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 - 구교형
“바른 경제는 거듭 묻고 추구해야만 찾을 수 있다.”
Ⅰ. 우리는 지금, 왜 경제를 물어야 하는가?
경제문제를 앞에 두고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갈라진다. 한편에선 경제야 말로 인간생활의 전부요, 그것만 풀리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처럼 여긴다. 다른 한편 세상에 더 중요한 가치들이 얼마나 많은데 기껏 먹고 살아가는 정도에 집착하느냐며 무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는 ‘세상의 전부’는 아니지만, 굳이 관심가질 필요가 없는 주변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경제는 매우 중요하며, 갈수록 더 중요해져 간다.
예수님은 경제문제를 한 번도 무시한 적이 없다. 그는 “사람이 떡(경제)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 4:4)고 하였고, 또 “하나님과 재물(경제)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고 말씀하며 경제문제가 과장되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수님은 항상 서민들의 경제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어찌하든 도우려하셨다(막 6:35~43). 그러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경제관은 경제가 있어야할 바른 자리를 찾아주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나라의 공의와 백성들의 삶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더 나가자. 경제면 그냥 경제고, ‘미시’냐 ‘거시’냐 만 따지면 됐지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가 어디 있나? 아니다. 분명히 있다. 경제라고 다 같은 경제가 아니다. 경제에도 질이 있고, 격이 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제에 예수님의 마음(혼)을 담지 않으면, 그저 재테크 이론에 다름 아닐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전과는 다르게 한국교회가 갈수록 경제문제에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 한국교회 내로라하는 목회자들도 부강한 나라, 부자 국민, 성장한 교회 만드는 게 마치 지상명령이나 되는 듯 목소리를 돋우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느껴지지 않고, 바알적 경제지상주의가 엿보여 걱정스럽다. 그런 염려와 걱정이 이 글의 동기가 되었다.
나는 경제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비전문가다. 그러나 청년 시절 이후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후(마 9:36), 주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학의 원리도 막연히 느껴보고(마 14:16), 어깨너머 독학하듯 경제를 공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본격적인, 또는 일반적인 경제학 이론서가 아니다. 내 관심사는 ‘경제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경제는 마땅히 어디로 향해가야 하는가?’, ‘경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같은 문제들이다. 서점에 가보면 경제/경영학 서적들이 넘쳐나지만 이러한 본질적 질문에 답해 주는 책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러나 나는 이것이야말로 경제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Ⅱ. 경제의 기본구조
모두 “경제”, “경제” 한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흔하게 들려오기에, 정말 중요한 원리를 모를 때가 많다. 내가 아는 한 경제란 모두를 유토피아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마법의 원리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그러한 환상을 빨리 깰수록 경제(학)는 모두의 행복을 무작정, 그리고 무한정 쏟아야만 한다고 믿는 미신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경제란 무엇인가? 인터넷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인간의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분배·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데서 머물면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가보자.
1. 경제영역에 ‘윈윈(win win)’은 없다.
영적세계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윈윈’이 있다. 내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맛보며 살아간다고 다른 사람이 그 은혜를 빼앗기거나 손해 보는 일은 없다. 그러나 물리적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는 엄밀히 말한다면 ‘윈윈의 세계’란 없다. 어느 학습지 선전광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400만 초등학생이 모두 우등생이 되는 그날을 위해서.” 그러나 사실상 그런 날은 결코 없다. 우등생이 있으면 반드시 열등생이 있어야 하는 우리 교육현실에서 어떻게 모든 학생들이 다 우등생이 될 수 있겠나? 그것은 “모든 수험생들이 다 경쟁에서 성공하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정치의 세계도 그렇다. 모든 후보자들이 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모두가 당선되고, 모두가 집권하고, 모두가 여당 될 수 있나? 불가능하다.
경제도 마땅히 그렇다. 웃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우는 사람이 있는 게 경제의 세계다. 모두가 웃는 경제란 없다. 그러므로 누구의 경제냐를 물어야 한다. 누군가 자기 수고에 비해 더 많은 소득을 얻었다면 반드시 그만큼 더 손해 본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우등생의 혜택도, 금배지의 기쁨도, 그리고 경제에 있어 재화도, 서비스도 수요에 비해서 총량은 항상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부터 우리가 경제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바로 잡아야할 본질이다.
그러므로 경제는 반드시 분배의 문제로 연결된다.
어차피 재화(서비스도 마찬가지)는 한정된 것이므로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이 분배되었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양이 더 빠져나갔다는 것을 뜻하지, 모두에게 동시에 이득이 돌아가는 재화분배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앞서도 말했지만 물리적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세상에서 “모두가 우등생이 되”거나, 롯또 복권이 선전하듯이 “모두가 웃는 그 날”은 결코 오지 않으며, 그런 슬로건들은 잘못된 현실을 억지로 가리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말들이다. 착각을 버리고, 지금부터 ‘누구의 경제’인지를 묻자.
2. 목마른 사람에게 식수와 비데의 물은 값어치가 다르다.
경제를 생각할 때 우리가 두 번째로 기억해야할 사실은 같은 재화(서비스)라도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은 의미(값어치)를 갖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똑같은 물 한 양동이라도 남부 아프리카 아이들은 매일 몇 시간을 걸어서 길어다가 식수로 쓰고 있는 반면, 다른 지구촌에서는 비데라는 편리한 상품을 만들어 용변 후 뒷물로 써버리는데, 같은 양의 물이라고 그 값어치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양심을 갖고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누구나 분명 물 한 양동이의 값어치는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자. 실제 경제의 세계에서는 전자의 그 절실한 값어치를 위해 후자를 결코 희생시키지 않는다. 경제학에서의 가치는 그 재화가 누구에게 더 긴요하고 필요한지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오직 시장가격으로서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그러나 경제는 자선이 아니다. 경제가 자선이 되는 순간 그것은 도덕이 된다. 자선은 개인적 호의에 의존하지만 경제는 가장 합리적인 분배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
합리적 분배를 결정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
1. 경제영역에 ‘윈윈(win win)’은 없다.
2. 목마른 사람에게 식수와 비데의 물은 값어치가 다르다.
3. 합리적 분배를 결정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결국 문제는 합당한 분배에 달려있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분배를 결정하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의 믿음은 이 같은 재화(서비스)들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하고, 그 분배의 대가로 얼마의 가격을 지불해 주어야 하는지 등 모든 경제문제를 결정하는 유일하고 전능한 힘이 바로 시장(市場)에 있다고 한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더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수요가 있는 곳에 더 많은 공급이 따르고, 그런 더 적절한 생산이 있는 곳에 더 많은 대가가 지불되는 것은 당연하고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한정된 재화(서비스)를 배분하는 데는 당연히 수요와 공급의 함수 이외에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당사자들 사이의 힘 관계와 사회적 설득력이 큰 몫을 차지한다. 다시 말하면 긴요함과 적절성과 상관없이 목소리가 더 크고, 힘이 셀수록 더 많은 재화(서비스)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이고 초월적인 원칙이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때로는 갈등하며, 도출해야할 사회적 약속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의 더 간절한 요구가 있는 곳에 더 많은 공급이 주어지고, 그에 따라 더 많은 대가가 지불된다는 경제적 합리성을 막연히 믿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의 (사실은 더 긴요하지도 않은) 요구에 더 많은 공급과 대가가 따라가곤 한다. 아까 말했듯이 목마른 자의 생수와 비데물 사이의 현실은 그것을 증명해 준다. 다시 말하면 경제는 단순한 수치나 객관적 이론을 넘어서 무엇을 향해, 어디에 우선적으로 집중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물어야하는 가치적 문제이다.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 먼저, 무엇을 먹여야할 것인지를 정해야 하는 자리에 가치는 개입되지 않아야한다는 말 자체가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의 질의 문제를 도외시한 객관적 경제란 없다.
이번에는 소득분배를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근로소득의 크기는 그 노동에 대한 시장의 평가와 노동량에 달려 있다”(<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119쪽)고 한다. 우선, 노동량을 보면 5시간 일 한 사람보다 8시간 일 한 사람에게 더 많은 소득이 주어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감된다. 그런데 문제는 소위 ‘시장의 평가’라는 것에 따라 소득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노동량 측정은 객관적 평가가 가능한 반면, ‘시장의 평가’라는 것은 객관적 평가가 매우 모호한 용어인데다가 현재의 기득권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크다.
‘시장의 평가’는 이런 것이다. 우선 같은 노동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숙련도와 다양한 능력의 차이가 나타나므로 똑같은 시간을 일해도 더 우수한 숙련가와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더 많은 보수가 지급된다는 것이다. 일단 합리적이다. 문제는 보통의 사람들 사이의 능력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반면, ‘시장의 평가’라는 임금격차는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점이다.
가령 노동부 조사에 의하면 2007년 6월 기준 고졸 노동자 평균급여액은 178만원으로, 대졸 이상 노동자 281만원보다 무려 103만원이나 적었다. 특히 1년 미만 노동자 첫 임금을 비교하면 2000년 12.4%에 불과하던 대졸과 고졸 격차가 해마다 늘어나 2006년에는 36.7%, 2007년에는 47%로 더 크게 벌어져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2004~2007년 사이에 대졸 이상 경제활동참가율은 소폭이나마 증가하는 반면(77.9%→77.9%→78.1%→78.1%), 고졸 이하는 확연히 줄어들고 있다(56.9%→56.5%→56%→55.6%). 또한 우리나라 남녀 임금격차는 36%로 세계 최악 수준이다(세계 평균 15.6%, 아시아 평균 17.6%). 과연 우리나라 고졸자는 대졸자에 비해, 여자는 남자에 비해 그토록 숙련도와 업무수행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또 ‘시장의 평가’에는 각기 다른 노동들에 대해 시장의 선호도(평가)가 다르기 때문에도 생겨난다. 즉, 일반적인 사람들은 삼성회장 이건희의 경영능력, 베컴의 환상 프리킥, 이효리의 미모와 재능을 빌딩 청소원 아주머니의 노동보다 훨씬 높게 평가해 준다는 것이다. 일단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단순하게 알려진 연봉의 차이를 보면 이건희 45억 원, 베컴 63억 원, 이효리 55억 원인데 반해, 청소원의 경우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00만 원을 넘기지 못한다(이효리 연봉은 청소원의 275배다). 그러나 전자의 유명인들은 공식 연봉보다 각종 배당금, 부동산 수익, 각종 금융소득, 강연료, 출연료 등 기타 수입이 훨씬 큰데 반해, 일반 노동자의 경우 그런 기타 수입은 거의 없거나 미미하므로 양자 사이의 격차는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크다(한 예로 2007년 주식 최고배당금을 받은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는 현금으로 615억 원, 이건희 삼성 회장은 216억 원을 벌어들였다).
어차피 우리는 획일주의나 절대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기에 개인능력의 차이나 성실성, 시장의 평가 등 모든 차등적 요소를 다 감안한다고 해도, 이들 사이의 차이가 그렇게 엄청날 정도로 크다고 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사이의 격차를 누가 정확히 평가해 줄 수 있는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다시 말하지만 경제(학)란 한정된 財貨와 서비스에 대한 합리적 분배의 메카니즘이다. 그런데 ‘한정된’이라는 원초적 제약과 ‘합리적’이라는 현실적 판단 사이에 경제(학)가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어떤 원리를 기대할 게 아니라, 구체적 시대상황에서 구체적인 고민을 바탕으로 공공적인 합의에 의해 더 나은 조건들을 도출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절대적 ‘윈윈’은 없다.
다만 좀 더 공정한 방식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대한 공의로운 방식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경제적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다양한 갈등과 조정의 과정(세계↔국가↔기업↔개인)을 거쳐야만 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이제는 여기에 인간적 관계를 넘어서 자연과의 관계도 포함시켜야 한다. 자연은 그저 우리 인간들이 우리의 단기적 필요에 의해 언제든, 그리고 무한정 써먹기만 할 수 있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Ⅲ. 성경을 통해 보는 경제사상
1. 성경은 특정 체제나 제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은 다른 어떤 경전과 비교해보아도 추상적 교훈을 넘어 여러 가지 제도나 규칙(법률)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자체를 옹호하려는 시도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이 세상에 건설하는 그 어떤 정치제도나 경제체제도 인간의 이기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성경을 통해 절대적 지지를 끌어내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결코 어느 특정 국가, 특정 제도, 특정 정책과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현실에서는 자주 이 기본원칙이 무너지곤 한다.
이 점에서 김진홍 목사는 큰 오류를 범한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훨씬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르기를 “네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우리가 선택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바로 이 가르침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다.…자유민주주의가 내세우는 경제 질서가 시장경제이다. 그런데 시장경제가 바로 “네가 하기를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하라”는 원칙 위에 서 있다. 시장경제의 원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웃과 사회를 위해 많이 한 사람이 잘 살도록 되어 있다. 남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더 잘 수행한 사람에게 더 많은 댓가가 지불되는 체제가 바로 시장경제이다.』(김진홍 아침묵상/06.7.19)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예수님의 황금률(마 7:12) 가르침의 원칙 위에 서 있다는 주장 자체가 매우 엉뚱한 것일 뿐 아니라, 그것으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 역시 무모하다. 시장경제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라는 예수님의 덕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적용은 사실 시장경제의 아버지인 아담스미스 사상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자본을 투자하는 것은 오로지 이윤을 얻기 위해서이다. …사실 그(자본가)는 사회 일반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얼마만큼 그것을 증진시키는지도 알지 못한다.…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한다.…그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그렇게 하려고 했을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이다.』(국부론/아담 스미스)
그런 식으로 주장하자면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의 원리(행 4:32~35)로부터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비롯되었다고 말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을까? 우리는 다만 성경의 가르침에 기반해서 가능한 한 더 하나님나라의 공의에 가까운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노력할 뿐, 특정 체제나 제도를 절대화해서는 안 되겠다. 기독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결코 자본주의도 아니다.
2. 개인의 책임이냐, 구조적 모순이냐?
우리 사회에 이상한 병폐가 있다. 개인적 구제와 헌신은 매우 칭송하면서도, 사회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매우 불온시하며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사회구조적 관심을 처음부터 좌파니 빨갱이라는 말로 매도하기도 한다. 반면에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개인의 책임은 무시하면서 온통 사회구조 탓만 하며, 그걸 진보라고 착각한다. 일반적으로는 보수적일수록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진보적일수록 사회구조와 제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개인의 문제와 구조적 과제를 함께 바라본다. 경제의 문제에 한정해 살펴보자. 우선 성경은 개인의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을 분명 책망하고, 부지런할수록 부유해진다고 말한다(잠 6:6~11, 10:4, 12:24, 24:33, 34). 그러므로 부자를 무조건 사기꾼처럼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청빈한 희생자로 봐서도 안된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불의한 사회구조로 인한 희생이 있음도 분명히 지적한다(삼상 8:10~17, 시 73:1~12). 시대마다 불의한 사회구조의 문제가 있기에 선지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면 개인의 책임과 사회구조의 문제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천편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고, 그 시대마다 ‘무엇이 더 주요한 과제인가’ 하는 것을 올바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구조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에 비해 가볍게 느껴질수록 건강한 사회다. 예를 들어 북유럽국가들은 인권, 자유, 경제적 성장의 정도, 복지정책 등 사회제도 거의 모든 면에서 상당히 진전된 나라들이므로 상대적으로 개인의 책임이 더 강조되어야 하고, 그런 면에서 그들은 건강한 사회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다르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임에는 틀림없지만, 경제적 성숙도와 빈부격차, 복지정책, 편향적 인권의식 등을 놓고 볼 때 건강한 사회로 보기는 힘들다.
3. 이스라엘 제도를 통해보는 성경의 경제사상
성경에서 우리는 다양한 경제행위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성경이 구체적 경제 원리와 법칙 등을 적어놓은 경제학 교과서는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의외로 많은 경제사상과 제도화된 경제정신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을 주인(왕, 아버지) 삼고, 모든 인간은 그의 평등한 백성(자녀)되는 공의로운 하나님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공의로운 경제는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대한 원칙, 구상을 우리는 ‘경륜’이라고 부른다(엡 3:2, 9). 그런데 바로 이 경륜(Okonomie)라는 단어에 유신론적 배경이 탈색되면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경제(economy)라는 단어가 파생된다. 이처럼 ‘경제’에는 하나님의 우주적 경륜이 개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경제’를 단지 ‘돈벌이’(방법, 정신)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보이시려고 했던 당신의 성품을 닮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나라, 곧 이 세상나라의 그것과 구별되는 사회, 경제의 그림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가? 바로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 만들려고 하셨던 새로운 나라의 청사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은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신 4:5~8)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건설을 통해 구상하셨던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나라를 청사진 삼아 우리 시대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마땅할 것이다.
(1)제국의 영광은 하나님나라와 다르다.
하나님은 새로 탄생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에 흔하디흔한 강대국, 제국들과는 다른 목표, 다른 사상, 다른 원리를 가진(신 7:7) 구별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기 원하셨다. 그러나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 길고 지겨운 광야생활, 위험천만한 정복시대를 지나 지킬 집도, 재산도 생겨나니 슬그머니 주변나라들의 발전된 제도들이 부러웠다(신 8:12~14). 그 가운데서도 언제나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강력한 상비 병력을 거느린 카리스마적 군주제도가 있으면 우리도 더 강력하고 번영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커져갔다(삼상 8:5, 19, 20). 그리고 그러한 기대와 꿈은 벌써 오래전부터 틈틈이 싹터갔다(삿 8:22, 23, 9:18).
많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이 군주제도를 허락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 왕에게 절대복종하는 군주제도가 갖는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하신 후(삼상 8:11~17),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담은 독특한 이스라엘 군주제도를 허락하신다. 왕이 있으되 다른 나라처럼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법이 되고 신이 되는 그런 절대왕정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물어 수행하는 앞선 청지기 같은 모습이다. 그러므로 백성들도 눈 앞의 왕 이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삼상 12:13~15). 따라서 그 나라는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나라여서는 안되며, 왕은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쥐락펴락 하는 자여서는 안된다(신 17:14~19).
그 나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복종하는 나라요,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의 법을 개인적이고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나라요, 그러한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며 그 분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나라다(출 19:6).
선민 이스라엘? 이스라엘의 정당성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잘 지켜간다는 복종 아래서만 보장되는 것이지, 결코 배타적인 것도 혈통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그러한 하나님나라 모상다운 질적 탁월성을 잃어버리고, 세상 여타 나라와 똑같은 전제군주국, 제국이 되었을 때(왕상 10:26~29, 대하 18:1, 2) 하나님은 여지없이 다른 나라들을 통해 심판하셨다. 물론 왕의 운명도 꼭 같았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을 목격한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교훈을 받게 되는가? 우선,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 그 어떤 나라도 더 이상 하나님나라의 모상이 될 수 없다(단 4:17, 25, 2:44). 그러나 인류는 유사 이래 늘 특정 국가, 특정 제도를 하나님나라와 착각해 왔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성경이 가르치는 대안적 경제체제인 것처럼 말하거나, 과거엔 로마제국을 절대화했듯이 지금은 미국이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모상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렘 14:13, 14). 그렇다고 이 세상나라와는 절연하고 오직 초월적 하나님나라만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부단히 변화시켜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나라의 공의가 드러나도록 애써야할 것이다(요 17:15).
(2)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을 닮은 공의로운 제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개인을 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당신의 성품과 의지를 본받는 공동체(이스라엘, 교회)를 이 땅에서 만들어 가신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과 의지가 반영된 공의로운 제도를 세우신다. 구약 이스라엘을 세우셨을 때 하나님은 다른 나라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제도를 만들어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지키도록 명령하셨다(신 6:1~3, 31:9~13).
(2-1) 하나님은 절대 신앙과 사회정의를 지키는 국가기초를 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한 후(수 6~12장), 그것을 신적 권위로 분배하셨다.(수 13~22장) 땅은 개인적 선호도나 권력의 우선순위에 따라서가 아니라, 각 지파별로 하나님 앞에서 제비뽑아 나누어졌다. 각 지파는 다시 가족별로 더 세분해서 땅을 나눠 대대로 그 땅을 기반으로 살게 된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이렇게 한번 분배된 땅은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맘대로 사고파는 매매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만 해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하나님은 유독 땅은 내 것이므로, 한번 분배된 것을 너희 맘대로 사고팔지 말라신다.(레 25:23) 그리고 분배된 땅의 경계를 아예 확정 짓기 위해 경계표를 만들어 누구든 보고 알 수 있게 박아 놓으라신다.(신 19:14)
하나님은 왜 유독 땅에 대해서 이토록 강하게 집착하실까? 또 땅의 공평성이 새로 건설하실 이스라엘 정체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땅이 갖는 특징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사람이 생명체로 살아가는데 땅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동서고금, 남녀노소, 빈부귀천, 신앙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땅에 거하며 산다. 땅을 기반으로 먹고, 자고, 생산 활동을 한다. 벤츠 자가용을 몰거나 최고급 귀금속으로 장식하지 못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 지장 없으나, 땅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동시에 땅은 필요하다고 인간이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생산물도, 문명도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땅이 그저 맘대로 사거나 팔 수 있는 일반적 사유재산이 아닌 이유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상업이나 금융 등, 각종 서비스업이 발달하기 이전인 고대시대에는 농사를 짓든지, 목축을 하든지 기본적인 생산 활동에 땅이 직접 사용되었기에 고대인들의 토지의존성은 우리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했다. 그러므로 결국 땅은 생명이다. 땅이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다.
(2-2)안식일·안식년·희년 제도를 통해 공의로운 이스라엘을 지키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새로 만드시려는 공의로운 선민국가 이스라엘과 주신 땅을 붙잡고 복을 누리는 것은 일맥상통한 것이다.(창 17:7~8) 그런데 이렇게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뜻하지 않게 땅을 사고파는 일이 생겨났다. 농사지을 젊은 장정들이 전쟁에 나가 죽었다든지, 사고가 나거나 병이 들어 노동력을 상실했다든지 하는 다양한 사정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또 땅에 붙어 일하며 살기보다는 먹고 놀기만 즐기다가 탕진하는 사람들은 왜 없겠는가?(눅 15:13~14)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님이 각 지파와 가족별로 분배하신 자기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뜻밖의 사태가 발생할 것을 미리 예측하신 듯이 대책을 마련하셨는데, 그게 바로 안식일․안식년․희년법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세상이 병들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선한 창조(출 31:14~17)와 완전한 해방(신 5:12~15)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셨다. 그리고 그 안식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계산해 지키는 안식년도 바로 하나님의 안식과 해방의 선물이다.(레 25:3~7) 그 해방의 해 7년을 다시 완전수 7로 곱한 49년이 지난 이듬해 50년 째 되는 해에는 온 민족이 크게 지켜야할 해방과 안식의 해, 바로 희년이다.(레 25:8~10) 희년이 되면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기본체제가 많이 무너졌을지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①우선, 본래 사거나 팔지 못하는 땅이 원주인에게 돌아간다.(레 25:28) 갚을 능력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무조건이다. 물론 희년이 오기 전에라도 원주인이나 그의 친족이 찾아와 물러 달라고 돈을 가져오면 새 주인은 두 말없이 언제든 물러 주어야 했다.(레 25:24~27) 우선권은 언제나 인간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처음 주신 은혜(토지분배)에 있었다.
②집도 희년법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집은 차등이 있어 성벽에 둘려 그 성안에 거하는 집은 단 1년만 되무르기를 할 수 있고, 1년이 지나면 완전히 산 사람의 소유가 되어 희년이 되어도 돌려받지 못한다.(레 25:29~30) 그러나 성 밖에 있는 시골(촌락) 집은 토지와 같은 것으로 보아 희년법의 절대적인 적용대상이 된다.(레 25:31)
③동시에 이스라엘은 본래 자기 동족을 종으로 사거나 팔 수 없지만 또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혹시 종이 되었을지라도 50년 째 해에는 희년법을 적용받아 무조건 해방된다.(레 25:39~41)
이러한 희년법 정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①무차별적 토지사유화는 죄로 사회를 병들게 한다.
하나님은 분명 사유재산을 인정하셨다. 기본적인 시장의 기능을 인정하고, 자유매매와 사유재산이 허용되었고, 따라서 빈부의 차이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사유재산과 자유매매는 무차별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공동체적 필요에 따라 제한을 받았다. 개인의 자유가 소중한 동시에 공동체적 생존권도 인간의 기본권으로 보장되었다. 그래서 심지어 성 안의 (도시적) 주택은 사유재산으로 보았지만, 성 밖의 (시골)집은 부속토지로 보고 희년법을 적용시킨 것이다.
우리나라는 잊을만하면 토지공개념을 갖고 논란이 벌어진다. 시장과 사유재산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동산(땅과 건물)에 대해 맘대로 사거나 팔고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것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위반한 것이요, 공산주의적 사고라는 것이다.(1994년 헌재에서 토지초과이득세법 위헌 판결) 그러한 부동산 부자들의 고충(?)을 참작하여 이번에 정부, 여당은 부동산 관련 세금을 대폭 낮추고, 거래제한을 완화하겠다고 나섰다. 특히 지금까지 공시가 6억 원 이상 부동산(공시가는 통상 실제 매매가의 50~70% 수준이니 실제 가격은 10억 정도)에 한정하여 누진과세인 종합부동산세를 매기던 것도 너무 과중하다고 여겨(이는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겨우 2%에 불과한데도), 종부세 과세대상을 과표 9억 원 이상으로 올려 잡고, 부부합산 과세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주택보급률이 벌써 100%를 넘었지만 아직도 집 한 채 갖지 못해 월세로, 전세로 전전긍긍하는 서민들이 허다한데, 정부와 여당은 겨우 2%에 불과한 부동산부자들의 병아리 눈곱만한 세금도 깎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혜택을 바로 우리 대통령 및 대부분의 장관, 국회의원들부터가 고스란히 받게 된다. 대통령과 주요장관급 고위층 19명이 가진 부동산 재산 가격은 무려 299억 원 가깝고 현행 세법으로도 겨우(?) 3억 326만 원의 종부세를 내야하나, 약화되는 세법을 적용하면 1억 4203만 원을 내게 돼 1억 6123만 원을 절감하게 된다.(<한겨레21> 722호 참조)
땅 없이는 살 수 없는 이 세상에서 땅을 통해 누리는 혜택이 많아질수록, 땅값은 점점 더 올라 서민들은 땅으로 인해 더욱 살아가기 힘들어질 것이다. 부동산 관련 세금을 낮추는 것은 단지 땅 부자들에게 혜택을 주고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리고 분명히 서민들의 부담이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경제와 사유재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우리나라도 헌법 제123조, 민법 제2조, 민법 제212조를 통해 토지공개념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②사회정의, 경제정의가 무너지면 하나님 절대 신앙도 반드시 무너진다.
하나님이 신, 구약을 통해서 사회정의와 경제정의를 그토록 강조하셨던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인간사회의 공의가 근본적으로 무너지면 더 이상 하나님을 바로 믿는 신앙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난해 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가난해졌든(심지어 자신의 게으름으로 인한 것일지라도) 사람이 최소한의 생존기반을 스스로 얻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그는 단지 생활로만 예속되는 게 아니라, 그의 모든 생각, 감정, 당연히 신앙까지도 예속되고 만다(삿 6:2~6→6:30~31). 자신과 가족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주인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주인이 진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특히 고대시대에는 땅이 절대적이었다. 땅을 잃으면 인신이 예속되고 신앙도 지킬 수 없다(삿 17:9~12, 18:18~20, 대하 31:4, 느 5:1~13). 그래서 이스라엘 제도와 희년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토록 땅을 지켜주려 했던 것이다.
현대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사람이 벤츠를 타든, 마티즈를 타든, 지하철을 타든 자존심은 상할지라도 예속되지는 않는다. 최신형 에어컨을 가졌든, 선풍기를 가졌든, 부채 밖에 없든 사람은 그것으로 예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에 수 백 만 채의 집이 있어도 내가 들어가 살 집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집 가진 사람들에게 휘둘려 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동산을 바로 지키는 것은 하나님 절대 신앙을 지키는 것에 직결된다. 그래서 선지자는 양심 없는 부동산부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사정없이 저주를 퍼붓는다.(사 5:8~9) 땅을 사사로이 사고파는 지도층 인사들에게 진노하신다.(호 5:10) 땅은 모두를 위한 선물이며, 하나님은 분명히 토지공개념을 가르치신다.(전 5:8)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절대 신앙은 그저 종교적인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 평등과 인권의 인간적 가치를 지키는 사회/경제적인 의미로 연결된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한편에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수 24:14, 23)는 배타적 절대 신앙을 부르짖으면서도, 동시에 공평과 사회정의를 실천할 것을 그토록 부르짖었다.(사 58:6~7, 암 5:21~24) 이 두 목소리는 선지자 개인의 취향에 따라서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선지자들이 동시에 부르짖어야할 것이었다.
제도로 뒷받침되지 않는 말만의 해방은 헛것이다.(약 2:14~17)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이 법적으로는 노예해방을 선언했지만, 땅도, 재산도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없는 흑인들은 어제의 주인에게 예속되어 다시 남부에서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북부로 가서 산업노동자로 새 주인을 섬겨야 했다. 풍요와 자유를 찾아 남녘으로 찾아온 탈북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서도 예속될 수밖에 없음을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다.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남한의 자본주의 일변도의 통일이 되면 북녘 형제들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지극히 선언적인 것일 뿐 결국 남쪽 1등 국민에게 예속되는 2등 국민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어떤 이유로 가난해 졌든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가난의 대물림이나 구조적 양극화는 막으신다. 또 사람으로서 가져야할 최소한의 인간존엄성이 무너지는 것을 용서하지 않으신다. 희년법과 구약의 많은 공동체법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년제도가 그저 영적 상징이거나 이미 흘러간 옛 사상일 뿐이라고, 또는 이스라엘에서 지켜진 것이 없는 죽은 제도일 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확인해 보면 그건 어불성설이다. 나봇은 하나님의 법(희년법)을 근거로 자기 자손들에게 분배된 토지를 팔 수 없다고 아합 왕에 말하였고, 그것을 알고 있는 아합 왕도 아무리 폭군일지라도 감히 그것을 맘대로 빼앗을 수 없었다(왕상 21:1~4). 선지자 예레미야도 자신의 예언 사역 가운데 희년법에 근거를 둔 친족의 무를 권리를 행사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으며(렘 32:6~15) 동족들을 종으로 잡는 것이 희년법의 위반임을 들어 백성들을 책망하였다(렘 34:8~17). 느헤미야도 포로 귀환 후 예루살렘을 재건하면서 최초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안식일․안식년․희년법의 근거 위에 사회기초를 놓을 것을 서약하였다.(느 10:31) 무엇보다 희년법의 배경이 없었다면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룻와 보아스의 극적인 이야기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룻 2:20, 3:9~13, 4:1~10) 우리 예수님도 희년정신을 근거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고치셨다.(눅 4:16~21)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유재산제도가 희년법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지금껏 교회를 많이 부흥시켰든, 유명한 설교자든, 한국교회사에 빛나는 원로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유일 신앙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키기 싫으니 영적 상징이다, 그저 교훈일 뿐이다, 이미 없어진 법이다 우기는 것이다.(렘 35:14) 우리에게 하나님나라 사상이 흐려질 때 사회적 불의와 공평이 깨어진다.(왕상 21:5~14) 하나님의 법은 믿음으로만 지킬 수 있다. 그러므로 희년의 토지법은 단지 사회정의법에서 그치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영적인 원리다. 하나님나라의 공의선언은 신앙선언이다.
(2-3)공의로운 구약율법들을 통해 선민 이스라엘을 지키셨다.
우리는 구약법 하면 심술궂은 조물주의 불필요한 간섭, 속박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구약법의 실상을 살펴보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인간해방이며, 자유의 법임을 알 수 있다. 사회의 도덕성과 공의로움은 단지 개인들의 착한 성품으로 지킬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절대 신앙을 정점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체적 고결성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율법은 개인적 도덕법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공동체적 언약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은 선민 이스라엘의 건강성을 유지시킨다.
고아나 과부, 떠돌이 나그네 같이 기댈 데 없는 이웃을 억울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울부짖음을 반드시 듣고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출 22:21~23) 재판하는 사람은 숫자나 권력, 뇌물 등에 흔들리지 말고 공명정대하게 판결해야 할 것이다.(출 23:6~9) 오늘날 우리는 공동체적 축제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모든 종교적 절기는 혼자서만 즐기는 개인적 기념일이 아니라, 모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야하는 약자배려의 축제날이었다.(신 14:26~27, 16:11,14~15).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든 말든 내 기분에 달린 게 아니라, 반드시 하지 않으면 도리어 죄가 될 것이다.(신 15:7~11) 요즘 한창 사형폐지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지금부터 수 천 년 전에 기록된 구약법에는 사람을 죽인 사람에 대한 인권적인 보호조처까지 언급하고 있다. 바로 도피성 제도다. 벌목을 하러 갔는데 뜻하지 않게 도끼날이 빠져 하필 동료를 맞춰 죽게 되는 일이 생긴다. 범인(?)은 고의가 아니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을 때는 죽은 이의 가족 등에 의해 사사로이 살해당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그는 도피성으로 가서 그 사정을 털어놓고 보호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가 있을지라도 도망가는 길이 멀거나 험하거나 찾기 어려우면 가는 도중 잡혀 죽을 수도 있으니,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도로를 넓게 닦고 전국 각처에 널리 분산시켜 놓을 것을 명령하고 있을 정도다.(신 19:1~13, 수 20:1~6)
수 천 년의 시대, 문화적 격차가 무색하게 오늘날에도 시사성을 충분히 갖고 있는 금융과 대부에 대한 규례를 신명기 24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오늘날 대부나 금융기관의 담보대출은 가난한 자의 형편을 도우려는 본래 목적에서 심각하게 벗어나, 빚의 함정에서 허덕이게 만드는 가난의 악순환 고리가 되고 있는데 구약의 정신에 따르면 그러한 제도는 원인무효다. 기업주가 기억해야할 규례도 있다. 형편이 어려운 노동자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정당한 품삯을 주도록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동일 노동에 대한 차별대우(비정규직 문제, 남녀차별 문제,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와 체불임금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할 것인지 시사 받을 수 있다. 다시 강조하건대 공평성이 무너지고 빈부격차가 격화되면 공동체성과 사회적 건강성은 무너지고, 바른 신앙도 자리 잡을 수 없다.
(3)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십일조 정신)
우리가 이렇게 이웃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대해 강조하여 말하면 마치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의 헌금정신은 살펴보면 이웃을 섬기는 게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사실상 우리가 드리는 한 푼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욥 41:1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린다고 헌금을 바치지만, 사실은 한 푼도 남김없이 사람에게 돌아간다. (교회운영에 쓰이든 이웃을 위해 사용되든) 그런 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십일조로, 십일조는 종교세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보장제도로 기능했다.(신 14:22~29, 26:12, 13)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회적 보호가 미치지 못하던 떠돌이, 외국인노동자, 고아, 과부, 그리고 레위인(별도의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으므로 이들도 생활보호대상자다.) 등은 어김없이 십일조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러한 공평과 정의의 제도를 폐하지 않고 지킨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수 있었다.(신 26:14, 15)
이러한 정신은 신약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무엇보다 바울을 통해 이미 확인되는 초대교회 헌금의 정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성도를 위하는 연보'(고전 16:1)라는 표현으로 헌금이 결국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분명히 '연보'를 성도와 공동체 사이에 나눌(평균케 할) 하나님 나라의 대책으로 말하고 있다.(고후 8:4, 12~14) 그리고 그것은 바로 광야에서의 만나와 메추라기 먹음으로 연결되는(고후 8:15→출 16:17, 18) 영적 체험이다. 그것이 바로 이들 사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물질을 나누는 것은 지극히 영적인 현실이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증거다. 결국 성도들끼리 서로서로 물질을 나누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그걸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개념을 읽을 수 있다.(고후 9:7, 11, 12)
그것은 교회사에서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는 전통이다. "교회 재산은 토지든 돈이든 전부 빈민을 위한 재산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교회 회의의 결정과 고대의 저술에서 종종 발견한다. 그래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그들이 자기 소유를 처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빈민을 돕기 위해서 임명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악한 마음으로 교회 재산을 감추거나 낭비하는 배신행위를 저지른다면 그들은 살인죄를 범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 재산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분배하되 마치 하나님 앞에서와 같이 최대의 경외와 공경으로 편벽됨이 없이 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4권)
4. 자본주의의 위험성
앞서 말했듯이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특정 체제를 선호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현실에서는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가 더 위험하다. (표현에 주의하라. '사회주의가 더 옳다'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덜 위험하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더 갖고 싶은 욕망을 제어하여 굳이 공동체적 가치를 실현하려 하나 이는 타락한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는 어린아이 때부터 굳어진 강렬한 이기심과 소유의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의 자극제로 삼으려 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본능에 거슬러 억지로 하려하니 강제와 독재가 되기 쉽고, 후자는 본능에 너무 충실하려니 끝없는 탐욕과 이기심을 제어할 한계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현실에서 사회주의보다 강하고, 두 체제의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강함이 꼭 옳음을 말하지는 않는다.
시장도, 화폐도, 사유재산도 자본주의에만 있는 고유의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오직 자본주의만이 세상 모든 것을 돈으로 대신할 수 있는 제도다. 자본주의는 자본(돈) 운영의 자유를 그 사회를 유지, 발전하는 가장 중요한 중심축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 전통, 사회적 가치, 심지어 가족과 인간관계, 사람의 가치, 종교적 믿음까지도 자본의 잣대로 재평가하게 된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서의 자부심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꿔주는 예술가나 디자이너로 인정받아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성형외과 전문의. 여성의 생명과 출산을 돕는다는 본래의 명칭이 어색하게도, 한 생명을 탄생하는 일(출산)보다 한 생명을 없애는 일(낙태)에 더 큰 경영목적을 갖는 산부인과. 얼마나 성경적이고 합리적인가를 분별하기 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 많은 돈을 내고, 큰 건물을 지었느냐를 기준으로 평가되는 교회와 목회자. 자본주의는 이유야 어떻든 결국 성장한 사람, 결국 승리한 기업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모든 공과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 성공, 번영, 돈, 시장, 자본, 힘을 찬양하게 되고, 성경이 경계하는 풍요의 신 바알주의(구약), 재물의 신 맘몬주의(신약)로 연결되기 쉽다. (웨신대 남오성 교수는 2008 성서한국 인천․부천대회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는 경제 원리의 교훈을 주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본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올바른 기업정신이 단순한 자본축적이 아니라, 나눔과 고용을 통한 혜택을 나누는 것이라는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다. 나는 기업(가)이 이윤을 포기하고, 자선에 집중하라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성경정신을 원용하지 않아도 기업은 사회로부터 온갖 유무형의 혜택을 받고 성장하는 것인 만큼 "내가 벌었으니 내 것"이라는 천박한 인식을 넘어 사회적 공동체성이 보다 깊이 적용될 수 있는 방식의 발전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사유재산을 분명 인정하지만, 그것의 절대성은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자기 밭의 추수를 할 때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다 거둬가지 말고 일부러 남겨두도록 했다.(신 24:19-22) 돈 놓고 돈 먹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자본축적 방식이지만, 성경은 채무자의 권리를 우선적으로 보호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돈을 못 갚는다고 채무자를 홀대하면 하나님은 오히려 빚진 사람의 부르짖음을 더 크게 들으실 것이라고 한다.(출 22:25~27)
일반적으로 자선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배려요, 선한 마음이다. 그러므로 자선은 베푸는 사람의 결정에 달렸고, 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자선을 개인화하여 베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고, 최소한의 자비심은 명령인 것처럼 가르친다. 그래서 '자선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이 듣고 심판하겠다'고 경고한다.(출 22:21~23, 신 15:7~9) 그러므로 이렇게 구조화되고 사회화된 자선은 이미 개인적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로운 사회구조다.
그러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수용해야할 것인가?
이미 충분히 확인 되었듯이 개인능력의 자율성과 창의성, 기본적 사유재산의 책임을 받아들이되, 그걸 만능으로 여기지 말고 남용되지 않도록 견제하고 감시하는 사회적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이 세상 거의 모든 제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타락과 한계를 어느 정도 인정한 차선이거나 차악인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본주의를 수용하되, 최선이요 유일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본래 더 좋은 제도와 정신은 그렇지 않지만 인간의 한계를 고려해서 최소한으로 수용한다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마 19:8) 따라서 성경의 희년사상은 이미 폐하여진 고대시대 율법 정도로 치부하면서 시장경제, 자본주의, 경제성장이 이 시대 유일한 하나님의 대안인 것처럼 외치는 것은 바알주의요, 세속주의다. 사유재산의 자유와 시장경제는 알아도 성경의 희년법은 철지난 떨이상품 정도로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신 풍요는 함께 누리는 것이다.(신 12:12, 17, 18, 14:26) 무절제한 절대적 사유제사상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사유재산과 영리 추구를 허용했던 성경을 근거로 오늘 우리의 불의한 자본만능주의를 정당화하려 하지 말라.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하나님의 법이 우선인지, 자본주의 제도가 우선인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선택해야 한다.(마 6:19~24, 왕상 18:21)
Ⅳ. 신자유주의가 과연 지속가능한 대안경제가 될 수 있을까?
1. 국제자유무역의 신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모든 사상, 이념은 변화하고 발전한다. 좋은 이념과 사상이 시간이 흘러가면서도 그 당대의 상황과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한 사회발전의 촉매제가 되는 반면, 시대발전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거나 상황을 벗어나게 될 때는 오히려 사회발전을 가로막는 수구적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사회와 지성을 감동시켰던 자유주의 열풍은 당시 자유와 해방, 사회진보를 가져온 힘이었다. 중세 이후 계속된 사회적 신분질서와 종교적 억압은 오랜 기간 유럽 사회와 백성들을 억압하고 질식시키는 족쇄였다. 자유주의는 당시 그러한 사회적, 종교적 귀족들로부터 사회를 해방하여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적 혜택이 돌아가게 만든 진보적 사상이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신의 섭리나 전통,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던 부당한 사회적, 종교적 억압을 거부하고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의 권리는 침해받지 않는 천부인권과 자유사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로 나타났다. 그러한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거의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었고,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분명히 그랬다.
그러나 그렇게 발전한 자유주의와 그 단짝 같은 자본주의 경제제도는 많은 사람들을 봉건적 신분질서, 종교적 제약에서 해방시키는 기여를 했지만, 그 대부분의 열매는 결국 신흥자본가 계급(브루조아지)에게 돌아갔고, 그 폐해가 갈수록 심해짐에 따라서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대안체제로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실험은 70여년 만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가 숱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생명력 있게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그나마 사회주의의 장점들을 채택해 수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자본주의 사회를 휩쓴 대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도입한 미국의 뉴딜 정책이나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들은 모두 고전적 자본주의를 벗어버리고, 사회주의적 장점들을 흡수한 결과로 더 발전하게 된 자본주의의 열매라 할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집권한 레이건과 대처 보수정권은 그러한 수정자본주의적 성과를 모두 폐기처분하고 사회주의와 극단적 체제경쟁을 선언하며 과격한 시장근본주의를 주창하는데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국가 등에 의한 시장 개입 최소화, 사유재산 최대 존중, 공공부문을 포함한 사회 모든 분야의 민영화, 복지국가 개념 축소, 세금감면을 통한 기업부양, 전 세계적 무한경쟁, 자본이동의 자유 보장 등이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다. 한 마디로 개인의 영리추구를 최대한 보장하며, 사회적, 국가적 제약을 최대한 없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면 기업경영이 활발해지고, 고용은 늘어나고, 투자와 소비가 촉진됨으로써 사회는 무한히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미국과 영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실험은 초기에는 분명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특히 미국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빈부격차가 늘어나고, 감세의 부담은 고스란히 정부가 떠안아 천문학적인 만성적자에 시달리게 되고, 그 부담은 강대국으로서의 힘을 바탕으로 다시 다른 나라들에게 안겨 털어내려 했다. 그 때 이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성장은 무한경쟁과 시장근본주의로 인한 빈부격차의 증가, 고용을 낳지 못하는 허망한 성장, 생산적 기업투자보다는 단기 차익을 노리는 세계적 투기자본의 횡행 등의 고질병을 낳았다. 이제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낳은 모순과 폐해는 결국 전 지구적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전의 고전적 자유주의와 크게 다른 것은 없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도 시장의 자유와 경쟁의 효율성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특징이 있다면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자본의 초국가적 성격과 전통적 상품경제보다 금융 및 각종 서비스 산업의 가치를 훨씬 강조한다는 점이다.
우선,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은 훨씬 국제화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을 단지 다국적 자본, 다국적 기업이 늘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자본, 어느 기업이라도 우리나라, 또는 우리 국민들에게 실질적 혜택만 주면 그만이지 국적 따위는 따질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국제화된 자본, 국제화된 기업은 얼핏 여러 면에서 더 이상 국적을 따지는 게 의미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 모든 수익이 몰려 들어가는 곳은 결국 하나이며, 국적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의 국제화는 이제 자본이 국가적 한계를 넘어 어느 나라, 어느 시장에든 진출할 수 있게 날개를 달았다는 뜻이지, 국가적 성격이 약화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국제주의의 이름으로 자본과 기업의 강대국 이기주의가 포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전통적 상품경제 시장보다 금융, 서비스, 지적 재산권 시장이 훨씬 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여전히 각종 자원 및 상품의 유통이 국내시장과 국제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금융, 각종 서비스, 지적 재산권 시장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무엇보다 전자의 현물시장을 후자가 점점 지배해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 말은 이제 겨우 상품시장을 따라가고 있는 제3세계 국가의 추격을 벗어나 선진주도국가의 폭주가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국제무역이 활성화 될수록 제1세계와 제3세계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에이즈가 사하라 사막 아래쪽의 아프리카 지역의 가정, 공동체, 전체 나라 경제에 미친 끔찍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나라들은 부채의 이자상환을 위해 미화로 평균 37억 달러를 지불하였는데, 이는 1997년부터 2003년까지 해마다 새로 돈을 빌려 누적된 원금보다 더 많은 액수다.…남반구가 져야 하는 엄청난 금융부담으로 북반구에 있는 나라들과 은행들은 더욱 더 많은 부를 축적하게 되는데, 그 액수는 무려 그들의 국내총생산의 약 3%에 달한다.”(경제 세계화와 아가페운동, 세계교회협의회 편, 55쪽)
여전히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제유가와 식량가격 폭등은 국제현물시장과 식량수출국의 공급부족이라기 보다는 국제석유시장과 곡물시장을 지배하며 투기를 일삼는 국제자본의 마수였다는 것은 이제 일반상식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최근 5년 동안 국제유가는 무려 5배나 폭등했다. 그런데 “미국 CFTC(선물거래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2008년 현재 가격상승의 약 70%가 투기와 관련있다고 조사되었다.…석유수출국기구(OPEC) 사무총장 압둘라 알 바드리는 2008년 6월, 투기거래가 얼마나 과격하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통계를 하나 제시하였다. 세계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석유량은 8,700만 배럴인데 시장에서 거래되는 양은 무려 13억 6,000만 배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실제 수요의 15배가 넘는 양이 거래가 되고 있는 셈이다.”(5년간 5배로 뛴 유가...원인은 실수요의 15배가 넘는 투기수요, 이상동 새사연 연구원)
“최근 세계 식량가격 폭등으로 전 세계 21억명이 고통 받는 가운데 카길(미국 농식품 업체인-편집자 주)은 지난해 23억4천만달러의 순익을 냈다.…전세계 곡물…투기자본의 규모는 2000년 50억달러에서 지난해 1750억달러로 35배 증가했다.…식량가격 폭등으로 재미를 보는 쪽은 식량과 농업부문의 교역을 통제하는 다국적 농업기업들과 원자재 카르텔…”(곡물시장 ‘투기괴물’ 21억명 숨통 ‘쥐락펴락’, 한겨레신문, 08년 6월30일 자)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국제자유무역의 신화가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2.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 과연 믿을 만한가?
한국경제는 이미 국제 신자유주의 구조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1995년 시작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발효된 이래 '세계화'를 국가정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더구나 1997년 IMF 금융위기 이후 받아들인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으로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은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를 갖춰가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명박 정부는 경제정책 자체를 지난 1980~1990년대 미국, 영국이 도입했던 신자유주의 노선을 그대로 복제하려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을 살펴보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구조는 분명히 신자유주의인데, 의식은 전근대적 개발독재 시대의 그것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노선, 바로 그것이다. 자본과 기업의 자유를 극대화하여 시장 자율에 맡겨두고, 정부는 세금을 줄이고 각종 규제를 최대한 철폐하여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그러면 자본과 기업은 의욕이 고취되어 왕성한 기업 활동을 하게 되고, 그것은 일자리 증가와 취업률 상승으로 이어져, 소득이 많아진 개인들이 시장에서 더 많은 상품을 구입하여 소비가 증가하고 경기가 활성화 된다. 결국 국가경제가 꾸준히 성장하는 선순환이 일어날 것이다. 정부와 뉴라이트 진영이 그리는 참 아름다운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시나리오는 이미 작동하지 않는다.
경기 활성화를 위해 세금 감면을 말하지만, 경제 활성화를 위해 부담이 될 만큼 국민(특히 기업)의 세부담이 평균적으로 높은 것은 결코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05년 회원국들을 대상으로 GDP 대비 세목별 조세부담액을 조사한 결과 총 28개국 중 우리나라는 법인세만 일곱 번째로 높은 4.1%이지만(OECD평균 3.7%), 28개국 중 가장 낮은 기업부담 사회보장세 2.3%(OECD평균 5.4%)를 포함해 기업 부담률을 모두 합해보면 28개국 중 여섯 번째로 낮은 6.3%(OECD평균 9.1%)에 불과하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로 개인소득세 부담률이 3.4%(OECD평균 9.2%)로 다른 나라와 비교해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어서, 총합계를 내보면 우리나라 기업과 개인 세부담은 OECD국가들 중 가장 가벼운 9.8%(OECD평균 18.3%)로 나타났다.(“MB정부, 감세 말하기 전에 계산부터 하라”, 홍헌호, <프레시안>2008년 8월 15일 참조)
문제는 세금을 깎아준다고 개인이 소비를 많이 하는 것도, 기업이 생산 활동에 투자하는 것도 아니라는데 있다. 기업의 돈이 부족해 고용과 투자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지난 2008년 4월 9일 증권선물거래소와 한국상장사협의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2007년 말 현재 546개 제조업체가 생산 활동에 투자하지 않고 잉여금을 기업 안에 쌓아만 놓고 있는 유보율이 전년 대비 64.77% 포인트 늘어난 675.57%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현금성 자산비율은 더 높아 특히 10대 재벌의 그것은 33조 5184억 원으로 전년보다 20.9%나 늘었다.
그러면 생활 활동에 투자하지 않는 기업 잉여자금은 어떻게 사용하나? 가장 손쉬운 것이 국내외 인수합병(M&A)을 통해 기업 몸집 불리기(2007년 33조 9000억 원 사용)에 나서거나, 경영자 및 주주에게 고액연봉 또는 이자, 배당을 막대하게 안겨주고 있다.
2007년 12월 결산법인 720개 사의 대주주 및 친인척 개인별 현금배당 내역 조사결과 1억 원 이상의 현금을 받는 사람은 총 778명이고, 10억 이상 153명, 100억 원 이상 대주주도 8명(총액 1800억 원)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재벌닷컴 참조) 과표가 8000만 원이 넘는 억대 연봉자 역시 갈수록 늘어나 2007년에는 6만 8600명으로 전년보다 1만 5600명이 늘어났다. 갈수록 기업 환경이 어려워진다고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기업들은 생산에 투자하기 보다는 대주주 배당금과 경영진에게 고액 연봉을 지급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세금을 줄이고 기업 환경을 조성해도 생산적 투자나 고용창출에는 관심이 없이, 기업 인수나 일부 대주주 및 경영진에게 혜택을 늘임으로써 근로자 및 소비시장에 실질적인 수혜가 돌아가지 않으니 국내경기와 시장 상황은 갈수록 나빠진다. 오죽하면 온갖 무리수를 두어가면서까지 광복절 특사로 재벌 총수들에게 사면, 복권을 베풀어 투자 등의 노력을 기대했는데, 투자는커녕 초대형 M&A에만 열을 올린다고 한나라당조차 불평을 털어놓았다. 한나라당 차명진 대변인은 8월 20일 "기업투자가 제로 수준이고 민간소비도 말랐고, 정부지출도 말랐는데 기업은 돈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투자를 안 한다.…투자는 뒷전이고 다른 기업 먹기나 자식들에게 물려주기에만 급급한 기업인들이 꽤 있다"(<아시아경제> 8월 21일 자)고 비판했다. 당연히 실질구매력과 민간소비가 감소하고, 성장률과 경기는 갈수록 후퇴한다. 결국 선순환이 아니라 악순환이 거듭되는 것이다.
기업이 운영하는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들의 조사에서조차 한국경제 성장의 가장 중요한 부문인 소비가 갈수록 부진한 이유가 국민들의 고용불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소비는 국민경제에서 투자나 수출보다 부가가치창출력과 고용유발효과가 더 큰 항목일 뿐 아니라, 대외부문의 충격을 완충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한다.…미래소득의 불안감에 대한 영향력(탄력성)은 고용불안(1.02), 고육불안(0.41), 노후불안(0.36), 금융불안(0.01)의 순서로 나타났다.…한국경제의 장기적 소비부진을 해소하려면 '미래소득에 대한 불안감', 특히 '고용에 대한 불안감' 해소가 최대관건이다.”(장기적 소비부진의 원인분석, 삼성경제연구소) 그러므로 정부는 ‘비지니스프랜들리’에만 집착하게 아니라, 국민들의 고용불안을 해소하는 실질적인 대책마련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3. MB노믹스, 결국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
지난 여름 수많은 국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이명박 정부의 정책들을 비판했지만, 어찌보면 매우 면목 없는 일 같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 우리 국민들이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도덕성보고 뽑아주었나? “도덕성이 밥 먹여 주냐? 경제만 살리면 나머지야 뭐가 대수냐?”는 너그러운(?) 국민감정이 결국 이명박 대통령을 탄생시킨 것 아닌가? 그런데 각종 기업규제도 없애고, 공기업 민영화로 경쟁력도 높이고, 대운하로 국민개발시대를 열고, 한미 FTA로 국제경쟁력도 높이려는 순간에, 난데없이 ‘건강한 먹거리’니, ‘국민주권 회복’이니, ‘생태보존’ 등 이제 와서 한가한 요구들(?)을 늘어놓으니 애써 대통령 입장을 생각해 보면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것도 같다.
그러므로 계속 말하지만 이제 우리는 무조건적 ‘경제회생’, ‘경제성장’ 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렇게 물어야 한다. “그게 누구 경제인데?”, “어떤 경제인가?” 클린턴이 집권 때 내걸었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구호처럼 이제 우리는 “바보야, 문제는 누구(어떤) 경제냐”라고 외쳐야 한다.
우리는 막연히 너도 나도 “경제가 어렵다.” “경기가 힘들다.”고 말하지만, 처음에도 밝혔듯이 실물경제란 누가 힘들면 누군가 반드시 이득을 보게 마련이다. 지금 모두가 경제가 힘들다고 아우성이지만, 분명히 호황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국제투기자본과 대재벌들이다.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3.8%(2001년), 7.0%(2002년), 3.1%(2003년), 4.7%(2004년), 4.2%(2005년), 5.0%(2006년), 4.9%(2007년)로 중국, 홍콩 등 중화권을 제외하면 국제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수출을 보아도 우리나라는 2007년 수출액이 3255억 달러로 홍콩(3168억 달러)을 제치고 11위에 올랐다.
문제는 이러한 성장이 투자와 고용으로 연결되지 않고, 실질적인 서민경제의 텃밭인 중소기업이 살아나지 못하니 서민들에게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남의 잔치’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우리는 대기업이 국민들을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 통계를 보면 사실 중소기업이 서민을 먹여 살린다. 1963년부터 2006년까지 43년간 제조업 전체의 고용 증가분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차지한 비중은 각각 22.6%(56만 명)와 77.4%(193만 명)였다. 또 1996년~2006년(1998년 제외) 사이, 중소기업은 해마다 일자리를 창출해 총 247만 2000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낸 반면, 같은 기간 대기업은 오히려 129만 7000개의 일자리를 줄여 ‘고용 없는 성장’의 주범임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중소기업이 여러 면에서 대기업을 따라잡지 못해, 중소기업의 생산성 증가율, 영업이익률, 임금, 기업환경 등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결국 정부, 여당의 희망사항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시나리오가 작동하지 않을 경우, * 감세→세수 부족으로 인한 교육 및 복지예산 감소→서민경제 불안 및 서민층 붕괴로 이어지고, * 규제완화→불공정 경쟁 심화→중소기업과 대기업 격차 확대→중소기업 몰락→고용 급감, 비정규직 급증으로 이어져 한국경제는 끝없는 몰락으로 갈수도 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러한 위험한 시나리오를 면밀히 검토하지도 않고, 국민들의 ‘경제회생’ 욕구를 빌미로 이미 질주를 시작했다.
지난 9월 1일 정부는 법인세, 종합소득세, 양도세, 상속세, 증여세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세금을 다 깎아주는 세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그 감면규모는 2007년에 비교할 때 2010년엔 17조 9000억 원, 2012년에는 21조 3000억 원 등 이를 5년간 합산할 때 무려 75조 원의 세금을 줄이는 엄청난 종합감세안이다. (정부의 보도자료에 의하면 이번 감세규모는 5년간 21조 3000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여도 올해 7월부터 1년간 한시적으로 주는 유가환급금 5조 1000억 원을 포함하면 26조 4000억 원이 된다). 그런데 9월 10일 진보신당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이번 정부의 감세안은 상위 소득자가 하위 소득자보다 70배의 감면혜택을 더 받으며, 법인세도 감면혜택이 대다수 중소기업에는 100만 원을 넘지 못하는데 비해, 일부 재벌 기업에는 123억 원이나 돌아가고, 상속․증여세, 양도세 역시 서민과 중산층에게 비해 상위 소득자에게 막대한 혜택이 돌아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진보신당, ‘정부 세제개편안의 소득계층별 손인 분석 보고서’)
이어 9월 23일에는 여당인 한나라당의 반발조차 무릅쓰고, 종합부동산세를 대폭 완화했다. 이 법안대로라면 현행 종부세 과세대상의 58.4%가 과세대상에서 제외되고, 종부세를 내야하는 가구의 세 부담도 최대 96%까지 줄어듦으로써, 종부세는 사실상 존재 의를 상실해 버렸다. 지금도 옥탑방이 5만 가구, 반지하가 58만 가구나 되는데 상황에서, 종부세 과세 대상자들은 10명 가운데 6명 정도가 두 채 이상 다주택 보유자인데도, 정부는 이들의 세금을 구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획재정부 자료에 의하면 이번 종부세 개편으로 줄어드는 세수 감소액은 2012년까지 총 2조 2300억 원에 달하며, 지난 9.1 세제개편안으로 줄어드는 세금까지 합하면 5년간 총 23조 530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문제는 부족한 세수를 어디서 마련할 것이냐다. 정부는 국가예산 낭비를 최대한 줄이고, 받아낼 세금은 철저히 거둬 부족분을 메우겠다고 밝혔으나, 정부지출을 크게 줄이지 않는 한 그 정도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이미 알려질 대로 다 알려졌지만 결국 부족한 세수는 사회복지비 삭감과 공기업 매각대금으로 충당할 것이다. 감세로 인한 경기활성화와 국민소득 증대는 효과가 불투명하거나 오랜 경과과정을 거쳐야하는 반면 사회복지혜택의 축소 여파는 서민들에게 바로 나타나는 일이다. 또 공기업 민영화 및 매각은 공공서비스 요금 인상을 불러 일으키게 되므로 역시 서민들에게는 다른 파장을 예고한다. 더구나 이번 종부세 감소로 인해 그동안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자치단체들에게 지급되던 부동산 교부세가 크게 줄어들어(3조 5000억 원 중 2조 2000억 원 가량 감소), 지방의 사회복지 사업들이 우선적으로 대폭 중단될 위기에 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감세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동시에 가뜩이나 부실하던 공공적 규제들도 기업 활동 지원이라는 미명 아래 전면적으로 완화되고 있다. 지난 7월 16일 정부는 출자총액제한제 폐지와 지주회사 규제 완화를 골자로 하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곧 산업자본이 금융까지 지배하지 못하도록 규제한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도 개정 또는 폐지될 예정이고, 그린벨트 해제와 환경규제완화도 잇따르는 가운데 경기활성화를 명분으로 공정거래 및 환경생태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규제들은 거의 다 완화, 폐지될 예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순을 거쳐 마침내 이명박 대통령은 일자리 창출 및 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대운하 카드를 다시 꺼내들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조급증은 박정희 시대를 닮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다. 우리나라는 1953년 1인당 국민소득이 67달러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고, 박정희가 집권한 60년대 당시에도 절대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볼 때 1961년 집권한 박정희가 경제개발과 성장을 통해 절대빈곤을 벗어나려는 것에 최우선적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절대빈곤의 탈출,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과제 중 중요한 하나였다(그렇다고 5.16 군사 쿠데타, 10월 유신, 인권유린과 독재, 경제성장지상주의 등 박정희 시대의 그림자들이 정당화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지금도 박정희 식 성장을 21세기 대한민국경제의 대안으로 꿈꾸고 있는 우리의 한심함이다. 한번 고도성장과 질주를 맛본 우리 국민들의 기대수준은 갈수록 높아만 갔고, 개발독재 시대를 지나서도 내실 있는 성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히 IMF경제 위기 를 겪으면서 ‘아름다웠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는 더욱 커져갔다. 국민들은 박정희를 닮은 오실 경제 메시아를 원했고, 이명박은 그렇게 찾아온 거짓 메시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나라는 대통령이나 국민들이나 그러한 박정희 식 재건의 꿈을 하루빨리 벗어버려야 제대로 된 우리시대의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2008년 한국경제의 시대정신은 결코 박정희가 아니다.
4. 미국경제는 여전히 우리의 대안인가?
미국은 크고 막강하다. 미국을 비판하지만 이 점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뉴라이트 계열 자유기업원의 이춘근 씨에 의하면 2003년 세계 모든 나라들의 국방비를 모두 합하면 7500억 달러 정도 되는데, 그 가운데 미국만의 국방비가 3800억 달러 정도를 차지해 다른 세계 모든 나라들의 국방비를 합쳐봐야(3700억 달러), 미국 한 나라만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막대한 액수는 미국 국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고작 3.2%에 불과하다니 얼마나 큰 국력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형성된 미국의 군사력은 전 세계의 50%를 넘고 있고, 미국의 경제력은 전 세계에서 무려 약 40%를 넘는 비중을 갖고 있다고 한다. 종합적으로 볼 때 미국 한 나라만의 국력이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를 넘는다고 평가할 수 있으므로 미국이야말로 상대가 없는 진정한 초강대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단지 보수적 학자만의 견해가 아니다. 미국의 강력한 맞수로 떠오르는 중국의 국무원 직속 사회과학원에서 낸 '2006년 세계 정치 및 안전보고'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조사에 의하면 미국은 군사력, 외교력, 기술력, 자본력, GDP 등 대부분의 항목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하며 90.69의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격차로 1위를 차지했는데, 그 뒤를 따른 영국(65.04)도 2위라는 등수는 의미가 없었다.(<연합뉴스> 참조) 세계 100대 기업 브랜드 가치를 비교하여 보아도 미국의 기업들은 브랜드가치 10위 가운데 8개, 100위 가운데 53개 차지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삼성 20위, 현대는 84위)
그러나 이미 큰 병이 들어 갈수록 무너져가고 있는 미국의 현재와 미래를 간과해서도 안 된다. 1937년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고 평가받는 최근 미국의 금융위기도 30년 가까이 세계를 휩쓸며 유일한 대안으로 선전되어온 미국식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가 무너져가고 있는 조짐으로 평가된다. 1980년대 들어 미국과 영국은 유럽이 복지병으로 중병을 앓고 있다며 유럽식 수정자본주의(복지국가) 모델 폐기를 선언하고 신자유주의를 강력하게 주창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81년 집권하면서 강력한 대소봉쇄 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군비증강과 국방비를 크게 증액하면서도 경기부양과 활성화를 목표로 엄청난 감세를 시도한다. 81년 소득세는 최고세율 70%에서 28%로, 법인세는 최고세율 43%에서 35%로 대폭 내렸다. 임기 초 그러한 기대는 성공하는 듯 했다. 내수가 살아나면서 실업률이 떨어지고 경제도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그러나 점점 70년대 개선되어가던 빈부격차가 이 시기 매우 악화되었으며, 게다가 ‘강한 미국’을 추구하며 폭발적으로 늘어난 국방예산 등의 영향으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감당하기 힘들만큼 늘어간다. 미국은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기 위해서 엄청난 국가채권을 발행해 외국에 팔았고, 그렇게 들여온 외채로 빚 잔치를 벌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기와 자기 자녀세대들이 갚아야할 막대한 국가 빚으로 잔치를 벌인 것에 불과했다.
| 81년 | 82년 | 83년 | 84년 |
세입 | 5993 | 6178 | 6006 | 6665 |
세출(군비) | 6782(1575) | 7457(1853) | 8083(2099) | 8518(2274) |
재정적자 | - 789 | -1279 | -2078 | -1853 |
무역적자 | -280 | -364 | -671 | -1125 |
(민경우의 경제이야기 발췌) (단위: 억 달러)
결국 1985년 9월 이렇게 엄청나게 늘어난 국가 빚을 미국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고, 미국경제가 망하면 세계가 다 망한다는 벼랑 끝 전술로 일본과 독일의 화폐를 강제로 절상하는 플라자 합의를 통해 가까스로 구제된다. 그러나 90년대 클린턴의 집권기간 동안 재정 건전성을 회복해 가던 미국의 재정은 현 부시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다시 한 번 악화된다. 2001년 9·11테러를 전후하여 침체에 빠진 미국경제를 살리겠다고 해서 미국은 2000년 5월 6.5%에 달했던 연방 금리를 2003년 6월까지 무려 1%대까지 낮추는 초저금리 시대를 열었다. 저금리 덕택에 미국인들은 싼 값에 돈을 빌려 집을 사기 시작했고, 그 집을 담보도 또 다른 대출을 받아 과도한 소비를 이어갔다. 그 덕택에 국내생산이 늘어났고, 2002년 전반기에는 무려 5% 성장이라는 놀라운 효과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경제 활성화를 위해 집권 초 실시한 대규모 감세로 눈에 보이는 일시적 성장효과를 보여주었다. 세금인하와 금리인하로 기업이나 개인들이 돈을 헐값으로 빌려 자기 능력범위를 넘어서는 소비를 하며 호황을 누렸고, 그러한 미국인들의 과소비는 국내경기의 활성화를 가져왔지만, 그러한 축제가 모두 빚잔치였다. 지금 미국을 넘어 세계로 번지고 있는 금융위기의 직접적 시발점이 바로 이렇게 만들어 졌다. 부시 정부 들어서만도 연방정부 적자가 해마다 1578억 달러(2002년), 3776억 달러(2003년), 4127억 달러(2004년), 3127억 달러(2005년), 2482억 달러(2006년), 1620억 달러(2007년)에 이어 올해도 추정치 4070억 달러를 예상하고 있어 갈수록 누적되고 있다. 이러한 부족한 적자를 매우기 위해 외국에 팔아넘긴 국가채권이 이미 2조 6000억 달러를 넘어섰고(이 가운데 중국이 쥐고 있는 채권이 전체 중 무려 20%에 달한다), 미국인들은 국내총생산(GDP)의 무려 81%에 이르는 11조 3150억 달러에 이르는 국가채무를 감당해야만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8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기업과 가계의 세금을 낮추고 각종 규제를 없애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놓으면, 기업활동이 활성화되어 고용이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 내수시장이 발전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수출도 늘어나면서 경제가 성장하게 된다는 선순환을 꿈꾸며 지난 30년 가까이 세계를 휩쓸어 왔다. 이러한 논리가 전혀 근거 없다고 만은 할 수는 없으나 지나친 시장만능주의와 과도한 규제철폐는 경제주체들의 책임의식을 해체시켜 결국 국가부도로 이어지고 만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신화와 허구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지나친 미국 추종병에 걸려있다. 미국이 하는 것은 다 옳고, 따라가야 한다는 병적 강박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더욱 문제는 앞선 미국이 충분한 시차를 두고 시행착오를 보여준 실패한 교훈까지도 결국 다 따라가려 한다는 점이다. 부시1기의 지나친 대결주의와 대북압박 외교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해 결국 체면만 구긴 채 이제 와서 유연한 6자 회담의 틀을 이어가고 있는 미국의 경우를 반면교사 삼으면서도,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자극적 대북정책을 선보이다가 결국 동북아 협상무대의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미 금융위기가 구체화되면서 신자유주의 모델이 파산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작은 정부, 큰 시장’, ‘금융선진화’를 내세우며 지나가는 차를 억지로 세우려 하고 있다.
가만히 보면 대한민국은 유럽을 제법 우습게 생각하는 것 같다. 특히 유럽의 복지정책이 실패해서 병이 들고, 노쇠한 유럽경제를 벗어버려야 한다는 둥 가혹한 평가를 내린다. 국민소득 대비 사회복지비 비중이 거의 최하위 수준을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가 유럽의 복지병이 걸릴까봐 걱정한다는 것은 마치 못 먹어서 바싹 말라가는 사람에게 과식하면 몸에 해롭다고 음식을 빼앗는 것과 비슷하다.
“…이중 사회보장 예산은 1993년의 경우 정부예산의 5.8%, GNP의 1%에 불과하다. 이러한 수준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1987년의 통계를 인용하더라도, 국민소득 6천 달러 이상의 선진국들에서는 정부예산의 43.2%가 복지 부문에 쓰이고 있으며, 우리와 비슷한 소득수준(2000~6000 달러)의 국가들은 평균 24.4%, 그 이하의 국가들도 평균 17.4%를 지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이에 따라 그 질적 수준이 대체로 낮을 수밖에 없고, 복지재정 조달에 있어서도 정부책임보다는 수익자부담원칙이 강조되어 복지효과가 반감되고 있으며, 복지혜택이 주어지는 대상자의 범위도 극히 제한적으로 적용되고 있다.”(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이영환 교수, 선거용 복지공약에서 진정한 복지정책으로)
우리는 유럽의 근처도 가보지 못하고서도, 유럽식 복지 과잉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가 미국식 경제를 일방적으로 추종만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또 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미국식 발전방식이 많은 모순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그 나름의 중요한 작동원리가 있다.
첫째는, ‘미국경제는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세계인들의 공동의식이다. 그것은 미국경제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큰데다가 각국에 미치는 영향도 막대해서 미국경제가 무너진다면 자국 경제도 함께 위험하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경제는 온갖 파산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세계 국가들과 투자자들이 미국부양을 위한 최소한의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미국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장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별한 혜택을 한국은 결코 기대할 수 없다.
둘째, 미국의 사회복지제도는 유럽과는 견줄 수 없이 부실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틈을 상당부분 메우는 보편화, 일상화된 미국인들의 기부와 자선(입양 등)의식이 있다. 2007년 고액 기부자 상위 50명이 낸 돈은 모두 73억 달러에 달하는 데는 이들은 미국경제가 불황인 상황에서도 전년에 비해 더 늘어난 액수다. 미국의 부자들이 내는 기부는 우리나라처럼 그저 재벌의 도덕성 면피용이거나 흉내내기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재산의 상당액을 정기적으로 희사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미국의 두 가지 장점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가 드러나고 있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라갈 수 없다.
Ⅴ. 대안적 경제, 어디로 가야하나?
처음부터 예상 했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내 스스로 주제 넘는 짓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우선, 식견이 부족하고 전문가도 아닌 사람이 경제에 대한 연재 글을 쓰다 보니 밑천이 달리는 게 사실이다. 둘째로,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아놓았는데, 어느 순간 이 글이 마치 예수님의 직통계시(?)를 받아 감히 ‘예수님의 마음을 담았다’는 뜻으로 오해될까 싶어 부담스럽다.
그러나 내가 어찌 그런 자만을 갖겠는가? 그저 ‘예수님의 마음을 담으려고 노력하는’ 정도로 필자의 속내를 이해해 주면 좋겠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경제현실들을 나름대로 비평하는 내용들을 적어왔으니 이제 연재의 마무리를 향해 가는 상황에서, 뭔가 의미있는 대안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무슨 재주로 의미 있는 경제적 대안을 내 보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부린 욕심이니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것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미래사회적 가치를 담아 나름대로 우리경제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안해 보려고 한다.
1. 지속가능한 성장
정부나 성장주의자들의 경제 청사진들에 대해 비판을 하면 흔히 듣는 소리가,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말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대안도 없이 무조건 성장과 개발만 외칠 게 아니라, 그것을 채택해도 인류의 미래가 지속가능하다는 믿음이 가는 대안적 성장, 생존 가능한 경제성장을 마련하라”고 주문해야 한다.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무엇인가? 앞서도 말했듯이 경제성장이란 무한재생이 불가능한 자원 및 재화와 환경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한계적 생산의 열매들이다. 그러면 ‘지속가능한 성장’은 어떤 것들을 말하는가?
첫째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함께 살아야할 환경, 생태와의 관계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환경과 생태는 그저 인간을 위해 주어져 있는 배경이나 재료, 도구 정도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살라고 베푸신 피조세계의 풍성함으로 보다는 당장의 편의를 위해 멋대로 남용해도 좋은 소유물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결국 당장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온갖 환경규제를 풀고 무한개발을 추구한 결과, 지구촌은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거대한 환경재앙 앞에 시시각각 노출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지금 생존이 달린 환경문제마저도 오직 당장의 경제적, 산업적 측면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정부가 지난 9월 발표한 바에 따르면 내년부터 2020년까지 분당신도시 16배 면적의 그린벨트를 해제하여 수도권의 주택 및 산업용지로 공급하겠다고 했는데, 이로 인해 가뜩이나 줄어가는 녹지공간은 더욱 줄어들게 되고, 막개발이 심해질 전망이다. 여전히 의구심을 버릴 수 없는 대운하 공약이야말로 삶의 질과 후손의 미래를 담보삼아 당장의 성장효과를 얻어 보려는 개발주의의 대표작이다.
그렇다고 이전 정부들이 지금과 크게 달랐던 것은 아니다. 역대 대통령과 정부는 마치 자기 집 창고에 쌓아놓은 재산을 퍼주듯이 국토와 환경을 마구 파헤쳐서 만들어낸 성과를 자신들의 업적인 양 자랑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고 정부와 사회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와 사회의 희생(불편)을 감수할 의지와 변화를 받아들이겠다고 인정할 때에만 우리의 인식은 의미가 있다.
두 번째, 국가와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둔 경제, 경영을 모색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미국이 다음세대의 엄청난 부담으로 남을 막대한 외채를 바탕으로 지금의 경제를 부양하는 양상이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2007년 미국 재무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국가부채 규모는 총 9조1,300억 달러에 이르는데, 이는 하루 14억 달러, 1초에 100만 달러가 누적되는 금액이며, 국민 1인당 3만 달러에 국가 빚을 지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 유일 패권국가라는 미국이 이 지경이 된 데에는 국내경기 부양이라는 목적 외에도 90년대 이후 사회주의 체제와의 무한경쟁시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Pax Americana를 유지하기 위해 쏟아 부은 막대한 군사패권 유지비용이 큰 몫을 했다. 특히 앞으로도 10년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될 재정이 2조7,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면서 끝나지 않는 전쟁비용을 미국민들은 계속 감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미국의 금융위기로 다시 1조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구제금융이 추가 투입됨으로써 국가부채는 더욱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민 1인당 3250달러, 4인가구당 1만 3000달러의 추가 부담이 생겨나는 것으로, 이로 인해 지금까지의 국가 총부채는 11조 달러에 달해 미국민 1인당 3만 5000달러, 4인가구당 14만 달러를 부담해야하는 것이다(한겨레저널 9월 23일자, ‘미국 1조 달러 구제금융으로 미국민 빚더미’ 기사 참조).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가재정적자는 다음세대 미국인들이 고스란히 짊어져야할 부채가 되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우리 당대 뿐 아니라, 다음세대가 살아갈 수 있는 경제, 사회적 환경 마련을 염두에 두는 성장방식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이웃(개인, 사회, 다른 나라)을 생각하는 성장
처음에도 말했듯이 경제영역에 ‘윈윈’이란 없다. 한 개인(이웃, 국가)의 상대적 이익은 반드시 다른 이웃의 상대적 희생을 전제한다. 시장개방을 얼마나 더 하느냐와 상관없이 전 세계는 이미 하나다. 작은 지방경제조차도 세계 모든 나라, 모든 지역과 연결되어 있으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파급효과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국가적, 경제적 건강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지만, 그 노력이 다른 나라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는 안된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부동산 투기는 개선해 나가려고 하면서도 다른 나라에서 행하는 투기는 장려한다든지, 우리 국내사회, 경제의 부담이 될 만한 공해산업이나 노동 착취적 산업을 제3세계에서는 규제 없이 장려하려 하는 것은 결코 대안적 경제성장 방식이 아니다.
그나마 이번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한 가지 진전이 생긴 것은 지금까지 성장을 위해서라면 그 자금과 투자가 올바른 것인지를 묻지 않고 환영해 왔던 묻지마 식 국제투기 자본, 금융환경을 감시하고 개선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틀이 마련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당장의 성장과 투자환경만 바라보며 치고 빠지는 국제적 투기자본이 더 이상 국민경제와 국가경제 질서를 주무르지 않도록 합당한 규제를 모색해야 할 것이고, 건전한 경쟁과 투자질서가 확립될 수 있는 국내적, 국제적 틀을 다시 모색해야할 것이다.
3. 농업과 농촌, 농민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경제
나는 농업과 농촌 문제에 관심이 많다. 대안적 경제 가치와 더 나아가 성경적 생명가치를 재발견하는데 그것이 중요한 길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주 쉽고 당연한 것 같지만 매우 간과하기 쉬운 용어정리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농업이란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산업형태요, 농촌은 바로 그런 농업을 주업으로 삼는 촌락이요, 농민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농업·농촌·농민 모두의 공통적 매개체는 농업(농사)이다.
그러나 내게 한국정부의 농업·농촌·농민정책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서슴지 않고 탈농업, 농업포기 정책이라고 하겠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정부는 농업·농촌·농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다. 그나마 식품가공 산업으로 연결될 수 있는 품목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업부문은 경쟁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하루속히 퇴출시켜야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생각하는 농민과 농촌은 관광업·숙박업·외식업·농공단지 일용노동 등으로 더 이상 농업이 아닌 도시흉내내기로 먹고 살라거나 정부 보조금이나 타서 연명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내 말이 의심스러우면 정부의 농업정책을 찾아보라) 더 이상 농업을 주업으로 하지 않고 적당히 소득이나 맞춰주겠다는 것이니 농업·농촌·농민정책이라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경쟁력 없는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이주금과 보조금을 주어 하루 속히 탈농(脫農)하게 만들고 필요한 농산물은 수입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필요가 없어진 농지는 서둘러 개발해서 집짓거나 관광지, 골프장을 만들어 수입이나 늘려주면 된다는 사고다. 그래서 농업부문 관료나 국회 농수산 상임위 자리는 전문성과 상관없이 계파나 지역, 이해관계 조정차원에서 숫자나 맞춰 갈라먹는 전리품으로 전락한다. 어차피 다룰 정책도, 의지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러한 농업에 대한 무개념·무정책·무관심은 개혁정부라던 노무현·김대중 정부라고 해서 현 정부를 비롯해 이전 보수정권보다 나을 것은 거의 없었다. 물론 모든 책임을 정부에만 돌리고 농민 자체의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흔히 말하듯이 농민들 스스로가 적극적인 대안농업 개발 노력에 나서기보다 각종 혜택이나 받고 현상유지에 급급했거나 농민들 스스로도 농업 존중적 삶을 살지 않는 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1차적 책임 돌리기 힘들다. 정부나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도시민들도 농업과 농촌, 농민의 희생을 담보로 발전하려 했음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농업·농촌·농민은 단순한 동정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농업부문의 현대적, 대안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려는 창조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다.
우선 건강한 먹을거리, 삶의 질에 대한 도시민들의 관심은 바로 우리 농업·농촌·농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건강하려면 건강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건강성을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둘째, 식량주권·식량안보의 문제는 갈수록 국민적·민족적 생존권에 직결되기 때문에 농업을 포기할 수 없다. 이미 서구 선진국들은 21세기를 지배할 화두는 더 이상 민족이나 인종 등 전통적 주제가 아니라 식량·자원·환경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그것들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올해 농업투기자본 등의 농간으로 발생한 세계적 식량가격 폭등 사태에서 최소한의 농업적 기반을 지켜온 나라들은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지만, 농업을 그저 사양산업 정도로만 여기고 수입에 의존하던 나라들은 엄청난 식량재난을 경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필리핀이다. 필리핀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100% 쌀을 자급했고 남는 20~30만 톤을 수출하는 나라였지만, 1994년 이후 수입국으로 굳어져 지금은 세계 최대의 쌀 수입국가로 전락해 이번 국제 쌀 가격 폭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농업을 사양산업으로 몰아붙이지만 세계 최대경제대국이며 자유무역의 전도사인 미국은 물론 프랑스·영국·독일 등 서유럽국가들과 풍요한 북유럽국가들도 자유무역 위반 위험을 무릅쓰고 각종 보조금 등을 줘가면서 농업의 가치를 지키려 하는 노력을 주의해야 한다.
셋째, 단지 생존을 위해 먹고 사는 차원을 넘어 더 건강한 음식을 먹고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아가기 원하는 관심으로 인해 농업적 가치는 갈수록 고부가가치 산업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명심해야 한다.
나를 포함한 도시민들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속성이 있다. 도시민들에게 농업과 농촌·농민은 ‘불쌍하지만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희생해야 하는 사양산업(촌 무지렁이)’정도 생각이 지배적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여전히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삶이나, 도시 생활의 풍요를 만끽하면서도, 입으로는 늘 “나이 들어 은퇴하면 욕심 없이 농사나 짓고 살겠다”며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망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성장 방식과 삶의 스타일을 바꿔서라도 농업적 가치를 살리겠다는 실천적 의지가 없다면 우리의 대안적 삶의 질은 결코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지 우리 개인의 행복과 건강한 먹을거리 차원을 넘어 생명과 생태적 삶, 지속가능한 성장을 지탱하는 터전인 것이다.
농촌·농민을 살리는 것은 적당히 소득이나 맞춰주는 것이 아니다. 농촌에서 사는 사람들도 엄연한 사람으로서, 생활인으로서 살아갈 최소한의 여건과 생활환경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업의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업을 포기한 농촌·농민정책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살농정책(殺農政策)이다. 유난히 농업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많이 설명하셨던 예수님의 마음(마 13장)을 생각한다면 ‘농자천하지대본’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농업과 농촌·농민 가치의 재발견, 이제는 그게 선진화다.
4. 통일시대를 담는 경제
우리나라와 민족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비하든 생각조차 못하든 상관없이 반드시 직면해야할 사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남과 북의 통일(통합)과정과 그 이후에 벌어지게 될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시대의 삶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금부터 예측하고 대비하지 않는 가운데 만들고 추진하는 모든 경제정책은 통일(통합)과정과 그 이후의 사태전개에 따라서 전혀, 또는 거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남북통일(통합)은 지난 60여 년간 너무나 달라져 버린 남과 북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구성해야할 엄청난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 예로 우리는 너무 쉽게 한미 FTA협정이 발효되면 개성공단제품이 한국산으로 인정받는 등 남북 간 협력의 혜택이 부각될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한미 FTA협정은 단지 자유무역이 활성화되는 정도가 아니라, 극단적 신자유주의 그 자체인 미국의 경제구조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면, 당연히 통일 후 북한경제도 그 시스템에 결정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미 심각하게 벌어져 있는 남북 간 경제격차의 부담에 더해 미국식 구조까지 소화해야하는 더 큰 부담으로 나타나거나, 남북 간 산업연계적 발전전망은 없이 북한이 단순한 생산기지화나 하청지대화로 전락할 수도 있는 가능성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몇 가지만 언급하려고 한다.
우선, 북한 경제의 회생을 염두에 두지 않는 우리만의 경제정책이나 시스템은 허상이다. 거시적 평화정책을 통해 북핵문제를 풀어내고, 북한경제가 실질적으로 살아나 회생할 수 있도록 국제적 환경을 조성하고 시스템적 차원에서의 대북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현 정부 들어 지난 10년 간의 대북정책을 퍼주기라며 비난을 높인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설령 통일 및 평화비용이 아무리 막대하더라도 분단 및 냉전유지비용보다는 훨씬 싸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자(인도적 지원, 경제협력, 교류 비용, 화해정책을 추진하는 정치적 대가 등)가 수치적으로 금세 계산되어 눈에 드러나는데 반해, 후자(필요 이상의 국방비, 안보유지비용, 장기적 체제대결로 인한 국제적 손실, 분쟁사태로 인한 총체적 비용 등)는 이미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있어 인식하기도, 찾아내기도, 계산하기도 힘들어 무시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통일 및 평화비용이 아무리 많은 부담을 준들, 전쟁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의 정치·경제·사회적 비용에 비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순수 경제손익 기준으로만 살펴봐도 적대감에 사로잡혀 끝까지 북한을 옥죌 게 아니라 남북 간 신뢰와 협력을 적극 추구하여 북한경제 자체의 회생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할 것이다.
둘째, 앞의 주장과 연결되는 것으로 한국경제 방향과 구조를 북한경제와의 연결성·연속성 차원의 구상하고 입안해야 할 것이다. 북한을 단순히 하청기지화하거나 사양산업만 넘기는 차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북한의 사회적·환경적·산업적 특성과 장점들을 적극 찾아내어 육성하도록 돕고, 그 과정에서 남북 산업이 유기적 연계성을 갖출 수 있도록 구상해야할 것이다.
끝으로, 통일한반도시대를 염두에 두어서라도 우리의 심각한 식량자급률을 다시 끌어올려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고작 27%정도에 불과한데, 그것도 95%정도의 쌀 자급률을 보탠 덕분이고 쌀을 제외하면 그 수치는 5%를 밑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적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 몫을 염두에 둔다면 식량자급률은 거의 바닥을 헤맬 것이다. 식량주권, 식량안보시대라는 21세기를 살고 더구나 우리가 통일한국을 염두에 둔다면서도 시대착오적 비교우위론에만 사로잡혀 농업을 포기한다면 그 대가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Ⅵ. 경제에 예수님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가?
1. 신앙과 동떨어진 경제현실들
"기독교세계관! 하나님의 영역주권! 하나님의 주되심!" 80년대 이후 보수적인 교회들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던 친근한 용어들이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건가? 20여 년이 넘도록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소망, 관심, 심지어 무의식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다고 당연하게 말해왔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일상생활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의 주되심으로 심각하게 고민되지 않고 있다.
경제가 중요하다고 모두가 떠들어대고 기독교인들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만, 장로라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집사라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경제정책이나 소신, 그 어디에서 기독교세계관이나 하나님의 주되심의 흔적이나 찾을 수 있는가?
거창하게 나갈 것도 없다. 우리 자신의 재테크, 취업, 한국경제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눈 등 그 어디에서 예수님의 시각이 묻어난 적이 있는가? 언제나 우리에겐 성경은 성경, 현실은 현실이다. 우리 각자도 총체적 복음, 하나님의 주되심을 늘 외치고는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죽어서 구원받는 데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언젠가 돌아갈 고향 시골집의 늙은 부모님’ 같을 뿐이다.
왜 목회자의 강단은 구체적 현실을 살아가는 생활인에게 올바른 이정표가 되지 못하며, 왜 믿는 경제인, 경제학자의 현실인식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이 전혀 묻어나지 않을까? ‘현실이 원래 그렇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말자. 애써서 ‘그래서는 안된다’고 고민이라도 하자. 이 고민이 나같이 전공과도 상관없는 얼치기가 감히 ‘경제’라는 어려운 화두를 들고 씨름하게 된 이유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내 연재를 읽어온 독자에게 드리는 진심은 내 이론 자체의 옳고 그름보다(내가 알면 얼마나 알겠나?), 내가 함께 나누고 싶었던 예수님의 마음을 이제 우리 모두 숙제로 떠안고 고민하기 바란다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전략이나 지식, 정보가 아니라, 마음이다(고전 13:8).
2. 2008년 현재, 그리스도인은 예수 이름으로 ‘바알신’을 쫓아내야할 축귀사다.
나는 귀신(사단)의 존재를 믿는다. 그런데 귀신은 개인에게 역사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체제, 구조, 문화에도 강하게 역사한다(이에 대해서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이라는 책을 권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런 악한 권세를 물리쳐야 한다. 그러므로 축귀(逐鬼)는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사명이다.
귀신들림의 특징 중의 하나는 귀신을 싫어 하지만, 감히 저항할 수 없어 운명이라 믿고 따라간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와 구조에 역사하는 악한 권세의 특징에는 이러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오늘날 우리의 병든 경제현상은 바로 이러한 악한 권세의 속임수와 관련이 깊다고 나는 믿는다. 다시말해 오늘날 경제주의, 성장주의는 단순한 사회․경제적 현상을 넘어 영적인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개인이든 국가든, 더 크고 강력해 지고 싶고 부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이웃, 자연을 팔아버리게 만드는 바알신(구약)과 맘몬신(구약)을 대적할 것을 경고한다.
그런데 구조적 귀신들림 현상의 어투는 항상 이런 식이다.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사회구조가 문제인 것은 나도 안다. 가슴 아프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그런 걸 어쩌랴? 이제 나(우리)라도 악착같이 따라가 잘 살아야 그나마 선행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이렇게 핑계대면서 잘못된 질서를 고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말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망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다. 좋아서 따라가든,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 믿고 좇아가든 귀신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MB현상’은 종교적인 것이다.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이 바알주의의 선봉이 된 것은 그를 잉태한 한국교회가, 그를 가르친 우리시대 목회가 소경이기 때문이다(눅 6:39). ‘MB현상’은 보수냐 진보냐의 상대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기득권과 욕망을 우상화한 바알주의다. 거대하게 종교화된 경제주의 ‘바알(맘몬) 신앙’과 맞서지 않는 한 이 시대에 참다운 신앙은 어렵다.
기독교의 옷을 입고 이미 교회 강단을 장악하고 있는 경제주의, 바알주의의 정체를 폭로해야 한다. 경제주의의 정체를 잘 모르면 죄악 행하는 도구,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숭배 도구가 된다. 시민운동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뉴라이트 운동은 사실상 타락한 기독교운동이다.
“통일이니 복지니 윤리니 다 따분한 소리다. 경제가 최고다. 대통령도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이제는 CEO다.”라고 말하는 어느 장로의 사상. 거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이 땅의 목회자들. 이게 한국교회의 현주소다. 이젠 보수냐 진보냐는 중요하지 않다. 누가 맘몬주의자인가? 사유재산에 신앙의 허울을 씌워 절대화하려는 사람이다. 일단 돈(경제주의)에 빠지면 모든 것을 돈의 잣대로 평가한다.
3. 경제가 중요할수록 경제를 뛰어넘는 가치를 알아야 한다.
내 자신 ‘경제’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답답함이 있다. 생활에서도, 언론에서도 관심은 온통 ‘경제, 경제’다. 그러면서도 ‘경제’란 단지 ‘돈 많이 벌어 부자 되는 것’이라는 등식이 너무 당연하게 굳어져 있다(어린이를 대상으로 출판된 경제, 경영 관련 서적들을 살펴보라. 모두 돈 많이 버는 이야기들 뿐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경제(경기)도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경제(경기, 투자)를 바라보는 언론과 사람들의 기대는 항상 ‘호황’이어야 하고, 항상 ‘성장’해야 하고, 항상 ‘성공’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몰아댄다. 욕심, 미련, 집착이다. 결국 불행의 씨앗을 스스로 심는 짓이다. 사람들은 언제 물어도 ‘지금이 가장 힘들다’고 대답한다. 기대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이다.
‘경제’가 단순히 ‘돈 많이 벌어 부자 되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더 큰 소망을 바라보지 못한다. 어떠한 가치 있는 실험도 하지 못한다. ‘이상’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기 때문에 쉽게 성취되지 않아도 끊임없이 품어야 할 소망이다. 그나마 사회주의자들은 현실에서 실험을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기독교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사회 속에서 비치는 기독교의 모습이 최소한의 사회적 설득력을 가질 때 사람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보다 기독교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은 빵을 먹고 살고 있으며, 빵은 만인을 위하여 존재해야만 할 것이다. 사회는 만인을 위해 빵이 존재할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만 하며, 그 때 비로소 정신적인 문제는 그 모든 깊이에 있어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인류의 상당한 부분에게 빵이 보증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위에서…투쟁의 기초를 둔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은 냉소주의가 무신론적인 반응이나 정신의 부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러시아지성사, 니콜라이 베르자예프, 종로서적)
경제가 중요하다며 긴 연재글을 쓴 사람으로서 ‘경제는 결코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로 끝내는 것은 매우 엉뚱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경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경제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경제 중요성 부각될수록 오히려 경제와 경기의 등락을 넘어서는 하나님나라 소망이 우리 안에 자리잡기 바란다. 경제에 있어 성장만을 내세우면 불평등과 속박을 낳을 것이나, 희년의 가치를 내세우면 자유와 은혜를 낳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뉴라이트가 그리는 선진한국과 맞서는 희년한국을 주장해야 한다.
4. 극단을 배격하고 함께 살 수 있는 지혜를 모으자.
지금까지의 나의 연재는 경제현상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나 새로운 정보제공이 아니다. 다만 나는 다수, 특히 사회적 약자를 위한 공의로운 경제건설을 위해 반드시 고민해야만 할 지향성을 함께 모색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신자유주의의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비판했다고 해서 ‘큰 정부, 작은 시장’이 해답이라거나, 자본주의를 비판했다고 해서 당장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대안으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더 옳고 선한 경향성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정책들은 그 시대와 주변여건에 따라서 항상 변할 수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도 한 제도나 사상이 만능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만능론은 이데올로기가 되며,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사실 나는 대한민국 안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이념갈등과 세대갈등이 몹시 걱정스럽다.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는 지나친 가치의 대립은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선한 경쟁은 없어지고, 살기 위해서라도 빼앗길 수 없는 죽음의 정권쟁탈전만 남을 것이다.
통일을 생각한다면 북한은 경제제도를 포함해서 부단히 자본주의 체제의 장점을 흡수하는 과정으로 나아가야 하고, 남한은 부단히 사회주의로부터 건강한 자양분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선한 모색과 실험들을 해 나가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필자로서 더한 영광이 없겠다.
구교형/ 성서한국 사무총장
뉴스엔조이에서..