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비유(3) -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관한 비유 (김세윤 교수)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 관한 비유들
마가복음4:21-32, 마태복음13:33
본문 말씀은 앞에 두 절 그러니까 10-12절까지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앞에서 했던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또는 씨의 비유 아마 정확히는 씨와 밭의 비유 하는 것이 아마 제일 정확하겠습니다만 씨와 밭의 비유에 대해서 묻는 것에 대해서 답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고 그 다음 13-20절 까지는 바로 그 씨와 밭의 비유에 대한 예수의 해석이고 그 다음에는 또 두개의 비유들 등불의 비유와 헤아림 받음. 그러니가 곡식을 되는 됫박의 비유 그런데 우리 번역에 지금 헤아림 너희가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림은 아마 우리 번역으로 정확히 하자면 너희가 헤아리는 그 됫박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그렇게 됫박의 비유여요.
그래서 오늘 공부하고자 하는 본문에는 끝에 등불의 비유와 됫박의 비유가 있는데 앞에는 씨와 밭의 비유와 연결해서 예수와 제자들과의 대화가 있고 질문이 있고 답이 있고 그렇게 되어 있는데 지금 이 등불과 됫박의 비유도 전부 앞의 씨와 밭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또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가 있고 그 다음에 겨자씨의 비유가 있고 이렇게 계속해서 씨의 비유로 지난번에 제가 한꺼번에 설명한대로 씨들의 비유 도는 씨와 밭의 비유로 연결되어 나타나요.
4장의 많은 씨의 비유의 근본 의미는 예수와 더불어 이 세상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대로 엄청난 천지개벽을 통한 또는 무슨 이 세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로 일어나지도 않고 또 열혈당원이 생각하는 대로 엄청난 정치적인 혁명 또는 군사적인 무슨 전쟁을 통해서 일어나지도 않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은 갈릴리 어부들 몇 명 여자들 몇 명 데리고 다니면서 주로 설교로 말씀으로 하는 운동이어서 자연히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엉뚱하게 보여요. 너무나 자기들이 지금까지 들어왔던 종말에 메시야가 임하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면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 것으로 생각했다거나 아니면 최소한도로 출애굽의 재현정도로 최소한도로 다윗왕조의 재건정도로 생각해서 최소한도로 로마 통치로 부터 좀 어떻게 해방이 되고 먹을 것이 풍요해 지고 민족적 반역자들이 좀 척결이 되고 궁핍한 사람들이나 잘사는 사람들이나 좀 평등하게 잘사는 사회가 이루어지고 이런 것일 줄 알았었는데 아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그런 것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아마 거기에 대해서 문의가 생겼겠지요.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심지어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고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고 까지 한 세례요한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예수에게 실망하는 것을 배경으로 보았어요.
거기 예수께서 지난 번에 본 바와 같이 네 종류의 밭들에 대한 비유를 한 것을 우리가 보았어요. 그 나머지 뒤따라 나오는 씨들의 비유에 대해서 서론을 했어요. 그런데 그 비유를 하니까 제자들이 이제 예수께 물어요. 10절에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 그러니까 앞의 4장 1절에 엄청나게 많은 군중이 예수를 지금 따랐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호기심을 가지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예수께서 밟히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없이 배를 띄우고 배 위에서 육지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지금 이 비유로 설교했는데 이제 여기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제 홀로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설교를 마치니까 아마 어쩌면 대다수가 이제 돌아갔겠지요. 그러니까 거기에 누가 남았어요. 예수와 함께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남았어요. 하나는 열두제자들 또 한 부류는 그들 예수 주위에 있는 사람들, 우리번역에는 그것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데 이것을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마가는 일부러 구분하고 있어요. 12제자들과 또 예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12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3장 14절에 방금 마가는 이 이야기 조금 전에 예수께서 열둘을 왜 뽑았다고요? 4절 한 번 보시겠습니까?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열둘을 뽑은 이유가 두 가지여요. 하나는 자기와 함께 있도록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을 주로 무엇을 의미해요? 자기로 부터 배우는 제자도의 첫 요건이 예수와 함께 하면서 그로부터 배우는 일이지요. 그 다음 두 번째 목적은 사명 파송하는 것, 파송한다는 말에서 무슨 말이 나왔어요? 사도란 말이 나왔어요. 파송의 목적은 두 가지여요. 하나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이고 그런데 지난 번 우리가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누누히 강조했지만 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귀신을 내어쫓는다는 말은 큰 의미로 뭐라고요? 치유한다는 말이지요. 치유한다는 말을 한마디로 말해서 귀신을 내어좇는다고 그러는데 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과 치유한다는 항상 같이 가는 것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것은 두 가지가 아니고 사실은 하나여요. 치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말로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구원의 힘을 시위함이라고 그랬지요. 그러니까 빈말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어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여기 임했다고 빈말로 하는 것이 아니어요.
우리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임하는 것을 치유로 항상 시위한다고요. 그러니까 그것이 귀신을 쫓아내는 형태도 취하기도 하고 병자를 고쳐내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삭개오 같은 사람을 온전케 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그와 이웃과 그와 가정에서 관계가 올바르게 하고 그가 제정신으로 되게 하는 탕자가 제정신이 들게 하는 것도 치유여요. 그러니까 그런 모든 의미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온전케함, 그것을 위해서 열둘을 세웠어요.
제일 먼저 열둘의 특징이 뭐여요? 예수와 함께 함, 예수와 가장 근접한 예수와 항상 같이 있는 자들이어요. 자 그래서 열둘을 그 다음에는 또 누가 나옵니까? 여기 우리 번역에는 열두제자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원문에는 제자들이 없어요. 그냥 열둘이어요. 왜? 열둘이 아니어요. 아예 하나의 특수 언어여요. 왜?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중 12을 특별히 자기와 함께 하고 자기로부터 파송을 받아서 자기의 복음 선포와 자기의 하나님 나라 복음선포와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대행하도록 사도로 삼은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상응하는 열둘의 상징성을 위해서 그런다고 그랬죠. 그래서 새이스라엘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이스라엘의 기둥들로 삼을려고 옛 이스라엘의 1족장들에 상응하는 종말에 예수께서 새롭게 창조하는 새이스라엘 새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들에 해당한다고 할까 아니면 기둥들에 해당한다고 할까 나중에 이들이 초대교회에서 기둥들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바울도 이들을 뭐라고 불러요? “기둥들이다. ” 그래요. 새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의 건물로 보고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고 성전의 기둥들이라고 열둘을 그래요. 그래서 열둘이 아주 전문 언어여요.
우리가 성경공부를 통해서 누차 본 고전 15장 5절에도 베드로에게도 나타나고 열둘에게도 나타나고 거기도 제자란 말이 없어요. 그냥 열둘에게 나타나고 실제는 열둘입니까? 하나가 빠져 가지고 유다가 빠져 가지고 열 하나 밖에 없죠. 그런데도 계속해서 열둘이라는 말을 쓴다고요. 아예 전문 언어여요.
그래서 아주 특별히 새 이스라엘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새 조상들 새 기둥들로 삼았다는 의미로 열둘이라는 전문 언어가 생겼는데 그들이 있고 그들 말고 또 있어요. 또 누가? 주위에 있는 자들. 정확히 문자적으로 번역을 하면 예수 주위에 있는 자들. 이들은 누구냐? 이들은 열둘과는 다른 또 하나의 예수를 추종하는 무리들이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어디에 나왔어요? 바로 막 3장 31-35절에 나왔지요. 거기 한 번 지난 번에 읽었는데 읽겠습니다.
“막 3: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여기 지금 누구와 예수가 대화를 하고 있어요? 예수 주위에 앉은 자들. 이들이 누구여요? 우선 저 밖에 있는 자들과 구분이 되지요. 저 밖에 있는 자들 중에는 누구도 속해요? 자기 어머니와 동생들도 속해요.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을 해서 자기 가정에서 거짓 선지자가 나오면 큰 일이 나니까 신명기법대로 잡아다가 어떻게 좀 조치를 할려고 잡으러 온 것이어요. 그들은 누구 말을 듣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즉 예수의 말을 잘 안 듣고 예수를 적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러니까 지금 예수 주위에 둘러 앉은 자들이란 말이 3장에 몇 번 나와요? 거기에 3:31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더라. 34절 예수께서 바로 그들을 보고 자기 주위에 둘러앉은 자들을 보고 그들에게 뭐라고 그래요? 당신들이 내 가족이라 내 모친이요 내 동생이라. 왜? 당신들이 하나님의 듯을 행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 주위에 왜 둘러앉았어요?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 그래서 예수로 부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려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배울려고 해요.
그래서 아까 4장 1절에 지금 배경이 이러해요. 4장 1절에 보면 굉장한 무리들이 이렇게 인산인해를 이루어서 예수께서 배 위에서 말씀하니까 이들이 다 흩어진 뒤에 누구만 남았어요? 예수께서 앉아 있고 거기에 열둘 제자가 있고 거기에 누가 있어요? 예수 주위에 앉은 자들. 그렇게 지금 펴현하는데 예수의 말씀을 즐겨 듣고 경청해서 예수의 말씀을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 대로 실천하려고 하는 자들, 여기 막3장 35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들, 이들이 예수 주위에 둘러앉은 자들.
그러니까 열둘이 예수께서 새롭게 창조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들이라고 할까 기둥들이고 또 거기에 더불어 누가 있어요? 또 함께 예수께서 자기 가족이라고 자기 모친이요 자기 자매요 형제라고 선언하는 예수의 가족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있어요. 이들이 지금 예수에게 방금들은 비유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거여요. 왜 질문을 하겠어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라고요? 말씀을 듣고 경청하고 왜 경청했겠어요? 예수를 신뢰하니까 그러지요. 과연 진정한 선지자이다. 진정한 메시야이다. 예수야말로 정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시는 분이다. 그분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분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말씀을 즐겨듣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로 부터 배움을 받아서 꼭 하나님의 뜻을 실천 할려고 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지금 비유를 들었는데 그 뜻을 조금 명확히 알아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 할려고 물은 것이어요. 그 비유에 대해서.
그래서 예수께서 대답을 하되 두 가지로 대답을 했어요. 하나는 비유의 의미와 둘째는 왜 예수께서 비유로 말하는가? 하는 목적 의도 이렇게 두 가지로 예수께서 대답을 해요. 우선 거기 보면 11절은 주로 이비유의 의미에 대한 정의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다스림에 관한 것인데 그것이 비밀스러운 거여요. 그래서 비유로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11절 그것이 너희들에게는 주어졌으나 그 밖에 있는 저 많은 군중들 그들은 예수의 말을 들어도 3:35절에 말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어요. 예수의 말에서 하나님의 듯을 헤아릴 줄 알고 헤아릴려고 노력을 하고 그것을 실천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한 번 듣고 말고 하는 사람들이어요. 그 사람들이 여기 의인들이지요.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한다.
그런데 그 표현이 마가가 일부러 쓴 것이어요.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되어 있다. 그런 말이어요. 여기에 너희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주어졌다 하는 말에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진리를 특별히 나타내주심. 그래서 그들의 특권, 하나님의 그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 이런 것들이 그 한마디에 비밀이 주어졌다는 말에 담겨 있어요.
그러나 외인들에게는 그 특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음, 그 외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밀로 이어지는데 왜 그러면 비유로 외인들에게는 주어지느냐? 그것은 12절에 이사야서 8장 16절을 예수께서 인용을 해서 말을 해요.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예수께서 지금 자기가 비유로 말하는 목적 의도가 무엇이라고요? 내부 사람들에게는 그러니까 자기 말을 듣고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하고 자기의 가르침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고 신뢰하고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사람 그리고 그 헤아린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 그것이 비밀스러운 것인데 그것이 환하게 밝혀진다고요.
그런데 밖의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예수께서 비유로 말함으로서 그들을 못 알아듣게 만든다고요. 못 알아 듣게 하는 이유는 뭐라고요? 그들이 회개하여 혹시 믿어 죄용서를 받는 구원을 얻을까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 여러분들 이 말을 읽을 때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으라.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터득해서 예수를 믿고 죄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해야 될텐데 지금 예수가 뭐라고 그랬어요? 비유로 일부러 비유로 말한 것은 비유가 무엇입니까? 알쏭달쏭하게 말하는 거여요. 누구는 그 말을 알아들어요?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알아들어요. 그들이 누구여요? 예수의 말에 경청을 할려고 하는 예수 주위에 모여드는 그래서 예수로 부터 가르침을 받을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알아요. 밖에 있는 자들은 일부러 못 알아듣도록 하나님께서 한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이것은 지금 마가복음 여기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고 지금 마가복음 여기에 예수께서 어디를 인용한다고요? 이사야서를 인용하고 있다고요. 구약에도 똑같은 원칙이 있는 거여요.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어 구언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인데 동시에 또 무슨 말도 하느냐면 이렇게 말하는 거여요. 이사야의 예언이 선포되면 선포 될수록 사람들의 눈이 무거워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심장이 더 완악해지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회개함이 없어서 멸망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구약의 이사야가 하는 말을 지금 예수가 인용하고 있어요.
요한복음에도 도처에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3장에도 5장에도 그런 말씀이 나오고 5장 28절부터 보면 예수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 사람들의 반응이 항상 갈라져요.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그 분을 세상의 빛으로 암흑의 세상에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밝혀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져요? 한 무리는 암흑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내가 세상의 빛이라(8:12)는 예수님, 이 말은 뭐라고 그랬지요?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지요. 빛은 무엇을 가능케 한다는 말이지요? 지식을.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빛이어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능하게 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생명이어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구약적인 의미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 창조주와 하나 됨,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계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도록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는데 항상 무슨 일이 벌어져요?
어떤 사람들은 소수는 빛에 나왔어요. 여기 3장 예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속에서도 그렇지요. 빛으로 나온다고요.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이 정말 하나님의 계시이다는 것을 깨닫고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영생을 얻어요. 반면에 어떤 형상이 벌어져요? 이 빛으로 부터 도망을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빛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정죄하고 거짓 선지자라고 하고 죄인이라고 하고 그런 다수가 있어요. 예수의 계시를 거부하는 사람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기 죄가운데 머무른다. 요한복음은 그러지요. 요한복음에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요? 어떤 사람은 빛 가운데 나아오고 어떤 사람은 빛을 거부하고 가기에 등을 돌리고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고요? 3장에는 뭐라고 그랬어요? 예수의 빛 가운데 나아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어요. 선을 행하는 자들이어요.
요한복음 3장 16절 부터 읽어 봅시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내어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심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기 위해서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나타내려 하심이라. ”
여기 요한복음 3장 이 말씀과 지금 우리가 묵상하는 마가복음 이 말씀과 똑 같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의 계시를 터득하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려고 하고 그 뜻을 행하려고 하는 자들 거기 3장 35절 그들을 예수께서 뭐라고 선언해요? 나의 부모요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다. 반면에 그 밖에 있는 자들은 들어도 하나도 못 알아들어요.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여요. 누가 진리로 나와요? 선을 행하는 자들, 선을 행하는 자들이 누구라고요?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예수께로 와요. 그래서 예수가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더 환한 계시 빛을 보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서 생명을 얻게 되어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로 안 나온다고요. 자기 행위가 악한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들. 지금 여기 마가복음에 이야기를 한다면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그렇게 관심을 많이 갖지 않고 예수의 말씀이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라는 신뢰가 없고 예수에 대해서 호기심이 있을지는 모르나 자기들의 선입관을 예수가 충족시키나 안시키나 자기들의 구원에 대한 선입관이 있겠지요. 이런 것이 구원이다.
가령 요새 말로하면 건강 시험에 잘 합격하게 하고 부자 되게 하고 사업이 잘되게 하는 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예수 믿으면 일어난다 하는 정도의 구원에 대한 자기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정말 예수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충족시키나 안시키나 내가 좀 교회를 다녀 보겠는데 정말 교회를 다니면 집안에 우환도 없고 사업도 잘되고 애들 학교도 쑥쑥 인류대학에 합격하고 그러면 내가 계속해서 교회에 다니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전에 절에 가봤더니 시원치 않던데 교회에 가보았더니 교회도 시원치 않더라 하고 돌아설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어쩐다고요? 모든 것이 비유로 되어요. 거기서 한마디도 제대로 안 들어가는 거여요.
그들은 요한복음의 언어로 말하면 자기들 죄 가운데 머무른다 암흑 가운데 머무른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보통 요한복음적인 예정론이라 그래요. 사실은 이것은 조금 재미없는 말이어요. 마가복음에도 있지요. 이것이 일차적으로 인간들의 반응이어요. 예수의 계시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 자기 자신들이 판가름을 해요.
여기 예수의 복음이 선포되었어요. 여러분들이 전도해 보면 아시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귀를 곧 알아듣고 예수에게로 나아오고 예수를 믿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예수를 모르고 믿지 않아요. 이런 판가름이 일어난다는 말이어요. 그것을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나? 일차적으로는 인간들 자신의 반응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미리 판가름을 한 것이다. 이들은 밖에 있는 자들이다. 요한복음의 언어로 하면 아무개 자식들로 이들은 들어도 못 듣고 이사야의 언어로 하면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가 선포되면 될 수록 그들의 눈은 더 무거워지고 귀는 더 어두워지고 심장은 더 굳어지고 한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더 저항하게 되는 현상이 우리 가운데 항상 있거든요. 그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
여러분들 아까 황 목사님 헤밍웨이 이야기했습니다만 그 사람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났다고 그러지요. 여러분들 스탈린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스탈린이 아주 좋은 믿음의 가정에서 난 사람이어요. 그래서 스탈린이 소년시절에 러시아 정교의 신부가 되는 신학교에 다녔어요. 신학도여요. 그 사람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사야의 말대로 더 눈이 무거워지고 귀가 어두워지고 심장이 더 완악해 진거여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더 적대시해요.
여기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셔서 어떤 자는 구원으로 나아오고 어떤 자는 자기 어두움 가운데 죄 가운데 죽음 가운데 그냥 머무르도록 작정을 하셔서 그렇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 말이어요. 왜 그러는가? 그런 것은 우리가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다만 여기에서 그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함으로 이루어지니 인간들의 책임은 전혀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그렇지는 않아요. 어떤 자들은 예수께 나온다고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좋아하는 자들, 그만큼 인간의 책임이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예정이 아주 긴장을 이루면서 양쪽이 다 여기에 천명이 되어 있어요.
하여간 그래서 13절 부터 예수께서 이 안에 있는 사람들 내부자들, 그러니까 예수의 계시가 하나님 나라의 계시라는 신뢰를 가지고 예수로 부터 하나님의 뜻을 더 배워서 그 뜻을 잘 행하려고 하는 올바른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이들에게 비유를 설명을 해주어요.
그런데 그 설명을 하기 전에 예수께서 무슨 말을 합니까?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데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너희가 이 비유를 아마 잘 이해를 못 한 모양인데 그러면 다른 비유들은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이 말로서 여기 지금 앞에 한 씨와 밭의 비유들이 예수의 비유들로 행해지는 가르침을 듣는 네 가지 유형들에 관한 비유들이구나. 그래서 학자들은 씨와 밭의 비유를 뭐라고 하야면 비유들에 관한 비유라 그래요.
예수의 가르침이 주로 비유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듣는 네 가지 유형들에 관한 비유다 이 말이어요. 여기서 씨와 밭의 비유라 이렇게 말한 이유는 씨는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런데 사람들의 다양한 유형을 어떻게 갈라요. 씨가 떨어진 밭의 종류에 따라 그 밭에서 내는 결과에 다라 사람들을 분류하거든요. 그러니까 씨와 밭이 합해서 다양한 결과를 낳지요. 씨와 밭이 분리될 수 없으니까 씨와 밭들의 비유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어요.
그래서 이제 해설을 하겠는데 그 해설은 참 우리에게 익숙해요. 말씀이 길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하나님의 말씀이 길가에 뿌려진 씨를 밟는 것 같이 밟은 자들은 어떤 자들이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린 말씀을 빼앗는다고 그랬어요. 사단이 즉시 온다고요.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길가라는 것에서 마음이 강퍅함도 아마 암시하겠어요. 그런데 사단이 즉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버린다는 말이니까 무엇이 강조되어 있습니까? 말씀에 대한 반응이 아주 느린 것이어요. 그래서 말씀이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뿌리를 내릴 여유가 없어요. 거기 말씀에 대한 반응이 아주 느린 사람이어요.
왜 느리겠느냐? 길바닥 같이 마음이 닫아져 가지고 강퍅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여간 말씀에 대한 반응이 느려요. 말씀에 대한 반응이 느리고 지체되면 어쩐다고요? 사단이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버려요. 그러니까 한 번 우리가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즉각 하든지 아니면 천천히 뜸들이고 충청도 사람같이 느릿 느릿 반응을 하면 어쩐다고요? 말씀을 가져가 버린다고요. 그런 유형이 하나다.
둘째는 어쩐다고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이 사람들은 피상적인 사람들이지요.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피상적으로 기쁨으로 받아요. 그러나 깊이 뿌리내리지 못해요. 그 사람 마음 갚은 곳에서 확신이 서지 않고 그 사람 인생관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그래서 이 복음의 진리가 항상 뿌리 없이 떠 있는 것이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 그 믿는다는 말이 우리 생각하는 것, 우리 가치체계, 우리 이웃에 대한 태도, 우리 생업에 대한 태도, 우리 삶에 대한 자세, 이런 것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영향을 주어 가지고 하나의 확신과 복음의 진리 됨이 복음의 생명주시는 힘을 우리 삶에 모든 면에서 지적으로 경험으로 체험해서 이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야 될텐데 그러지를 못해요. 이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나 그것이 우리 삶과 사고와 태도와 완전히 동 떨어졌어요, 이런 것은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면 금방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 복음의 진리가 우리 심장 깊숙히 뿌리 박혀서 우리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우리 인생관을 변화시키고 우리 이웃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고 그래서 이런 모든 면에서 복음의 진리 됨이 정말 생명을 주고 기쁨을 주고 평안을 주고 자유를 주고 하는 것임을 지적으로 일관성 있게 헤아려내고 체험으로 뒷받침 할 수 있을 때에 환란이나 핍박이 와도 그 복음을 거부할 수 없겠지요. 그렇지 못하면 환란이나 핍박이 오면 금방 넘어진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놓은 자니 이는 열심히 듣되 세상의 죄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한자라. 이 사람은 아마 여기 앞의 두 종류 보다는 조금 더 깊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생각이 깊고 그런데 아마 이 사람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 복음에 대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 그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한 신뢰 이것을 신뢰할 것이냐 아니면 눈에 보이는 가치 돈 맘몬 우상을 신뢰할 것이냐 결정적인 순간에 이 선택의 기로에 설 때에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고 그래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다가는 큰 손해를 보고 죽게 생겼어요. 반면에 한 건 잘하면 수십억 벌어서 나와 내 후손까지 좀 안전하고 잘 살아보겠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그런 것은 맘몬이즘 우상숭배에서 오는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지 하나님만이 우리의 안전이시요 피난처시라고 우리 요새 남북긴장이 고조되면 고조될수록 우리에게 사실 이 진리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의 반석이시요 피난처시라고 시편 기자가 누누이 강조하는바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속 가르쳐 주실려고 하는 바 맘몬의 우상숭배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가르쳐 주실려고 하는 바가 그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결정적인 이런 순간에 세상에서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방법을 택하는 그런 사람은 어쩐다고요? 이 많은 결실을 하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한 씨는 지난 번에 세 개의 씨라고 그랬지요. 앞의 세 개의 씨와 그 세 개의 씨가 떨어진 밭들은 다 열매가 별로 없어요. 거기에 상응하는 세 개의 씨만 즉 그 세 개의 씨가 떨어진 세 개의 좋은 밭들은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는 자여요. 그런데 여기 결실이라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종말에 수확을 염두에 주고 예수가 말하는가? 그래서 믿음의 행위로 종말에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인정해줌을 염두에 두고 말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것 보다도 지금 현재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한다. 그 말이어요.
씨의 비유들은 다 무엇에 관한 것이어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제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이런 것으로 해서 그 의미가 더 확연해 질 것이지만 씨의 비유는 전부 예수와 더불어 이미 여기 온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관한 비유들이어요. 그 하나님 나라가 점점 자람, 그 하나님 나라가 점점 열매를 맺어감, 그래서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어간다는 말이 지금 현재 하나님 나라의 열매 맺음이다. 그것이 뭐여요?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구체화되어서 이렇게 30배 60배 100배로 나타나요. 전에도 제가 비난 번에 하나님 나라 강의 하면서 이것을 누차 강조했지요.
사단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신뢰하도록 네가 네 하나님이 되라. 네가 너의 꾀로 너의 능력으로 너의 안전을 확보하고 너의 뜻을 실현하라. 자신을 신뢰하라고 너의 하나님이 되라. 그래서 탕자가 자기의 내재의 자원을 가지고 아버지로 부터 멀리 떠나버리면 어쩐다고요? 이 사람은 자기의 내재의 자원을 신뢰하고 그 자원으로 자기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신뢰한 사람들은 항상 무엇에 빠져요? 맘몬에 대한 우상숭배에 빠진다. 맘몬. 자신을 신뢰하는데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주는 수단이 맘몬이어요. 돈. 그래서 우리가 사단의 사주를 받고 살면 사단의 나라 사단의 통치 속에서의 이런 삶은 자신의 우상숭배는 곧 맘몬우상숭배인데 그것은 삶의 원칙이 어떻게 된다고요? 착취가 된다고요. 그래서 사람들 간에도 항상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로 맺어요. 뿐만 아니라 사람과 자연환경도 그래요. 이런 것은 항상 뭐가 난다고 그랬어요? 갈등이 있고 불의가 있고 고난이 있어요.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어떻게 통치를 해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맘몬우상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의 안전과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 여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신을 우상숭배하고 맘몬우상숭배하면 삶의 원칙이 착취여요. 반면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하면 삶의 원칙이 이웃 사랑. 그러면 이것에 뭐가 일어나요? 하나님에 대한 의지가 많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많아서 이웃사랑이 많이 실현이 되면 될수록 뭐가 일어납니까? 의가 일어나지요. 불의 대신에 의, 갈등 대신에 평화가 일어나요. 이곳에는 뭐가 있어요? 자유가 있어요. 이것들이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지요.
이것이 30배 60배 100배 된다. 지금 예수가 재림 하실 때까지 완전히 일어나지는 않아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여기 열매 맺지 못하는 씨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어도 자꾸 이쪽으로 떨어지는 거여요. 결국 열매가 없어요. 좋은 밭에 떨어진 씨 같은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려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예수의 가족들이어요. 그들에게 예수께서 더 하나남 나라의 비밀을 설명을 해주는데 그들이 그 말씀을 잘 받아서 행하면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말이어요.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예수의 가족이라고 그랬지요. 그러니까 계속 행해가면 예수가 그르쳐주면 가르쳐준 대로 더 많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면 성경공부하면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의지를 더 하면 성경공부 여러분들 예수 주위에 지금 앉아있는 분들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 연휴 때 경부선 타고 남쪽으로 안 내려가고 지금 여기 앉아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누구여요. 4장 10절의 말로하면 누굽니까? 열둘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엇입니까? 예수 주위에 앉은 자들이어요. 그들은 3:35절 말대로 하면 하나님의 듯대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 이들은 좋은 밭이어요. 여러분들이 이 태도를 견지하면 여기서 성경공부를 하면 할수록 여기서 아침설교 말씀이 복음이 설교를 통해서 선포되면 될수록 듣고 받아들이고 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더 의존하고 순종하면 어떤 유혹을 뿌리치고 그러면 손해 보고 죽을 것 같아 가지고 자꾸 움추러드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정말 하나님에 대한 의지와 순종을 하면 그것이 점점 무엇으로 표현이 되어요. 이웃사랑으로 표현이 되어요. 그래서 남을 착취할려고 하는 순간에 남에게 자기주장을 하고 자기 이익을 보려는 순간에 도리어 남에게 도움을 주고 이러면 우리 사회와 우리 이웃 간의 일차적인 관계에서 우리 가족에서 우리의 이웃 간에 사업장에서 모든 관계들이 의롭게 원만하게 되어요. 그래서 그곳에 갈등이 아니라 평화가 있어요.
예수를 통해서 이미 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나중에 종말에나 얻는 것이 아니어요. 그때 완성을 받지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은 우리가 죽어서나 얻는 것이 아니어요. 그때 하나님 예수와 더불어 더 가까이 가지요. 그것은 사실이어요. 그러나 종말에 완성될 죽음을 통해서 예수에 더 가까이 얻을 그 구원이 지금 여기에 왔다는 거여요. 지금 여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어요. 어떻게? 우리 삶을 온전케 함으로 어떻게 ? 풍요롭게.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음이 뜻이어요. 그러니까 여기 오늘 등불비유와 됫박의 비유는 다음 주에 하겟습니다만 우리가 한 번 다음 주에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 우리가 예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 예수의 말씀을 경청할려고 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좋은 밭들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그런데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과연 좋은 밭에 떨어진 씨와 같아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이냐?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하나님 나라의 깨달음이 없어서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여러분들 깨달았으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우리 모두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나를 신뢰함으로 해서 맘몬이즘에 빠지기 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우리를 통해서 더 확대되어 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