법사에게는 도전적인 말씀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평소에 멸시했던 사마리아인도 자신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 옆집 사람입니까 ? 일본은 우리의 이웃이 아니며, 전라도는 우리의 이웃이 아닙니까 ?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웃이 어디까지가 내가 사랑해야 될 이웃인가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이웃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역에 제한하고, 민족에 제한하고, 이익으로 제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이웃사랑은 집단이기주의도 물리쳐야 합니다. 유대인들처럼 우리 스스로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을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을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나의 이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를 미워하는 자도, 너를 저주하는 자도, 원수까지도 이웃이라고 말씀합니다.      

 

 결론적으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온전하라는 말씀은 죄와 실수가 전혀 없이 기계처럼 완벽하는 뜻이 아닙니다. 온전하다는 말의 본래 의미는 Perfect라기 보다는 성숙되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모습을 본받은 성숙과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완벽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다 성숙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온전해집니까 ? 이는 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면 온전해집니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온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세리도 그 정도는 하기 때문입니다. 상급이 없습니다. 성숙되지 못한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온전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품을 떠나 배반하여 탕자가 되고 원수가 된 인류를 용서하시고 자기 아들을 주시면서까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스스로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원수는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사귐을 가질 수도 없고, 빛이신 하나님께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어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 원수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 원수들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 이것은 교회든, 지역이든, 민족이든, 국가든 자신의 그룹에만 문을 닫고 서로 끼리끼리만 인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친교과잉증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교회공동체가 너무 자기 안에서 친교가 지나칠때 벽이 생기고 새로운 신자나 타인이 거리감을 느낄 정도로 끼리끼리 뭉치는 병입니다. 여기서 남보다 더해야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것이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하지 못하는 것, 세리가 하지 못하는 것, 그 사랑을 하는 것이 바로 온전하신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한 사랑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형제에게는 사랑을 베풀지만,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무관심하고 미워하지 않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감정을 삭히며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원수인 경우에는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전에 하나님의 원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신 십자가 그늘 아래서는 모든 사람이 용서함을 받았기에 진노와 저주와 원수됨이 사라졌습니다. 화해되었습니다. 용서함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7번에 7번까지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렇게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우리가 먼저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 비록 참으로 어렵다할찌라도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은 지키기에 불가능하다고 포기해버릴 때에 이 말씀에 소홀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키기에 도저히 불가능한 윤리적 이상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현실입니다. 성령께서는 오늘도 우리 속에 새 사람을 창조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우리가 살 수 있는 새롭고 거룩한 의지와 뜻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때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들보다, 세리보다 더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악으로 갚는 인간의 자연법을 초월하여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으로 자연법적으로는 정당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새로운 법 아래서는 이것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 온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강한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산위에 오르셔서 2000년전에 모든 시대의 천국백성이 살아가야 할 헌법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헌법은 세상나라의 시민법과 헌법에서는 찾아 볼 수 있는 고차원의 사랑의 헌법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법도 정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자연법 위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있습니다. 부단히 이 말씀을 기억하며 자신을 살피며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새사람을 만드셔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