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11) - 막14장17-25 (김세윤 교수)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성전 (3)
막 14:17-25절 까지 입니다. 교독합시다.
“막 14: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저희가 근심하여 하나씩 하나씩 여짜오되 내니이까 20 이르시되 열둘 중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2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3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5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지난 시간에 지난 주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언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를 하나의 성전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언어를 사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런 말을 했고 지난 주에는 이 성전이 무슨 성전인가를 살펴 보았어요. 그래서 이 성전은 건물의 성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말했던 것 같다. 그것을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 보았어요. 예수께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고 자신이 새로운 심판을 손으로 만들지 않는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호세아서 6장 2절에 예언을 빌려서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 건물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새로운 성전으로 말한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지난 번에 했어요.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예수께서 이 쿰란 공동체 사람들과는 달리 예루살렘 성전을 무시했던 쿰란 공동체는 종말에 건물 성전을 지을 것을 약속하고 결의하고 그랬는데 예수의 가르침은 그런 건물 성전을 짓는다는 약속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더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자기의 죽음을 제사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 성전의 기능을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함으로서 더 이상 건물의 성전이 필요 없고 건물의 성전이 필요한 것은 짐승제사를 위해서 필요한데 더 이상 그 짐승제사가 필요 없음. 이런 것을 다 볼 때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의도는 사람들을 이 사단의 통치 영역에서 불러내서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하는데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는데 있었다. 이런 것을 전부 종합해서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새롭게 창조하고 모을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표현했다. 거기까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이제 어떻게 이 성전이란 말이 문자대로 성전건물에 대해서 쓰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위해서도 이런 말이 쓰일 수 있느냐? 그런 의문이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생겼을 거여요. 그런데 바로 지난 번에 소개한 쿰란 공동체가 아주 우리에게 좋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요. 쿰란이란 곳을 지난 번에도 설명했죠. 사해 유역에 있는 사막에 사해에 연한 사막지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인데 그 마을에 동굴에서 1947년 이래 처음에는 아랍 목자들이 우연히 옛 문서들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쿰란문서라고 그러는데 또는 사해문서라고도 하고 그렇게 하는데 1947년 이래 옛 문서들이 발견되었어요. 그래서 그 뒤에는 전문 고고학자들이 자꾸 그 지역을 발굴해서 더 많이 발견했어요. 그런데 그 문서들을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까 아 이곳에 주전 153년-54년경에 예루살렘 성전과 절교한 일단의 아주 경건한 유대인들이 이런 곳에 은거해서 살았구나 이런 쿰란 같은 곳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구나 하고 발견하게 되었어요. 보통 그렇게 쿰란 공동체에 은거해서 산 사람들을 에센파들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주후 1세기 후반에 로마에서 유대역사를 쓴 요세푸스라는 사람에 의하면 유대 땅에 크게 4개 학파가 있다고 기술했어요. 잘 아는 바리새파가 있고 또 하나는 사두개파 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우리가 성경에 자주 나오는 파죠. 그 다음에 에센파가 있고 그 다음에 열혈당이 있고 이 네 부류의 네 종류의 신학과 종교관행에서 다른 부류가 있었다. 요세푸스라는 사람은 상당히 높은 지체의 귀족출신의 유대인으로서 20대의 젊은 나이로 주후 66-70년 사이에 일어난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란에 앞장서서 동참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자기가 유대전쟁의 장군이었다고 소개를 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전쟁 초기 반란 초기에는 그 반란이 상당히 성공을 했어요. 그래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을 다시 깨끗이 하고 그래서 로마 황제를 위해서 제사하는 것 기도하는 것 다 없애 버리고 상당히 승승장구였다고요. 그러다가 나중에 로마에 베스파시안 장군이라고 베스피시아누스라는 장군이 그의 아들 디도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부장으로 삼아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어요. 그때 이 요세푸스는 자기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그래요. 동굴에서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이 포위된 상태로 있었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거여요.
그 계시의 내용이 뭐냐면 이 유대전쟁은 실패하게 된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로마 황제가 된다. 그러니까 5대 6대 네로 다음 네로가 5대이고 네로가 암살된 뒤 베스파시아 누스가 황제가 된다. 천하가 그때에 넘어가게 되어 있다. 항복하는 것이 좋다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부하들을 설득을 해야 되는데 그러면 자기 부하들이 자기를 죽일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사람이 꾀를 부려요. 어떻게 꾀를 부리냐면 우리가 이제는 다 죽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기 저 원수 더러운 로마 사람에게 죽기 보다는 우리가 서로 죽이자 자살하자 자살 협박을 하는 거여요. 그래서 서로 죽이는 일을 하기로 했어요. 그러면 제일 마지막에 누가 남겠어요. 자기만 남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자기만 살아 가지고 적장 베스파시아누스 한테 가서 당신이 황제가 된다. 이것은 내가 섬기는 야훼 하나님의 뜻이다고 선언을 했어요. 그러니까 베스파시아누스가 기분이 좋아 가지고 아 그 녀석 좀 데리고 오라고 그래 가지고는 잘 모셨다죠. 아니나 다를까 네로가 그 학정을 하다가 그 친위대에 의해서 암살된 뒤로 지금의 불란서 저 쪽 골 지방에 있던 로마의 군대가 팔레스티나에서 유대인들을 지금 무찌르고 있는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어요. 그러니까 베스파시아누스가 놀랬어요.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다. 신의 사람이다. 무슨 대성교회의 무슨 장로가 당신이 국무총리 된다고 하고 놀라 가지고 거기 목사를 뭘로 했다고 심문에 그렇게 났습니다. 거짓말인지 참 말인지 몰라도 하여간 엊그제 우리 읽었죠.
그런데 베스파시아누스는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을 체험한 거여요. 그래서 요세푸스를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로마에 데려 가지고 자기 이름을 주어 가지고 로마 신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궁정에서 아주 우대했어요. 예루살렘은 자기 아들 디도에게 맡겼어요. 디도가 드디어 포위하다가 70년에 불화살을 이용해서 난공불락이라 생각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공격해서 성전을 다 불태워 버리고 성벽이고 뭐고 건물이고 진짜 예수가 예언을 한 그대로 돌이 돌 위에 하나도 얹히지 않을 정도로 다 갈아뭉겼어요. 서쪽 벽만 하나 남겨 놓았어요. 얼마나 어렵게 전쟁을 치렀는가 기념으로 서쪽 벽 하나만을 남기고 성전의 모든 제물들을 전부 노획물로 그리고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가지고 자기 아버지가 황제가 된 로마에 개선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 번에 말씀을 드렸지만 로마에 가면 포럼 로마룸이란 곳에 디도의 개선문이 지금도 서 있어요. 양쪽에 디도가 개선하는 장면을 부조해 놓았어요.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의 보화들을 군대가 메고 행진하고 뒤에 유대 노예들이 끌려가는 장면이 지금도 있어요.
그런데 요세푸스가 베스파시아누스 궁전에 앉아 가지고 많은 책을 썼어요. 그래서 유대교를 이방인에게 설명하는 그런 책도 썼고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유대 사람들의 눈에 볼 때는 완전히 역적 짓을 하는 것 아닙니까? 배신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의 삶을 정당화하는 변명서도 썼고 특히 유대 전쟁의 역사를 썼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의 역사와 유대전쟁의 역사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을 썼는데 그래서 오늘 우리가 신약성경을 연구할 때 요세푸스의 그들은 아주 중요해요. 그 당시 시대적 배경과 그 당시 신학과 그 당시 사람들의 사상 그 당시 사람들의 신념. 뭐 삶의 모습 이런 것을 그러니까 신약성경의 배경 연구에 아주 중요해요. 그런데 하여간 그 요세푸스가 다만 이 요세푸스가 바로 이런 자기 개인적인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원래는 열혈당의 반란에 참여해서 장군 노릇을 했다고 해 놓고는 거기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이 유대전쟁의 핵심노릇을 한 열혈당을 하나의 강도쯤으로 격하하고 그래서 좀 왜곡된 역사를 보인다 해서 학자들이 요세푸스의 글을 읽을 때는 상당히 비판적인 눈을 번쩍 뜨고 읽어요. 어느 정도 사실이고 어느 정도 왜곡된 모습이 나타났을까? 가끔이 아니고 최근에 요세푸스의 책들 중에서 몇 권을 대중적으로 번역을 해 가지고 신문에 광고를 많이 했습니다. 뭐 이것을 읽어야 성경을 이해한다는 광고를 많이 했는데 여러분들 그런 책도 읽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그 책들이 얼마나 잘 됐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잘되었다고 전제하고 잘 번역이 되었다고 전제하고 잘 번역이 되었을 경우에도 요세푸스를 읽을 때에 그냥 거기 뭐라고 써 있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고 좀 비판적인 눈을 가지고 읽을 줄 알아야 해요.
하여간 요세푸스에 의하면 1세기에 우리 신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이런 당들이 있었다는 말이어요. 그런데 우리 신약에는 이 세파(사두개파 바리새파 열혈당)는 등장하죠. 그런데 에센파는 등장하지 않아요. 그런데 사두개파는 신학적으로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이었어요. 주로 모세오경에 의존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모세오경과 구약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상은 될 수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가령 부활과 내세에 대해서 구약에 잘 나타나 있지 않으니까 그런 것을 안 보는 사람들이었어요. 천사 이런 것들 안 믿는 사람들이었어요. 이 사람들은 이른바 중간시대의 복잡한 정치상황 때문에 (다 설명하자면 끝이 없어요) 우리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전을 장악한 제사장들이 사두개파에 속했어요.
반면에 바리새파는 중산층 평신도들로서 구약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 율법대로 살려고 하고 특히 가령 출 19:5-6절에 이스라엘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제사장 왕국이다. 우리 말 번역에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 제사장들의 왕국이라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레위족속들만 제사장이 아니고 모든 이스라엘이 제사장들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들의 왕국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레위기법에 원래 성전에서 제사에 종사하는 제사장들만을 위해서 정해진 모든 정결의 법들을 자기들 평신도들은 자기들에게도 적용을 했다. 손도 씻고 그릇도 닦고 음식가리는 일 모든 일을 철저히 했어요. 그런 하나의 운동이어요. 그런 성화운동을 한 사람들이어요. 이 중산층 사람들로. 그러니까 율법을 철저히 연구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되 어떤 이상 아래서 그러느냐면 이스라엘의 전체가 제사장들의 왕국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평신도들도 성전에서 제사에 종사하는 제사장들과 같이 거룩해야 된다. 깨끗해야 된다. 정결해야 된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모두 지킬려고 했어요. 율법을 법대로 다 지킬려니까 특히 이 사람들이 표 나는 율법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킴 십일조를 철저히 함 그래서 이 사람들은 모두 십일조 했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좀 비꼬죠. 박하. 마다의 채소와 박하. 모든 것을 다 십일조 했어요. 그리고 쉬는 일은 아주 편안한 거룩의 상징들 아닙니까? 이런 것들을 아주 철저히 할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우리 구약의 정경이 끝난 뒤로도 발달된 신학들을 많이 받아 들였어요. 우리 구약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데 그 뒤에 더 자세히 설명된 지리라 생각이 되면 가령 부활을 굉장히 강조했고 오는 세상을 굉장히 강조했고 천사론 같은 것을 굉장히 강조했고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어떻게 보면 이 바리새파 사람들은 좀 더 진보적인 사람들이어요. 사두개파 사람들은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들이고 그러나 또 삶의 태도에서는 정반대였어요. 사두개 이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여당이어요. 집권층 사람들로서 로마 세력과 많이 결탁을 하고 삶의 방식도 헬라적 삶의 방식을 많이 도입을 해요. 바리새파 이 사람들은 헬라 로마 세력에 대해서 상당히 등을 돌리고 이스라엘의 순결을 짓밟는다고 더럽힌다고 보았고 될 수 있으면 헬라적 영향을 안 받으려고 했고 삶의 태도를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이 아주 극단의 보수죠. 사두개파 사람들은 아주 요새 말로 하면 국제주의자라 할까 헬라화에 상당히 적극적이었어요.
에센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사람들하고 상당히 신학적으로 비슷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있느냐면 주전 153년 무렵에 예루살렘 성전이 대제사장이 그 전에 주전 168년 터 당시의 유대민족의 지배자였던 시리아의 안디옥에 본거지를 두었던 셀루키드 왕조에 아주 악독한 왕이 있었어요. 아주 악독한 왕이 누구냐면 안티오쿠스 4세라는 왕이었는데 이 친구는 자기가 신이다. 제우스신의 현현이라 해 가지고 자기 이름을 에피파니우스라고 불렀어요. 헬라말로 현현이란 말로 신의 현현이란 말이어요. 이 친구는 처음에는 주전 172년부터 유대교를 말살하기로 마음을 먹고 우선 그 때까지 정통 대제사장 가문으로 생각되었던 사독가문의 정통한 제사장 호니 3세를 때려치우고 처음에는 그의 동생을 제사장으로 잠깐 만들었다가 나중에는 호니가와 사독가와 라이벌관계에 있었던 다른 가문의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세우기 시작했어요. 물론 뇌물을 잔뜩 받고 그런 짓을 했어요. 그렇게 해서 사독 가문은 솔로몬이 성전을 처음 지었을 때부터 그 성전의 대제사장을 했던 정통 대제사장 가문인데 유대신학에 의하면 이 제사장 가문에서 제사장이 쭉 나와야 되는데 여기서 깨진 것이어요.
그래서 마카비 형제들의 반란이 주전 168년에 일어난 거여요. 이렇게 안티오쿠스가 유대교를 휘어잡기 위해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만들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이 예루살렘 성전을 제우스의 성전으로 탈바꿈을 시켜버렸어요. 그리고는 할례도 못하게 하고 안식일도 못 지키게 하고 돼지고기를 먹이게 하고 아주 유대교를 말살해 버렸어요. 그래서 마카비 형제들의 반란이 일어 나 가지고 그 반란이 성공을 했어요. 그래서 다시 하나님께 헌정했어요. 그것을 기념하는 그 명절을 하누카라 하는데 그것이 12월 초에 벌어져요. 우리 크리스마스 보다 2,3주 전에 벌어져요. 그래서 오늘날 까지 유대인들이 하누카 명절을 지키는 이유가 거기서 유래해요. 이 마카비 형제들이 그랬어요.
처음에는 종교적인 자유를 얻어요. 셀루키드 왕조로 부터 나중에는 정치적인 독립을 얻어요. 상당한 독립을 얻어요. 그러자 자기들이 부패해지기 시작한 거여요. 그래 가지고 유대 마카비의 동생 요나단이라는 자가 통치자 군대의 최고 사령관만 된 게 아니고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어 버린 거여요. 그것이 이 무렵이어요. 그러자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제 마카비의 반란으로 성전이 정화되어 가지고 이제 사독가문의 정통 제사장을 다시 모시고 율법에 따라 옳은 제사를 바칠 줄을 기대했던 제사장의 일부가 반란을 하죠. 이 유다 마카비는 하스모니아가였어요. 하스모니아가는 사독가문이 아니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될 수가 없는데 자기들이 정권을 잡으니까 자기들이 대제사장이 되었어요. 스스로 대제사장을 만든 거여요. 그러니까 이 무렵에 이제 예루살렘 성전이 이방 왕에 의해서만 더럽혀진 것이 아니고 심지어 성전을 정화하고 바로 잡겠다고 한 하스모니아 가문의 통치자에 의해서 더럽혀짐을 우리들이 이제도 이상 복구할 길이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해 가지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일당의 제사장들이 아주 능력 있는 제사장 의의 선생이라고 불리는 제사장의 인도로 그의 리더십 아래 예루살렘 성전과 절교를 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타락해서 도저히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 곳에 계시지 않는다. 자기와 동조하는 제사장 무리와 평신도들을 이끌고 이런 쿰란 같은 사막에 공동체를 이루어 은거하게 된 거여요. 그것이 에센파였어요.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율법을 철저히 연구하고 부활이나 내세를 이런 것을 믿는 점에서는 바리새파와 신학적으로 같아요. 그런데 이 바리새파는 유대 공동체에 섞여 살면서 그 곳에서 경건운동을 한 반면에 에센파는 이제 저 대다수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사회는 더 이상 어떻게 할 길이 없다. 저것들은 다 암흑의 자식들이다. 저건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멸망시킬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하고 그들과 완전히 관계를 끊고 따로 공동체를 이룬 그 점에서 큰 차이가 있어요. 바리새파는 사두개에 의해서 장악된 성전에 계속 참여해서 다만 이 사두개파와 타협을 이루었어요. 당신들이 제사장들로 성전을 장악한 것은 좋은데 다만 성전에서의 제사는 우리가 해석하는 율법대로 행하라. 사두개파도 타협을 했어요. 바리새파의 법 해석에 따라 제사하고 뭐 하기로 그래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싸우면서도 성전에 계속 나갔어요.
그런데 에센파는 소용이 없다. 에센파는 바리새파 이놈들도 썩은 놈이다. 그래서 에센파 쿰란 동굴에서 나온 문서들을 보면 사두개파와 대제사장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바리새파 에게도 욕을 많이 한다구요. 그래서 에센파는 보니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완전히 철수를 했죠. 그것과 아무 관계없게 되어 버렸어요.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기 시작했냐? 그런데 이 에센파의 원래의 시작이 누구냐면 제사장들이 시작했단 말이어요. 에센파의 쿰란 공동체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공동체를 조직을 어떻게 했느냐면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조직과 똑같이 했어요. 성전에서의 제사 여러 등급의 제사장들 그리고 평신도들 이렇게 여러 조직을 그대로 성전 공동체의 조직과 똑같이 하고 여기서 더 이상 증거를 조사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사상이 발달 하냐면 이 공동체 자체가 성전이다.
왜 그러느냐면 성전이라는 곳의 원래 의미는 하나님의 거처지란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버렸다 떠났다 그러면 어디 계시느냐? 이스라엘 중에 계신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무엇이냐? 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다수 공동체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다. 타락한 사람들이니까 하나님께서 벌써 떠났다.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다는 말은 그 성전을 중심한 유대 공동체에서 떠났다. 하나님은 자기들 중에 계신다 왜? 자기들이 진짜 이스라엘이다. 자기들이 참 이스라엘이다. 자기들만 언약에 신실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뭐냐?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공동체가 이스라엘인데 저 지금 예루살렘 성전 타락한 성전 하나님이 버린 성전을 중심한 저것들은 언약을 파괴한 자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에게 계시지 않는다. 자기들이 언약에 신실하다. 자기들의 언약에 신실함이 무엇으로 나타나뇨? 율법연구와 율법준수로 나타나요. 자기들이 참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성전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모든 이 속에서의 율법연구와 율법준수 활동 예배 기도 찬양 목욕 이런 것들이 전부 제사와 찬양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율법에 따라 살려고 하는 행위 전체가 제사행위다. 이렇게 본 거여요. 그러니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성전이란 것을 더 이상 건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이라고. 왜? 자기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심으로. 어떻게? 영으로 거하심으로. 그리고 제사라는 것을 더 이상 짐승의 피를 뿌리고 짐승의 살을 불태우고 이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행위가 제사다. 그러니까 성전이나 제사라는 말을 문자적으로 쓴 것이 아니고 이른 바 영해해서 쓴 거죠. 문자 건물이 아니고 제사가 문자 짐승을 바친 것이 아니고 영적인 뜻으로 해석을 해서 썼다 이 말이어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쿰란 공동체의 문서에 보면 이 면과 또 하나의 면이 뭐냐면 종말에 빛의 자녀들인 참 이스라엘인 자신들과 저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저 암흑의 자식들 그리고 그들 뒤에 있는 로마세력 이방인들과 거룩한 전쟁이 벌어진다. 그때 자기들을 천사장들이 하늘의 군대를 몰고 와 가지고 자기들의 거룩한 전쟁을 지원하게 되는데 그때 전쟁을 어떻게 수행해야 된다는 긴 문서가 있어요.
그 문서를 보통 1Q이라고 하는데 그때 종말에 전쟁이 날 때에 자기들이 빛의 자녀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어디로 치고 이런 긴 문서가 있다고요. 이 분서와 함께 지난 번에 이야기한 11Q 성전이라는 긴 문서가 있어요. 그 문서에 보면 이렇게 종말에 성전을 치러서 자기들이 결국 시온 예루살렘을 탈환을 해요. 암흑의 자식들을 전부 무찌르고 그러념 예루살렘에 새 성전을 짓는 거여요. 그래 가지고 정통 제사장을 세우고 정통 제사장에 의해서 율법대로 순수한 타락하지 않은 더럽혀지지 않는 짐승제사를 드리게 된다. 종말에 문자적인 심판과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린다는 사상도 겸하였어요. 종말에 그때까지는 자기들의 공동체가 성전이고 그 공동체 내에서의 모든 하나님 말씀 연구와 그 말씀에 따라 살려는 것을 제사라 한다.
자 여러분들 제사와 성전이라는 말을 이렇게 영해해서 해석하는 것은 쿰란 공동체가 이렇게 했다고 그러는데 이것은 우리 신약성경과 아주 비슷하죠. 고전 3장에서 바울은 뭐라고 그래요. 고린도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왜? 주의 영이 너희 가운데 거하니까. 쿰란 공동체도 하나님의 영이 자기들 가운데 거하니까 또는 하나님이 영으로 자기들 가운데 거하니까 바울은 한 술 더 떠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니까 . 그래서 우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이거죠. 고린도의 음행하는 자들에게 뭐라고 경고해요? 너희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또 가령 롬12:2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몸을 성전의 짐승 제사 바치듯이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고 몸이란 말은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 제사로 드려라. 그 때의 제사는 문자적인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바침. 도리어 이 사람들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고 그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그런 삶을 살라. 구체적으로는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인 이웃을 사랑하고 이런 것이 다 제사라 이 말씀이어요. 하나님께 찬양하고 이런 것이 다 제사다. 이런 점에서 우리 신약과 아주 비슷하죠. 쿰란 공동체 사람들의 생각이.
그러면 쿰란 공동체 사람들이 갑자기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 그런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 부터 그런 가르침이 있어요. 우리가 한 번 시편 114편 :22절을 한 번 읽어 보세요.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지금 성소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 말이 여호와의 집이라는 말이어요. 집을 성소라고 번역을 했는데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리라” 지금 유다 이스라엘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뭐라고 그래요? 하나님의 집이라 이거여요.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 영토라는 말은 나라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나라가 동의어인 것. 유다와 이스라엘이 동의어이듯이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나라 요즘 지금 개역번역에는 성소와 영토라고 번역하는 말이 원래는 집과 나라라는 말이어요. 그러니까 집과 나라가 같은 뜻이죠.
지금 여러 시간을 들여 가지고 예수의 성전에 대한 가르침을 아마 여러분들 처음 들었을 거여요. 아마 신약신학에서도 학자들도 이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안 가졌어요. 최근에야 상당히 중요하구나 관심을 갖게 된 거여요. 그래서 내가 일부러 시간을 들여서 예수의 성전에 대한 말씀을 드리는데 왜냐면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중요한 일부였고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께서 지난 번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산헤드린의 최종 재판도 받고 처형되기도 하고 얼마나 중요한 주제입니까? 그래서 좀 자세히 하는데 하여간 여기 보세요. 우리는 무슨 관점에서 부터 시작했어요? 지난 2-3주간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성전의 언어로 선포했다.
그런데 예수가 처음 그런 줄을 알았는데 시 114편에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나라가 동의어여요. 그런데 집이란 말은 우리 말에도 집이란 말이 얼마나 뜻이 여러 가지여요. 家, 건물의 뜻도 있고 가족의 뜻도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에게 뭐라고 약속했어요? 내가 너희 집을 세우겠다. 무슨 소리? 너의 왕조를 세우겠다. 이렇게 집이란 말이 여러 가지 뜻이 있죠.
구약에서 집이란 말이 그렇게 말해요. 하나님의 집이라 했을 때는 일차적으로는 무슨 뜻이죠. 성전 건물을 두고 그러지요. 성전 건물이 하나님의 집이죠. 거기에 하나님의 어좌가 놓이고 하나님이 거기 앉아 계시니까 또 하나님의 집이라 할 때는 무슨 뜻? 이스라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집이라 했어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집이라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집이죠?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그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가운데 계시니까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을 물리적으로 상징하는 것이 성전이고 그 성전의 지성소고 지성소의 언약궤의 뚜껑이 하나님의 어좌라. 이렇게 집이란 말이 건물성전을 가리키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기도 하는 이 이중의미를 갖는 것을 우리가 구약에서 부터 쭉 살펴 볼 수가 있어요.
바로 그러한 사상에 근거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집 노릇을 못 할 때에 하나님의 집은 그러면 뭐냐? 하나님이 하늘에 하나님의 집이 있듯이 땅위에다 하나님의 거처지가 있는데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지가 아니면 그러면 뭐가 하나님의 거처지냐? 진정한 참 이스라엘의 공동체 자신들이 하나님의 거처지다. 이렇게 쿰란 공동체 사람들이 구약에서 부터 오는 가르침에 근거해서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인데 지금 그 점에서 예수가 쿰란 사람들과 같아요. 그리고 예수의 제자들 사도들 지금 우리가 아까 바울에게서 예를 들었습니다만 그 점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이어 받았어요. 다만 뭐만 달아요? 이 사람들은 종말에 건물을 지을 것을 생각했는데 예수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무슨 점에서 같아요? 예루살렘 성전이 더 이상 성전이 아님 하나님께서 더 이상 거기 거하지 않으심. 그러면 하나님이 거하는 성전이 뭐냐? 쿰란 공동체는 자기들이 공동체라고 주장했는데 예수는 자기가 새로 세우는 새로운 공동체를 성전이라 했던 것이다. 그것이 뭐냐?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그런데 이것을 예수는 어떻게 세워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서 사람들을 사단의 통치 아래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통치로 불러들임으로 초대로 초대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새로 구성하는데 그것이 성전이다. 왜 그것이 성전이냐? 그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데 언약의 하나님으로 주님으로 거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을 선물하고 순종을 요구하는 주님으로 거하신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구원을 위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신뢰하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그런 관계에 놓이게 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의 의도였고 그것을 예수는 성전이라는 그림언어로 그리셨다.
그러면 예수께서 이런 성전을 짓는다고 그랬는데 자기가 사흘만에 새로 짓는다고 그랬는데 그 성전을 어떻게 짓느냐? 성전을 짓는 수단 그것은 전에 오늘 읽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 말씀 이전에도 제가 간단히 설명을 했는데 그 잔의 말씀을 보면 자기 죽음이 대속의 제사라는 거죠. 많은 사람을 살리는 그 말은 어디서 왔다고 그랬어요?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극으로 자기 제자들에게 해석을 주었어요. 그런데 뭐라고 해석을 주었어요? 이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다. 피의 제사다.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이 말은 이사야 53:10-12절에서 왔다고 그랬죠. 그것은 뭐냐면 죄 아래 주의 종이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로 자신을 내어 줌으로 그 하나님의 백성을 의롭게 한다는 예언을 성취하는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께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백성의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받아 그들을 의롭게 하는 대속의 제사다. 언약의 피다. 그 소리는 언약을 세우는 제사라는 말이어요. 이것은 출애굽기 24:8절과 그 외 여러 곳의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언약을 세우는 제사 언약을 세우면 무슨 일이 벌어져요?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거여요.
그러니까 예수는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두 개의 범주로 해석을 했어요. 하나는 대속의 제사로. 대속의 제사로 초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죄가 용서되어서 의롭게 됨.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짐. 또 하나의 범주는 언약의 제사로. 그것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고 선언함.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 노릇해 주겠다고 약속함.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해서 살게 되는 그런 백성이 창조됨. 이렇게 자기 죽음을 설명하는데 여러분들 보세요.
자기 죽음이 제사라고요. 제사는 뭐여요? 성전에서 드리는 것이 제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자기 죽음이 마지막 제사여요. 그래서 새로운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제사. 그러니까 그 위에 제사가 더 필요 없는 거여요. 그러니까 성전 건물이 더 필요 없는 거여요. 그 건물 성전에서 다시 짐승제사가 필요 없는 거여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예수가 성전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성취함으로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말이어요.
시간이 가서 여기서 마치겠는데 이 다음시간에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성전의 의미를 성취하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어떻게 성전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인가 이것부터 시작을 해서 아마 우리 가운데 있는 질문들 다윗왕조와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다윗왕조의 복원이라. 동일시했는데 예수는 다윗왕조와 하나님 나라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았는가 그 질문에 답을 해야겠고 또 하나는 지금 우리가 읽은 본문이 막 14: 25절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마실 때 까지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신 날 까지는 마시지 아니 하리라.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 된 그때에 하나님 나라의 그 사이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어떤 의미로 하나님 나라라 할 수 있나?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지금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할 수 있나? 이런 문제들을 이 다음 시간에 우리 토론하기로 합시다. 오늘은 역사적인 배경을 좀 많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