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하게 하소서 - 주기철(1897-1940)
오, 주여!
저로 하여금 당신의 낮아지신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은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영화로우신 하늘의 보좌 위에서
천군과 천사와 하늘의 모든 영물과 천천만 성도에게서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던 만유의 주재이셨습니다.
그런 당신께서 낮고 천한 사람이 되어
티끌 세상에 오셨나이다.
오시되 왕후장상(王侯將相)으로,
금전옥루(金殿玉樓)에 오시지 않고,
지극히 미천한 사람으로 구유에 오셨나이다.
사람이 다 싫어하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고,
어린아이의 동무가 되셨고,
걸인과 나병 환자의 벗이 되셨나이다.
마침내 벌거벗은 몸으로 강도의 틈에서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시고 음부에까지 내려가셨나이다.
오, 당신이 이같이 낮아지신 것을 생각할 때
저는 어떻게 하오리까?
저는 저를 어디까지 낮추어야
당신 앞에서 합당하겠습니까?
당신이 제자의 발을 씻기셨으니
저는 나병환자의 발을 핥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이 세리의 집에 들어가셨으니
저는 모든 사람의 발 앞에 짓밟히는
먼지와 티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 주여!
저는 아나이다.
당신은 무아(無我)의 경(境)에서 살기까지 겸손했음을.
그러나 저의 속에는 여전히 ‘나’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좌정하실 자리에 이놈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받으실 영광과 찬송을
이놈이 받고자 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남이 저를 대접함이 소흘하다 싶을 때에
이놈이 속에서 불평을 말하고,
남이 저에게 모욕과 멸시를 가할 때에
이놈이 속에서 노를 발하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못 받으시던 관대와 환영을 제가 받고자 하나이까?
당신은 그 지선지성(至善至誠)으로도
오히려 모욕과 침 뱉음 당하고 뺨을 맞으셨는데
저는 무엇이관데
당신이 못 받으시던 칭찬과 영예를 받았나이까?
오, 주여!
저로 하여금 이 외람된 오만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성신의 방망이로
이 ‘나’라는 놈을 마정방종(摩頂放踵)으로 때려 부수시사
당신과 같이 무아의 경까지 제 마음을 비워 주소서.
오, 주여!
저는 의를 사모하여 마음이 갈급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완전을 사모하여 마음이 불타지 않습니다.
저의 죄악을 위하여
재에 앉아 가슴을 치는 통회가 심각하지 못합니다.
저의 부족을 항상 생각하고자 하는 정열이 강하지 못합니다.
이는 분명히 제 맘이 비어 있지 못한 증거요,
제 스스로 무던하다는 오만이외다.
오, 주여!
당신의 얼굴빛 아래
제 심령의 자태를 드러내시사
저로 하여금 애통하고 회개하게 하옵소서.
오, 주여!
저는 당신의 겸손을 사모하옵고
당신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_주기철 1897-1940, 목사, 순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