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6) - 눅12장 22-32 (김세윤 교수)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내재성
눅12장22-3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눅 12장 22-3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바보부자에 대한 비유를 하시고 곧 자기 소유의 넉넉함에 만족해서 곳간에 잘 곡식을 많이 쌓아놓은 것을 두고 이제 19절에 ‘내 영혼에게 이르되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니라’ 하는 부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뒤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렇게 맘몬을 숭배하면서 맘몬을 의지하고 맘몬에게 안전과 행복을 얻으려는 이런 우상숭배의 삶을 경고하시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 아래서 하나님께 바라고 사는 삶에 대해서 이제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22절 부터 교독합시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가르치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백홥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세상 백성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온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하겠어요. 그런데 중간에 쉼이 있어 가지고 벌써 지금까지 생각했던 점들이 무엇이었는가 잊어버린 분들이 좀 있을 것 같아서 간단 간단이 제목만 요약을 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곧 온다고 선포했다는 것. 미래에 오는데 곧 온다고 선포했다는 것. 그런데 곧 오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다고. 구체적으로 세상적인 이해를 비유로 삼아서 자세히 그리기 보다는 그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함이어서 하나님의 그 삶을 얻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신적인 삶을 얻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 결핍이 없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이 없는 것이다.
고난들이란 죽음의 증상들인데 그런 것들이 없는 삶이다. 그렇게 주로 가르치시면서 그 점을 효과적으로 가르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쓰신 아주 많이 쓰신 비유들이 하나는 잔치의 비유이고 하나는 상속의 비유를 많이 쓰셨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잔치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풍요로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에는 더 이상 결핍이 없고 결핍에서 오는 고난이 없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온전해 짐이다. 또는 하나님 아빠의 무한한 부요를 상속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같은 그림이죠. 같은 진리를 말씀하고자 하는 그림이죠.
창조주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부요함을 나의 아빠의 것으로 상속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결핍속에서 그 결핍으로 부터 오는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결핍과 고난으로 부터의 해방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무한한 삶을 얻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삶을 성경적인 숙어로 말한다면 영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은 곧 그 영생 신적인 삶 하나님의 삶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주로 설명을 했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곧 오고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와 같은 영생의 축복이 곧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미래적으로만 설명을 하지 않고 지금 현재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기서 벌써 실재가 되어 간다고 설명을 했다. 지난 번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그래서 벌써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듣고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벌써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와서 우리에게 주어지리라고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벌써 실현되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며 사람을 온전케 하는 이런 일들을 많이 하셨다. 그것은 특히 안식일 날 그 일을 많이 하심으로 태초의 안식의 온전함.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그 풍요로움 에덴동산의 낙원의 그 풍요로움 삶을 누리게 됨.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금 실현되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태초의 원래 안식일이 회복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주로 안식일 날 병 고치는 일을 많이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이라는 것이 태초에 온전한 상태로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안식을 가져오는 것이다는 것을 시위하려고 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면 지금 문제가 하나 발생해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온다고 그랬는데 또 벌써 지금 실현이 되어가고 있다고 지금 벌써 실현이 된다고 했는데 시간적으로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또는 조화 되는가 미래에 온다고도 가르쳤고 지금 실현된다고도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학자들은 한동안 많이 토론을 했어요. 금세기 전반부 까지는 많이 토론을 했어요.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이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온다고 하는데 있는가 아니면 현재 실현이 된다고 하는데 있는가 이런 것을 많이 토론을 했는데 1950년대부터 금세기 중반부터는 학자들이 대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어서 일치를 보았어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온다고도 가르쳤고 현제 실현이 된다고도 가르쳤는데 미래에 온다는 것은 미래에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를 통해서 지금 현재 실현된다는 것은 그 하나님 나라가 이제 출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출범! 그래서 출범과 완성이라는 말로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 된다. 그래서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올 것이며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미 출범했다는 것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다고 할 수 있고 지난번에 우리 본 바와 같이 눅 7장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들 가운데 이미 임했다고 할 수 있죠.
이것은 원래 유대인들의 종말론을 그리스도께서 더 자세히 가르쳐줌이지요. 유대인들은 원래 구약과 유대교의 신학에 의하면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서 통치하는 이 세상 그러니까 사단이 죄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이 세상 끝에 하나님이 오신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를 보낸다. 그래서 오는 세상이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출범시킨다. 이렇게 봤어요.
그래서 두 세상 두 세대로 나누어서 생각을 했어요. 이 세대는 사단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해서 죄악과 고난으로 통치한다. 그래서 이 세대는 사단을 우상들을 통해서 실제로는 사단을 섬기는 이방인들이 득세하는 세상.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고 못살게 구는 세상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셔서 이 역사속에 오셔서 사단의 통치를 꺽고 그러니까 이 세대를 종결시키고 오는 세대를 출범시켜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이 된다. 의와 생명의 통치가 이루어 진다. 이렇게 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언제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의 통치를 이룰까 빨리 좀 그러셨으면 지난번에 우리 예수의 하나님 나라 공부할 때 유대인들의 그 기도하나를 제가 소개했죠.
우리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내용적으로 많이 연결되어 있는 기도라고 하나님의 통치가 빨리 이스라엘의 모든 가정에 유대에 나타나기를 바라는 기도하나 소개했지요. 주께서 그의 나라를 너희의 생애에 너희의 날에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의 생애에 신속히 그리고 곧 세우시기를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리고 지난번에 간절히 묵상했던 것과 같이 이 이방인들을 통한 억압이 심하면 심할수록 이스라엘 사람들은 언제까지이니이까? 언제까지 하나님께서 약속의 성취를 지체하셔서 우리를 이 고난 가운데 두시렵니까? 언제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렵니까? 하고 하나님께 탄식했죠. 시편과 선지자들이 그것이 언제까지입니까? 언제나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시렵니까? 라는 탄식으로 가득 차 있죠. 십자가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선포하는 기쁜소식은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온다는 거여요. 그러니까 언제까지나이까 하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알마나 기쁜소식이어요. 하나님의 통치가 곧 온다. 사단의 죄악과 고난의 통치가 금방 꺽고 의와 생명의 통치를 이루실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온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말이어요.
곧 오는 것만이 아니고 지금 벌써 왔다. 지금 벌써 출범을 했다. 나의 말씀선포를 통해서 그리고 나의 말씀대로의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나를 통해서 실현됨이 어떻게 나타나요. 병자를 고치고 치유함으로 나타난다고 그랬죠. 죄악과 고난의 통치에 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킴으로 실증된다고 그랬지요. 삭개오 같은 사람이 온전해 지고 38년 된 병자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손마른 자가 문등병자가 깨끗해지고 혈루병자가 깨끗해지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의 통치가 지금 실현되고 있다. 그런데 그 통치가 언제 완성이 되냐면 미래에 완성이 된다. 지금 현재 실현되기 시작했어요. 출범을 했어요. 미래에 완성이 된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어요.
이것을 우리가 다음에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겠는데 우선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그리스도께서 흔히 쓰는 동사들은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동사여요. ‘오다’ 아주 독특한 어법이어요. 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여기 오늘 읽은 본문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주신다고 하죠. 하나님 나라가 온다.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신다. 인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하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다. 이것도 예수의 독특한 어법이어요. 이런 어법이 구약이나 유대교의 문서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어법이.
그러니까 또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고 그래요. 인간이 하는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또 하나님 나라를 받아요. 반면에 이것의 의미 어법의 함축 의미를 더 확실히 알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쓰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어법과 비교나 대조를 해보면 좋죠.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는 말을 많이 쓰죠. 우리 기도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이루기 위해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해야 된다고 하죠. 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 선교사를 보내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고 이런 말을 우리가 많이 하죠.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런 말을 일체 쓰지 않아요. 복음서들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든지 확장하다라든지 하는 말을 쓰지 않아요. 왜 그런가? 우리가 금방 알 수가 있지요.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동사들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여요. 그리고 그것의 은혜성에 대한 강조여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에 대한 강조 하나님 나라가 인간들이 그들의 노력으로 그들의 힘으로 그들의 재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에요. 초월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어요. 우리 인간들이 이루면 그것은 내재적인 것이지요. 이 우주의 내제적인 현실 그것이 아니고 이 우주 밖에 계신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초월자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에요.
여기서 주신다 받다에는 무슨 뜻이 숨어 있느냐하면 그 말이 그래요. 이 말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느냐면 상속의 뜻이 들어 있어요. 우리가 그 상속을 받는다.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나님 나라를 상속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거여요. 우리가 이미 여러분 생각했습니다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의 탕자의 비유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 다시 아들로 회복되고 아들로 회복이 되면 그 아버지의 상속자로서 회복이 되는 거여요. 그래서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 아버지의 부요한 잔치에 들어감. 탕자의 비유가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비유데 대한 아주 훌륭한 비유지요.
이렇게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했어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룬다든지 또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확장한다든지 이런 언어를 일체 안했다고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 인간들의 내재적인 산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언어를 일체 안했다고요. 왜냐하면 이것이 전에도 한 번 설명했지만 구원의 조건들이어요. 이 두 가지를 갖춘 것이 구원이어요. 거꾸로 말합시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초월적인 것이어야 하고 그것은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어요. 전에도 한 번 설명을 했지만 새로 오신 분도 있고 또 전체를 한 번 더 체계적으로 생각하는 마당이니 다시 한 번 설명을 드리겠는데 이른바 세상의 고등 종교들의 신관 신론들과 거기에 따른 그들의 구원론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비교해 보면 이 진리를 우리가 금방 깨달아요.
인도종교들은 원래 인도의 힌두교라든지 아주 쉽게 말해서 개혁 힌두교라고 볼 수 있는 불교라든지 이런 종교들의 신론을 뭐라고 그래요. 범신론이라고 그래요. 범신론이라고 그러죠. 범신론은 그러니까 힌두교나 불교는 범신론을 가진 종교여요. 그 종교에서는 신의 초월성을 부인해요. 하나님의 초월성. 우주 밖에 무슨 초월하는 신이 있는게 아니어요. 우주가 신이어요. 우주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합일신이다 그렇게 보는 거여요.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그 하나의 신의 표상들이어요. 이 표상들은 사실은 그 신 우주의 본질적인 신의 다양한 나타남의 형상들이기 때문에 그 형상들이라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다만 그렇게 나타날 따름인 그러니까 환상에 불과한 것이어요. 불교용어로 말하면 삼라만상이라는 것이 실제가 아니고 실제신의 다양하게 나타날 따름인 표상들이고 그러기 때문에 환상들이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선과 악, 진리와 거짓 뭐 이렇게 아름다운 것과 추함 이렇게 나누어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다 헛된 나눔이어요.
선이라는 것도 악이라는 것도 없고 무슨 추악함이라는 것도 없고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없고 그런 것이 다 하나의 신의 다양한 표출 나타남에 불과한 거여요. 그러니까 무슨 나무 사람 소 돼지 이런 것들이 다 하나의 신의 다양한 표출 나타남이다. 이런 신론을 가진 그러니까 신의 초월성을 부인한 신을 가진 종교는 자연히 구원론이 어떻게 설정이 되냐면 자력구원론으로 설정이 되어요.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해야 됨. 왜냐하면 우리를 우리 밖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무슨 신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우리가 그 신의 하나의 표출이어요. 그러니까 우리 밖에 우리 보다 크신 이로서 문제를 해결해줄 그런 신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 문제가 있다면 자기 힘으로 해결을 해야 되는 거여요. 자력으로 해결해야 되는 것이어요. 어떻게 해결을 하느냐 지혜 깨달음이죠. 깨달음을 터득을 해서 우주의 본질인 그 신과 다시 합일됨을 통해서 또는 선행을 통해서 주로 이 두 가지를 구원의 방도로 삼지요.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신비적 요가라든지 참선이라든지 이런 심신의 단련을 통해서 우주의 본질과 합일되는 신비적 체험을 하는 것이죠. 그런 것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그러는데 자력으로 입니다. 자기 힘으로 이런 자력구원론이란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면 그러니까 자력구원이 가능하다면 인간이 원래 구원받아야할 이유도 발생하지 않죠. 우리가 제한 된 존재이고 결핍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혜가 부족하고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고 하기 때문에 고난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죽음들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시간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죽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제한성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우리의 제한된 자원으로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실 자력구원론이란 구원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여요. 이것 인본주의 사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해결할 수 없는 거지요.
반면에 또 이슬람교는 이런 종교들의 신론을 이신론이라고 그래요. 이신론은 신의 내재성을 부인해요. 그가 은혜로 우리 가운데 오심 내재성을 부인해요. 그러니까 이신론은 신의 초월은 있으나 신의 은혜로 이 세상에 오심. 내재성을 부인해요. 이슬람 신관에 의하면 알라가 세상을 창조한 분인데 그림으로 말하면 저 하늘 꼭대기에 혼자 고고히 앉아 있는 거여요. 그래서 이 타락한 세상 속으로 오시지 않아요. 그래서 이슬람 나라 가보세요. 회교나라 가면 하루에 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회교사원의 높은 탑 있지요. 미나베트라고 하는데 거기에 이 사람들 기도하러 오라고 불러요. 그런데 그 부름이 아라비아어로 이슬람의 근본적인 신앙고백을 시작한다고 그래요. 그것이 뭐냐면 두 마디여요. 알라는 전능하시사.
둘째로 그 다음은 제가 모하멧이 그 선지자이다. 이슬람의 근본적인 신앙고백이 두 마디여요. 알라는 전능하다 위대하다. 그리고 모하멧이 그의 선지자다. 그런데 알라는 전능하시다는 말은 신의 초월성이 더 강조. 그것이 너무 강조되어 가지고 그 초월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 속으로 오시느냐? 오실 수 없다. 그래서 이 내재성을 부인한다. 이런 신관을 가진 종교는 그러면 구원론이 어떻게 성립이 되냐면 아주 숙명론으로 빠지든지 창조주 알라가 우리 모두를 창조할 때 원래 모두를 결정한 숙명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짐. 결정론이지요. 운명론이지요. 그래서 구원받기로 한 사람들은 구원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니고 이렇게 아주 숙명론으로 빠지든지 그래서 이슬람 사람들이 말끝마다 하는 소리가 알라의 뜻대로 하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아주 깊은 숙명론에 빠져 있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든지 그런데 깊은 숙명론에 빠져 있으면 인간의 위로가 없다고요.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도 구원에 대해서 논해야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사람들도 자력구원론을 논할 수 밖에 없어요. 인간이 스스로 지혜를 얻어서 또는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감. 왜? 이신론에 의하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초월자는 계시는데 그가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여기서도 구원이 인간이 스스로 이루어 가야 되는 거여요. 아까 여기 범신론의 신론에 있어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런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요. 그러기 때문에 자력구원론으로 빠져들듯이 반면에 이신론에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있으나 그가 우리를 구원하러 오지 않으므로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야 되요. 그렇게 되는 것이어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그러나 자력구원론이란 사실은 불안한 이야기라 구원이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여요. 보다시피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를 구원하는 그 신은 초월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어야 하며 그 분이 이슬람 같이 혼자 저기 한 꼭대기에 앉아서는 소용이 없어요.
그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셔야 되요. 내재성과 초월성 또는 신의 초월성과 은혜성과 내재성 이것은 그러니까 진정한 구원이 있기 위한 조건들이에요.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 생각하는 거여요. 이것이 복음이라 이 말이어요. 이것이 왜 기쁜소식이냐? 아주 쉽게 말하면 초월하셔서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시고 영원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신다. 계실 뿐만 아니라 그가 우리의 그 무지함 속에 우리의 그 죄악스러움 속에 우리의 고난 속에 우리의 죽음 속에 방치해 버리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오셔서 그 분이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통치로 베푸신다. 이것이 기쁜소식 아닙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로 시작해서 막 1: 15절에서 마가는 그리스도의 선포를 무슨 말로 요약해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가 복음 됨이 기쁜소식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리 인간들이 이 제한된 우주속에 우리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그냥 방치되어 버린 것이 아니고 그렇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지요. 우리보다 크신 우리를 지으신 무한하신 하나님 초월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다. 그 분이 지금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통치를 베푸신다. 이것이 기쁜소식이어요. 그리스도가 선포하는 기쁜소식.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 제기한 질문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 첫 답은 뭐여요. 하나님 나라가 초월해서 은혜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 하나님 나라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행위들은 다들 수동적인 의미이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초월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것이다라는 말은 무엇을 부인하는 말이어요. 아까 말한 대로 하나님 나라가 표상하는 상징하는 구원이란 것이 인간의 자력에 의한 것일 수 없다. 그 말이어요.
그러므로 모든 인본주의에 대한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은 모든 인본주의에 대한 선전포고라고도 볼 수 있는 거지요. 지난 번에도 설명을 했습니다만 모든 인본주의는 자력구원론은 항상 두 가지를 구원의 방도로 삼는다고 그랬지요. 하나는 지혜이고 지식 하나는 선행 이것에 근본적으로 하나를 덧붙인다면 신비적 합일의 체험 심신의 수양을 통해서 신비적으로 우주의 본질과 합일한다는 그런 체험 이런 것을 주로 지혜와 선행을 구원의 방도로 삼는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것이 우리를 많이 홀린다고 그랬어요. 왜 그러느냐면 인간이 지혜를 잘 개발하고 선행을 잘 개발하면 정말 삶이 확대되는 것 같고 그래서 이것들을 통해서 구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전에 작년 이맘때도 특강으로 설명을 했지만 인간들의 과학의 발달로 자연에 의한 관찰로 얻은 지식 과학적인 지식 그것의 지식의 활용을 통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교통통신수단이 발전해서 우리의 삶이 얼마나 확대되었어요. 우리가 얼마나 풍요롭게 되고 우리가 얼마나 장소적 제약을 극복하고 우리가 얼마나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고 우리가 얼마나 삶이 확대되었어요. 그것으로 계속 지식을 개발해 나가면 우리의 문제들을 우리가 다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환상을 우리에게 주어요. 그러나 이 인본주의적인 방법은 항상 삶만 확대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또 그만큼 확대한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산업혁명이 우리로 하여금 농업혁명이 우리로 하여급 배고품 그리고 소비적인 결핍으로 부터 해방을 가져와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확대했으나 그만큼 물질주의적인 가치관으로 말미암는 인간성 황폐를 가져오고 그만큼 자원고갈 공해 이런 것으로 죽음이 확대되는 거여요. 교통통신수단의 발달이 우리로 하여금 장소와 시간적인 제약으로 부터 많이 해방을 해서 우리 삶이 그만큼 풍요롭게 풍부하게 확대했지만 동시에 그 첨단 통신수단의 방비가 우리를 시간과 장소의 제약으로 부터 자유롭게 하는 그 첨단 통신수단의 장비가 우리 모두를 속박하는 거여요. 우리 모두를 속박하는 죽음이 그만큼 확대되었다고 그랬지요. 그래서 전화가 우리를 속박하고 첨던 통신수단의 장비가 우리를 일거수 일투족 감시함으로 인한 속박이 일어나고 이렇게 인간이 아무리 지혜를 개발하고 선행을 개발해서 구원을 이루려고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삶과 죽음의 삶이 확대되는 만큼 죽음이 확대되는 변증법적인 실제만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지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죽음의 이면이 없는 온통 순수한 삶 덩어리만의 축복은 있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자력구원론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도대체 초월 온전한 자로부터 우리의 구원이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학에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루어야 된다는 강조하는 신학이 있죠. 이른바 요새말로 하면 해방신학이라고 하지요.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역사의 과정속에서 투쟁해서 자유를 확대하고 정의를 확대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이루어서 이렇게 해서 이 땅에 샬롬을 이루어야 된다. 그런 것을 우리는 해방신학이라 그러지요.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주신다는 언어를 쓰면서 동시에 제자들더러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너희들의 지혜를 너희들의 선행을 동원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라.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는 것은 크게 말하면 인본주의적인 철학에 대한 선전포고이면서 좁게는 신학적인 맥락에서 말하면 해방신학에 대한 거부이기도 해요. 해방신학에 대한 것이 요새 나오는 것만이 아니고 예수 당시에 아주 절실한 신학이었어요. 왜? 열심당 열혈당의 신학이 사실은 해방신학이었어요. 자기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압제자 로마 사람들과 그들과 결탁한 집권층과 무력투쟁을 통해서 민족을 해방하고 거기에 자유와 정의와 평화가 있게 한다는 것이 예수 당시 아주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한 열심당이었어요. 그들도 하나님의 통치를 내세워서 그런 그 인간들의 투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야 된다고 그래요.
예수 당시 아주 절실한 대안이었어요.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주 인기 많이 얻고 많은 사람들의 동감을 얻었던 운동하나가 열심당이었어요. 거기에 반해서 지금 예수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초월에서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힐 때 누구와 누구의 죽음과 생명이 교차합니까? 바라바와 예수의 생명이 교차하지요. 바라바가 누구여요? 바로 이 열심당원이지요. 그러나 우리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가 어떻게 오느냐를 가르치면은 초월에서 은혜로 오기 때문에 해방신학과 같이 예수 당시의 열심당의 신학 같이 또는 오늘날의 해방신학 같이 인간들이 무슨 투쟁을 해서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러니까 해방신학은 틀렸고 우리 신학이 옳다. 이렇게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만족케 할 수 있는데 사실은 우리도 보수 경건주의자들도 해방신학 같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겠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그런 신학을 가지고 있어요.
그것이 여러가지로 많이 나타나요. 하나님의 공로신학으로도 나타나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 섬김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신의 도에 맞게 반대 급부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다. 그런 신학이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어요. 그것은 사실 해방신학은 사회구조로 개혁하고 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게 좀 큰 체제로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경건주의자들은 그것을 개인의 삶 아주 개인주의적인 평면으로 줄여서 생각한다는 차원만 있지 사실은 똑같이 하나님 나라 구원을 자기 힘으로 얻어 내려고 하는 자력구원론으로 빠져있는 거여요. 또는 우리가 선교도 가끔 그렇게 생각을 하지요. 우리가 선교사를 보내고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사회에서 다분히 개인윤리 차원에서 우리가 거짓말 안하고 아주 개인윤리적인 차원에서 아주 소극적인 윤리에서 어떤 음식을 삼가하고 몇 가지 율법들을 잘 지키고 이렇게 해서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게 하겠다. 이런 태도를 갖는다든지 이렇게 해서 우리 경건주의자들도 까닥 잘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거슬려서 자력구원론에 빠질 때가 참 많아요. 우리가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하나님의 초월에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을 아주 근본적으로 잊지를 말아야할 것이어요.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또는 확장한다는 이런 말을 전혀 쓸 수 없느냐 예수는 안 썼지만 어떤 맥락에서는 그래도 쓸 수 있지 않겠느냐 아마 쓸 수 있을 것이어요. 어떤 맥락에서? 선교맥락에서.
가령 예수께서 열두제자를 보내시고 70인 제자들을 보내시고 나중에 그의 교회전체를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하셨지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도록. 교회는 보냄 받은 자들의 공동체여요. 뭐 하러 보냄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사는 동네에서 또는 직장에서 먼 나라에 이르기 까지 보내고 또 우리가 가고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에 믿음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 생기죠.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생기죠.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들이 사단의 주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주로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함. 그것이 그들의 사고와 그들의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나타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뭐한다고 볼 수 있어요. 이루어졌다고 실현이 되었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우리의 복음전파 우리의 제자도의 삶 하나님의 통치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사는 삶은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삶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 그런 영역이 확대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선교 우리 제자도의 삶 사랑의 행위 이런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확장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거여요. 이차적으로 그리스도는 그 말을 안 썼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이런 말을 쓰기는 쓰되 그때 염두 해 두어야할 것은 그것이 이런 해방신학이나 또는 경건주의자들 공로의 신학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서 써야한다. 어떻게 하면 변질되느냐. 하나님의 초월에서 그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는 신본주의적인 하나님 중심주의적인 신본주의적인 관점을 우리가 망각하면 우리는 이런 해방신학이나 공로주의신학을 중심으로 한 경건주의적인 신학으로 전락을 해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것과는 동떨어진 생각을 갖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이 뒤틀리게 되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이루는 삶이 못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실현시키는 그래서 우리와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온전함을 맛보게 하는 삶이 못되고 정반대로 죽음을 더 앙양하는 고난을 더 앙양하는 삶이 되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시간에 더 하기로 하겠어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 처음 조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